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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진의 역사 독립군 임종국

'독립 위해 죽겠다' 어느 목사의 유언
[역사 독립군 임종국 6화] 임종국상 수상자 김승태 박사가 들려준 기독교의 빛과 그늘

16.10.12 07:45 | 글:조호진쪽지보내기|편집:박정훈쪽지보내기

▲ 임종국상 6회 수상자 김승태 박사 ⓒ 김승태

일제 강점기에 한국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기독교 친일연구 전문가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김승태(61) 박사를 지난 9월 20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나 기독교의 빛과 그늘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 박사는 임종국상 6회(2012년) 학술부문 수상자로 친일인명사전에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회장 장병화)는 김승태 박사의 <식민권력과 종교>에 대한 수상 선정에 대해 "그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노작으로 종교계의 금기를 허문 용기 있는 학술 업적"이라며 "임종국 선생의 학문 세계와 실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공로로 임종국상을 드린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임종국 선생이 발간을 계획한 '친일파총사'(전 10권) 중 '종교침략과 친일파' 6·7권 동양종교와 서양종교 편과 8권 '사회교육침략과 친일파' 편을 집필하기로 한 인연이 있다. 그런데 임 선생이 지병(폐기종)으로 1989년 타계하면서 연구가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김 박사는 선생의 뜻을 이어서 금기로 불리는 '친일 기독교 역사' 연구의 길을 걸었다. 김 박사는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1994)과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과 한국 기독교계의 대응>(2006) <자유독립을 위한 밀알 신석구>(2015) 등의 기독교 역사서를 펴냈다.

'친일파총사' 공동연구 계획했지만 임종국 선생 타계로 중단

▲ 김승태 박사의 저서 <식민권력과 종교>와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그리고, 임종국 선생의 저서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 2권 ⓒ 조호진

▲ 임종국 선생이 자신의 저서에 친필 서명해 김승태 박사에게 선물한 두 권의 책. ⓒ 조호진

김승태 박사가 임종국 선생을 처음 만난 건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근무하던 1989년 1월이지만 책으로 만난 건 1984년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생 시절이다. 이만열 교수를 만나면서 일제의 사상침략과 종교침략에 대해 연구했는데 이때 <친일문학론>을 통해 도움을 받은 바 있다.

김 박사는 "친일문제 연구의 중요성을 설파하시던 선생의 그 꿋꿋한 의기는 지금까지도 저에게 연구에 임하는 지표가 되고 있다"면서 친일연구에 일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선생께서 기타나 아코디언 연주를 들려주시기도 하셨다. 알려진 것과 달리 참으로 자상하고 소탈하고 낭만적이셨던 풍모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독립기념관 교육과장을 맡고 있었기에 독립기념관 직원교육 때 선생을 강사로 초빙하여 모셨다. 건강이 악화된 상황인데도 선생께서는 일제 침략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연하면서 감동을 주고 떠나셨다."

김 박사는 임종국 선생께서 "<친일문학론>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관심이 많았다. 초판 1500권이 팔리는 데 10년이 걸렸다"면서 "친일문제를 조직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으니 김 선생이 도와 달라"며 연구 참여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친일파총사' 10권과 별권으로 '친일인명사전과 용어사전'과 '친일논설전집' 등 모두 12권에 대한 공동연구 계약서를 1989년 3월 15일 작성했다"면서 "선생께선 10년은 더 사실 것으로 기대하고 계획했는데 그해 11월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박사는 임 선생의 영향으로 그해 11월 독립기념관을 그만두었다. 그만둔 이유는 전두환 이름으로 독립기념관 건립비 초안을 작성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그는 "독재자의 하수인이 되기 위해 공부를 했나하는 회의가 들면서 독립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전두환을 암살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용기가 없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마침 폐결핵 초기여서 이를 핑계로 잠시 휴직했다 그만두었다"는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기독교가 일제 말기에 친일종교로 타락

▲ 평양신사 참배하는 장로회총회 대표단에 대한 조선일보 기사. ⓒ 민족문제연구소

▲ 평양신사 참배하는 장로회총회 대표단에 대한 조선일보 기사. ⓒ 민족문제연구소

1919년 3.1 만세의거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였다. 김 박사는 "기독교인은 당시 인구의 1.3%였는데 3.1만세로 투옥돼 재판받은 사람 가운데 기독교인이 17.6%였다"면서 "장로회 총회장이던 평양의 김선두 목사, 경북노회장이던 대구의 이만집 목사 등이 만세운동을 주동할 정도로 기독교의 역할이 굉장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서면서 수난을 당하고 순교자까지 배출한 기독교는 일제 말기 들어서 탄압이 심해지자 황민화정책 및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등 부일에 앞장섰다. 김 박사에 따르면 대표적인 친일파 기독교인은 감리교의 정춘수와 신흥우, 장로회의 정인과와 김길창, 성결교의 이명직, YMCA 박희도, 연동교회 원로목사 전필순 등 교단 지도자와 이동욱, 백낙준, 김활란, 오문환 등 기독교 인사다. 기독교 친일행적은 아래와 같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1939년까지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 1355회 등을 열고 국방헌금을 바친 데 이어 1942년엔 육군과 해군에 비행기 한 대와 기관총 7정에 대한 거금을 냈다. 그리고 같은 해에 1540개의 교회 종을 떼어 바쳤다.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했다 변절한 정춘수는 1944년 경성, 제물포, 평양, 원산, 강경 등의 34개 교회를 폐쇄해 그 재산을 팔아 비행기 3대의 헌납 기금으로 바칠 것을 결의했다.

김 박사는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변질과 부일 협력은 일제의 외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의 협력이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것은 세속의 권력에 영합하고 추종한 행위로 기독교인으로서는 용서받지 못할 큰 죄악을 범했다"고 지적했다.

독재정권에 협력한 목사들, 독재자에게 이용당한 기독교

▲ 금기 영역인 '기독교 친일역사 연구'에 매진한 김승태 박사 ⓒ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 운동에 나선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을 잡아들이면서 세계로부터 기독교 탄압국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 초청집회를 열게 해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독재자에게 이용당했다.

당시는 5명만 모여도 잡혀가고 부흥회 전단까지도 검열받던 시대였는데 박정희 정권은 종교 탄압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여의도 집회 단상을 만들어주고 군악대를 지원했으며 국가행사에 사용하던 여의도광장을 사용료도 받지 않고 사용하게 했다. 허허벌판이던 여의도광장에 110만 명이 모이는 초대형 집회가 가능했던 것은 독재정권의 지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와 함께 대학생 민주화운동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로 김준곤 목사가 창립한 CCC(한국대학생선교회) 정동회관 부지를 제공했다. 조용기 목사는 여의도로 교회를 옮기면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았다. 이를 통해 김준곤 목사와 조용기 목사는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정치와 교회를 유착시킨 장본인이 됐다."

김 박사는 한국 기독교가 친일반민족 행위에 그치지 않고 독재정권과 유착한 것은 죄책(罪責) 즉, 친일 역사에 대한 잘못을 회개하거나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피압박 민족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박해와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과 해방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일본제국주의와 독재정권에 유착하면서 기득권 종교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반민특위에 체포됐던 친일 거물 김길창 목사 부귀영화 누려

▲ 2008년 평화통일-평양공동기도회에 참석한 뒤 평양봉수교회에서 기념촬영. ⓒ 김승태

평양 신사참배를 주도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손양원 목사의 지위를 박탈했던 친일 거물 김길창 목사는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이내 풀려났다. 그는 부산 남성여중고를 설립하고 동아대학교 설립에도 참여하는 한편 부산신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지내면서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과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한국 기독교의 타락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다.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장로교 27회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사람이나 투옥된 이들보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 사람의 수고가 더 많았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반면에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회개한 목사가 있다. 영락교회 고(故) 한경직 목사다. 한 목사는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모임에서 "나는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다.

2006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신사참배와 독재정권에 야합한 죄를 참회했다. 교단 차원에선 2006년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처음으로 친일 행적을 사죄한 데 이어 2007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가 신사참배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을 발표했고,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같은 해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참회했고, 2009년 예장합동과 통합, 기장, 합신 등 4개 장로교단도 신사참배 참회기도를 했다.

친일 목사의 후손이 대신 사죄한 경우도 있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의장과 전남 교구장을 지낸 조승제 목사의 손자로 명동 향린교회 담임인 조헌정 목사는 "일제의 전쟁 승리를 기원한 할아버지의 부일 행각은 민족의 지탄이 되는 중차대한 죄"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기독교 외부의 시각은 조헌정 목사를 제외한 대다수 기독교인과 교단의 참회에 대해 비판적이다. 진정으로 참회했다면 친일청산과 역사정의 실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참회 이전과 이후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 서울역 앞에 세워진 강우규 전도사의 동상 ⓒ 조호진

신사참배 등으로 친일한 반기독교인이 많았지만 신사참배 거부와 항일투쟁으로 목숨을 바친 기독교 독립운동가 또한 적진 않았다. 의를 위해 목숨 바친 그들로 인해 한국 기독교의 정신이 살게 된 것이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말과 혀로 하는 위선과 비겁함이 아님을 삶으로 보여준 이들의 기독교 정신은 남북평화로 이어질 것이다. 독립운동에 목숨 바친 이들의 고결한 이름은 다음과 같다.

백범 김구, 김마리아, <밀정>에서 김장옥으로 등장한 김상옥, 이화학당 출신 유관순,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 매국노 이완용의 가슴을 찌른 이재명, 우당 이회영, 동암 차리석, 김교신, 김규식, 김선두, 김약연, 남궁억, 박차정, 서재필, 손정도, 신석구, 안창호, 여운형, 이동휘, 이상재, 이준, 우덕순, 장인환, 전명운, 조만식, 차미리사, 함태영, 이필주...

김승태 박사가 들려준 두 명의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를 가슴에 새기면서 <역사 독립군 임종국> 7화를 마무리해야겠다. 64세의 강우규 의사는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가 탄 마차에 폭탄을 투척했다. 사이토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주위에 있던 일본인 37명이 중경상을 입고 이들 중 경찰과 일본기자가 목숨을 잃었다.

학교와 교회를 지어 신학문을 가르친 강우규 의사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전도사였다. 기독교 사역자로서 그는 생명을 해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평화를 짓밟으며 한민족의 존엄을 짓밟은 침략자를 단죄한 것이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당시 서대문감옥) 사형장에서 순국하기 직전에 남긴 절명(絶命) 시는 또 다시 오천년이 지나도 이 민족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 독립선언문 참여 당시의 신석구 목사. ⓒ 김승태

3.1 독립선언문에 참여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은재 신석구(1875~1950) 목사는 하나님께서 민족에게 준 주권을 지키지 못하고 일제에게 빼앗긴 것이 역사적인 죄이며 그것을 찾을 만한 기회에 찾으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 또한 죄라는 것을 깨닫고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한민족이라면 그가 자서전에 남긴 고백을 새겨들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두 손 모아야 하겠다.

"예수 말씀 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것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해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 독립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 하여도 만족한다고 생각하였다."

친일 청산 외면하는 기독교는 하늘과 땅의 심판받을 것

▲ 서대문형무소에 설치된 순국선열 추모비. 원형 조형물 안에 순국선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조호진

기독교는 고난과 순교 그리고, 회개의 종교다. 강우규 전도사는 사형당한 게 아니라 순교한 것이다. 6.25 전쟁 중에 인민군에 의해 죽임당한 신석구 목사의 순교의 피는 독립과 자유의 땅에 뿌려졌다. 역사의 죄책을 외면한 친일 기독교는 하늘과 땅에서 청산의 대상이지만 하나님과 민족을 위해 흘린 독립운동가의 피는 민족의 가슴에 살아 영생토록 기억될 것이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외면하고 있다. 배금주의에 찌든 교회의 타락은 세상의 부패를 뺨칠 지경이다. 구원과 영생을 외치는 기독교가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역사와 정의를 배신하면서 불의의 편에 계속 선다면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땅에서의 심판 또한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진리이고 순리다.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그렇게 되어야 믿음의 확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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