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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진의 역사 독립군 임종국

임종국, 벼랑 끝에서도 꼿꼿했던 '외골수'
[역사 독립군 임종국 7화] 외톨이 사학자 임종국 선생과 시민이 만든 친일인명사전

16.10.18 13:18 | 글:조호진쪽지보내기|편집:김대홍쪽지보내기

▲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 연구는 역린이었다. 친일파의 배족사(背族史)를 기록하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건다고 해서 될 일 또한 아니었다. 철두철미하지 않으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위험한 과업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업을 단독으로 감행했다. 그리고 참회와 반성조차 없는 친일파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20년을 바쳤던 재야 사학자는 1989년 11월 12일 향년 60세로 눈을 감았다.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얻고자 했지만 지금의 나는 5평 서재 속에서 글을 쓰는 자유밖에 가진 것이 없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고독한 60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었어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 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만한 자유를 얻고자 했던 시인, 고향인 문학으로 돌아가는 게 꿈이었던 문학평론가 임종국은 생명 연장을 간절히 원했다. 의사에게 2~3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호소한 것은 필생의 과업인 친일문제 연구 때문이었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못했던 과업은 <친일파총사>(전체 10권)였다. 민족의 환골탈태를 위해 원고지 20만 매 분량, 집필기간 8년이 예상되는 집필 계획을 세웠지만 하늘은 그의 중뿔난 과업 수행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 생을 바쳐 기록한 1만2천장의 친일인명카드. ⓒ 민족문제연구소

그의 영정 앞엔 생을 바쳐 기록한 1만2천장의 친일인명카드와 그토록 애용했던 담배가 놓였다. 외톨이 사학자의 빈소엔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생명이 꺼져가자 그는 잠시 시인의 마음으로 돌아와 "바람이고 싶은/ 나는 무엇인가// 바람이어야 하는/ 나는 무엇인가"(임종국의 시 '바람'의 일부)라고 자문했다.

이 민족이 친일로 타락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시인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친동생 임종철(83)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고단했던 형의 삶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형에게도 형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가까이 지낸 사람도 적지 않았고 그중에는 일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생전에 형은 사실상 외톨이 늑대(lone wolf)로 살았다."

역사 독립군 임종국 선생이 남긴 저서로는 <친일문학론>(1966년) <흘러간 성좌>(1966년) <발가벗고 온 총독>(1970년) <한국문학의 사회사>(1974년) <한국사회풍속야사>(1980년) <일제침략과 친일파>(1982년) <밤의 일제침략사>(1984년)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년) <한국문학의 민중사>(1986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2>(1989년>가 있다. 편역서로는 <이상 전집>(1966년) <정신대 실록>(1981년) <친일논설선집>(1987년> 그리고 <해방전후사의 인식 1>(1979년)과 <해방전후사의 인식 2>(1985년) 등에 친일 관련 글을 실었다.

생계의 벼랑 끝에서도 꼿꼿했던 외골수 임종국 선생

▲ 임종국 선생이 친일문제 연구를 했던 천안 요산재 들머리에서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들이 모였다. 선생의 말년을 수행한 정소진(오른쪽에서 세 번째)씨는 선생이 남긴 친일연구자료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 조호진

그는 외골수였다. 가족의 생계와 본인의 건강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그런데도 친일문제 연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대학 강사 자리를 사양했다. 어느 날은 독립운동가 후손이 찾아와 연구비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독재정권에 가담했던 그의 전력 때문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독립운동가 후손이 연구비를 지원하겠다고 찾아왔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무리 궁핍해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독재자에게 협력한 자의 돈을 받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신 선생님의 꼿꼿한 모습이 찡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지만 제가 본 선생님은 늘 웃는 모습이었다. 순수한 소년처럼 영혼이 맑았던 선생님이 그립다."

선생의 말년을 수행했던 제자 정소진(58·사업가)씨가 16일 들려준 일화다. 당시 단국대 천안캠퍼스 도서관 사서였던 그는 스승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친일인명카드 등의 자료를 정리했다. 스승께서 생전에 "이 자료가 민족사를 정립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사용될 것"이라고 강조했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1989년 11월말부터 다음해 2월까지 3개월에 걸쳐 트럭 1대 분량의 자료를 정리해서 반민족문제연구소(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를 준비하던 분들에게 전달했다. 이 자료는 훗날 친일인명사전의 씨앗이 됐다.

국회가 친일연구비 5억원 삭감하면서 타오른 친일청산의 불꽃

▲ 지난 2004년 1월 1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친일인명사전 성금 5억 원 모금 달성을 기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인명사전 네티즌 성금 이용방안에 대한 협약서>를 체결하는 모습.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모금운동에 동참한 누리꾼들의 이름이 적힌 통장과 저금통을 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임종국 선생의 과업을 이어 받은 반민족문제연구소가 1991년 설립됐다. 선생이 남긴 친일인명카드와 자료를 물려받은 연구소는 1994년 <친일인명사전> 출간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편찬 비용 부족으로 사업이 중단됐다. 1999년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전국의 교수 1만 명이 '친일인명사전 편찬 지지 선언'에 동참했고 이에 힘을 얻은 연구소는 2001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후 뜻있는 국회의원들의 노력으로 사전편찬 기초사업인 '일제단체인물연구' 지원예산 5억 원이 책정됐다. 민족사의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데 2003년 12월 29일 국회 예결위원회 예산조정소위(위원장 박종근 한나라당 의원)가 2004년도 예산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예산 전액이 삭감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가 들어섰지만 소용없었다. 반역의 세력에 의해 친일청산 과업이 좌초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역사의 반전을 연출한 건 바로 그들이었다. 국회에 의해 친일청산의 불길이 꺼지자 누리꾼(네티즌)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불길을 살린 진원지는 <오마이뉴스>였다.

2004년 1월 7일 친일연구자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국회의 몰역사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칼럼을 게재하자 누리꾼 김호룡(당시 부산 동인고 교사)씨가 댓글로 친일인명사전 발간 비용을 모으자고 제안했고 <오마이뉴스>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네티즌의 힘으로!'라는 공동 캠페인을 시작했다.

▲ 지난 2008년 4월 29일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발표 기자회견'이 열리는 서울 중구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 앞에서 국가쇄신국민연합 소속이라고 밝힌 보수단체 회원들이 '애국가 만든 안익태가 왜 친일파냐' '박정희, 유관순도 친일파냐' '너희들은 빨갱이냐'라면서 고함치며 항의하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 지난 2008년 4월 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서울 중구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4776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친일청산의 불꽃은 들불처럼 타올랐다. 캠페인 시작 일주일 만에 1만 명이 넘는 누리꾼이 동참하면서 3억 원 넘게 모금되자 일부 국회의원들이 뒤늦게 모금에 동참했다.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행정자치부가 '친일인명사전 편찬기금 모금은 기부금법 위반이므로 즉각 중단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였으면 불길은 사정없이 진압당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친일청산은 용납 못할 역린이기에 권력의 비늘을 태울 불길을 결코 봐두지 않았을 것이다.

누리꾼들이 '역사적 과제를 망각한 행위'라며 성토하자 행자부는 공문발송 4시간 만에 철회했다. 캠페인 초기에 모금(10만 원)에 동참한 당시 허성관 행자부 장관은 "누리꾼들이 순수한 뜻에서 투명하게 모금되고 있는 만큼 사후에 (기부금) 신청을 하더라도 허가해줄 예정"이라고 밝혔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족정기를 되살리려는 누리꾼의 정성에 경의를 표한다"며 모금(10만 원)에 합류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기금 모금 행진에는 지위고하, 남녀노소, 장애 불문이었다. 대구지역 교사 6명은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의 일부를 성금으로 보냈고, '청년백수'라는 아이디의 누리꾼은 면접비로 받은 2만 원을 친일청산 군자금으로 보탰으며, 지체장애인 3급 이삼식씨는 "수입이라고는 국가에서 주는 것이 전부이기에 겨우 만원밖에 못 냈다'며 죄송하다는 댓글을 달았다.

<오마이뉴스>와 민족문제연구소의 목표액은 1억 원이었다. 그것도 3.1절까지 3개월의 기간을 잡았다. 3개월에 1억 원만 모여도 성공이라고 예견했던 이들은 국민의 친일청산에 대한 열기를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했다. 국회가 삭감한 5억 원은 불과 11일 만에 달성됐고 모금행진이 7월까지 이어지면서 3만 명의 누리꾼과 국민들이 7억5000만 원의 친일인명사전 편찬기금을 모아주었다. 친일세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역사적인 쾌거였다.

시민 펀딩으로 만들어진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의 공소장

▲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2009년 11월 8일 오후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리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2009년 11월 8일) 당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사진 왼쪽부터)이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친일인명사전'을 헌정하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2800쪽 분량의 3권짜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4389명의 친일파. 이완용과 송병준 등 을사5적과 황군(皇軍)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 친일경찰 노덕술과 친일헌병 김창룡, 친일법조인 민복기, 친일종교인 정춘수, 이종국, 최린, 노기남, 친일문화예술인 서정주, 이광수, 홍난파, 현제명, 김은호, 문예봉, 유치진,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조선일보> 설립자 방응모,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홍진기,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

2009년 11월 8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가 열렸다. 애초의 보고대회 장소는 숙명여대 아트센터였다. 하지만 숙명여대 측은 안전상의 문제를 이유로 대관 계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이날 숙명여대 정문에선 '박정희 바로 알리기 국민모임' 등의 보수단체 회원들이 친일조작, 역사왜곡 중단 등의 구호를 외쳤고 백범 묘소에선 '친일청산'과 '친일타도'가 울려 퍼졌다. 자주 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한 민족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 친일인명사전 수록표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은 국가가 외면한 친일문제를 시민들이 제기하고 작성한 역사의 공소장이다. 친일파에 의해 암매장 됐던 역사를 되살린 역사 독립군들, 그들이 눈물과 분노를 떨치고 일구어낸 <친일인명사전>을 헌정 받은 백범 선생의 감회는 어떠했을까. 순국선열들의 한이 다소라도 달래졌을까. 임종국 선생은 맺힌 한을 풀었을까. 친일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된 지 60년만에 만들어진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정의의 신호탄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16일 기자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친일인명사전>의 의미에 대해 "친일연구가 전무했던 시절에 임종국 선생이 남긴 친일연구 자료는 친일 반민족 행위를 규명하는 토대를 제공하면서 마침내 사전으로 집대성됐다"면서 친일파들의 운명을 이렇게 내다봤다.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친일인명사전>은 한국 사회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역사의 공소장인 <친일인명사전>은 민족반역 행위를 기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안내하는 지도가 될 것이다. 친일과 쿠데타 등으로 정권을 차지했던 친일세력과 정통성과 합법성이 결여된 보수 세력에게 <친일인명사전>은 아킬레스건이다.

그들은 친일행위를 정당하기 위해 친일문제에 대해 무시, 왜곡, 공격하지만 학계뿐 아니라 사법부에서까지 역사적 사실로 판명한 <친일인명사전>에 정면 대응할 수 없는 상태다. 권력의 힘으로 역사정의를 억누를 순 있지만 진실의 편인 국민에게 지지받을 순 없다. 친일반민족행위를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 박힌 역사의 가시는 결코 뽑히지 않을 것이다.

한편 <친일인명사전>은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하는데 훌륭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영화 <암살>과 <밀정>은 친일문제 연구의 토대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다. 이처럼 <친일인명사전>이 교육 현장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알리는 콘텐츠로 활용되길 희망한다. 미래 세대를 역사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일에 <친일인명사전>은 아주 중요한 콘텐츠가 될 것이다."

조형물로 부활하게 될 역사 독립군 임종국

▲ 2005년 임종국 선생에게 추서된 보관문화훈장. ⓒ 민족문제연구소

언뜻 보면 역사는 칼을 쥔 자의 것이다. 포악한 칼로 진실의 입에 자물쇠를 채우면서 정의를 굴복시켰지만 역사의 재판정에서 심판받는 것은 압제자의 칼이었다. 정의의 펜은 칼로 흥했던 자들을 소환해 심문하고 심판한 뒤에 기록으로 남긴다. 최후의 승자는 칼이 아니라 펜이다. 칼로 흥하고 성한 자들이 끝내 망하고 쇠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할 것은 칼이 아니라 펜이다.

2013년 96세의 일기로 타계한 원로시인 이기형 선생은 2002년 임종국 선생 13주기 추모제에서 낭독한 추모시를 통해 "임종국 선생이 손수 피눈물로 엮은 친일명단 수 만장이 팔만대장경판처럼 국보로 지정되는 바로 그날 우리나라는 비로소 바로 서게 될 것"이라고 외쳤다.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경판처럼 객혈 토하며 기록한 1만2천장의 친일인명카드는 민족혼을 세우는 보물이다.

외톨이 사학자 임종국은 패자처럼 떠났으나 결국엔 승자로 돌아왔다. 모두가 회피한 역사의 길을 꼿꼿하게 걸어 간 사나이가 굴린 수레바퀴는 후예들에 의해 <친일인명사전>이라는 민족사의 대과업을 일구었다.

민족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흐른다. 다만 고여 썩는 것들은 비루함이다. 역사가 부여한 과업을 투철하게 수행한 역사 독립군 임종국은 그래서 친일청산의 투혼을 불살랐던 천안에서 조형물로 부활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생이여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일제잔재 청산, 남북통일을 향해
온 정성과 힘을 쏟고 있습니다
내내 저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이기형 시인의 임종국 선생 13주기 추모시의 일부)

▲ 원로시인 이기형 시인이 생전에 임종국 선생 13주기 추모제에 바친 추모시.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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