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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진의 역사 독립군 임종국

"모윤숙은 친일파" 외쳤다가
뺨 맞은 고교생 교육감 됐다
[역사 독립군 임종국 3-1] 해직교사 출신 김지철 충남교육감

16.08.30 16:57 | 조호진 기자쪽지보내기

▲ "모윤숙은 친일파"라고 외쳤다가 뺨 맞앗던 학생이 선생이 됐지만 뺨 때리는 선생이 되지 않았습니다. ⓒ 김지철

"여러분!"

이 한 마디 뒤의 숨 막히는 침묵, 그리고 또

"여러분, 나는…, 나는…."

그러나 선생님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가 선생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결국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칠판 앞으로 가서 분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가장 큰 글씨로 이렇게 썼다.

"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

그리고 칠판에 이마를 대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힘없이 우리를 향해 손짓을 했다.

"애들아, 모두 끝났어…. 그만 돌아들 가야지."

교실에 울려퍼진 "선생님, 모윤숙은 친일파입니다!"

▲ 김지철 선생은 영어선생이었으나 역사선생보다 더 역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 김지철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일부)

1969년 충남 천안고등학교 국어시간. 검정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군인 같은 자세로 국정 교과서를 펼쳤습니다. 선생이 모윤숙 시인에 대해 소개할 때였습니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습니다.

"선생님, 모윤숙은 친일파입니다!"

학생의 느닷없는 외침에 선생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그건 발언이 아니라 도발이었으니까요. 대한민국예술원상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최고의 여류 시인을 친일파라니…. 학생에게 일격을 당한 선생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 질렀습니다.

"너, 이리 나와!"

교실이 얼어붙었습니다. 충격을 받긴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쟤가 미쳤나봐. 왜, 이상한 소리하고 그래!"라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의 발언을 이해하는 사람은 교실에서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완벽한 왕따가 됐습니다. 선생 앞에 서자마자 손바닥이 날아왔는데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고막이 울렸습니다.

"야, 이 ××야. 모윤숙 시인이 친일파라고! 너, 미쳤어! 너, 요즘 왜 이래. 수석으로 입학한 놈이 공부는 안하고 골통들과 몰려다니지 않나! 이상한 서클에 들어가지를 않나. 야, 너 요즘 왜 그래!"

뺨 맞은 것은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뺨을 맞았다고 진실을 외면할 순 없었습니다. 손자국으로 뺨이 붉어진 학생이 의분에 찬 목소리로 다시 외쳤습니다.

"선생님, 모윤숙은 친일파가 맞습니다."

레지스탕스 드골 "민족배반자는 벌을 주어야 국민단결 가능"

▲ 샤를 드골 장군 ⓒ wikipedia

맨 앞의 글은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당시는 프로이센(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프랑스어 수업을 금지하고 독일어로만 수업하라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내려오면서 40년간 아이들을 가르친 아멜 선생이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쓰면서 마지막 수업은 끝이 납니다.

그 다음 글은 천안고등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프랑스에선 나라를 빼앗기면서도 분필로 '프랑스 만세'라고 썼지만 나라를 되찾긴 했지만 친일파가 득세한 한국은 독재자의 철권통치 때문에 신음했습니다. '민주주의 만세!'라는 글을 뒷골목에서 숨죽여 흐느끼며 남몰래 써야만 했던 암흑의 시대….

이뿐이 아닙니다. 부역자 처리 방식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영국에 임시정부 '자유프랑스'를 세운 드골은 최고 지도자 자격으로 전쟁을 수행했고 독일에 승리를 거둔 뒤에는 나치 협력자에 대한 처리 방침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레지스탕스들은 해방 전후에 나치 부역자 8천명~1만 명을 약식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드골의 임시정부는 부역자재판소와 공민재판소를 통해 7037명의 부역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그 가운데 791명을 처형했습니다. 또한 4만 여명에게 징역형을 내렸고 5만 여명의 공민권을 박탈했습니다.

가장 강도 높게 숙청한 곳은 언론과 문학계였습니다. 나치에 부역한 신문들은 폐간시켰고 부역 문인들에겐 발표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부역 공무원들은 징계, 친(親)비시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에서 축출했습니다. 이처럼 프랑스공화국의 '똘레랑스'(관용)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는 나치 부역자에 대한 철저한 심판과 청산을 통해 형성된 것입니다.

친일파 미화시킨 박정희 신민 교육... 국민교육헌장 달달 외던 암흑의 교실

▲ 모윤숙을 친일문인으로 등재한 <친일인명사전> ⓒ 이아림

중국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 백범 김구는 주석(主席) 자격으로 일제와의 전쟁을 수행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일반인 신분으로 귀국해야만 했습니다. 모윤숙 등 친일파 263명의 살생부를 품고 귀국한 백범은 친일 청산은커녕 반역자들의 흉탄에 의해 쓰러지면서 독립군과 후손들은 가난과 고초를 당하며 살아야했고 민족반역자는 호의호식하는 반역의 나라가 됐습니다.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군사독재자 박정희는 국민을 신민(臣民)으로 만들었습니다. 국정 국어교과서에는 모윤숙을 비롯해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김동환, 서정주 등의 친일문인 작품이 실렸고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했던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주입시키면서 친일 문인들을 찬양하도록 가르쳤고 학생들은 친일파의 작품을 앵무새처럼 읽어야만 했습니다.

▲ 모윤숙 ⓒ 민족문제연구소

모윤숙은 일제를 찬양하며 조선 청년들에게 전쟁 참가를 독려했던 대표적 친일 문인입니다. 임종국 선생의 유업을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모윤숙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으며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녀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했습니다. 하지만 친일파의 후예들은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미화하고 모윤숙을 대표적 여류 시인으로 여전히 추앙하고 있습니다.

"모윤숙은 친일파!"라고 항의했던 학생은 어떻게 됐을까요. 천안고교 장학생으로 입학한 그 학생은 결국 선생이 됐습니다. 선생이 됐으니 그 또한 친일파를 애국자라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국정교과서도 독재자도 그대로였으니까요. 뺨을 때리는 꼰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고초를 당하더라도 진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살 것인가? 고민하던 그는 참교육의 깃발을 들었다가 해직 교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터뷰] 친일파 고발한 고교생이 충남도교육감이 되기까지

▲ 친일파와 세월호의 진실을 묻어두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 김지철 충남교육감. ⓒ 이아림

1987년 충남교사협의회장을 맡으면서 해직 교사가 된 그는 천안민주단체협의회 의장,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창립준비위원장,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준비위원, 천안학교급식협의회 상임대표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충남교육청 교육위원과 충남도의회 교육의원을 연임한 뒤에 2014년 충남교육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충남 교육을 책임지는 수장이 됐습니다.

지난 8월 7일 천안에서 김지철(64) 교육감을 만났습니다. 7월 9일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용길) 발족식에서 만난 데 이어 두 번째입니다. 그에게 임종국 선생과의 인연과 교육계의 친일청산 그리고, 교육감으로서 충남교육 혁신 등의 이야기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 왜 뺨을 맞는 문제 학생이 됐나요.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는데 가정형편 때문에 못 갔습니다. 열아홉에 할아버지를 잃으면서 소년가장이 된 아버님이 초등학교 교사 박봉으로 할머니와 6형제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와 저까지 10식구를 책임져야했습니다. 그 많은 식구들이 시골에서 두 칸 방에 살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세 칸짜리 방으로 이사했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서울 진학이 좌절되면서 공부에 대한 의욕이 꺾였고 이로 인해 소위 문제아로 불리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그러다 1968년 고2 때 '흥사단 천안도산연구회'에 가입했습니다. 이 모임에는 천안고, 천안여고, 천안공고, 복자여고 등 각 학교의 우등생들이 참여했는데 따라가려면 정신을 차려야했습니다. 매주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5분 스피치 훈련을 하다 보니 의식이 빠르게 변화됐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을 배우면서 역사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남들은 대학에서 의식을 깨웠는데 저는 고등학생 때 의식화가 됐습니다. 역사 문제에 있어선 조숙했던 편입니다."

▲ 역사에 눈을 뜨게 한 '흥사단 천안도산연구회'. 맨 위에서 맨 우측 아래로 세 번째 모자쓰지 않은 학생이 김지철. ⓒ 김지철

- 모윤숙 시인이 친일 문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1960년대에는 친일 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아니었고 지식인이나 대학생들도 친일 문제를 거론했다가는 치도곤 당하던 시대였는데요.

"어느 날, '흥사단 천안도산연구회' 지도교사가 천안에 있었던 함석헌 선생님의 씨알농장에서 열린 어른들의 모임에 데려갔습니다. 역사의식을 가르칠 뿐 아니라 독재자에 항거하면서 실천하는 선생님을 뵌 뒤로 독서와 사고의 깊이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던 고등학교 2학년 말, 헌책방에서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1966년 출간)을 구했습니다.

그해 겨울방학 내내 <친일문학론>을 읽고 또 읽으면서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문인들이 친일파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 받은 충격과 분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윤숙 시인이 친일파라고 발언했다가 뺨을 맞게 됐습니다. 국어선생님이 아버님 친구였는데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뺨을 맞았지만 친일파는 친일파였습니다."

- 뺨을 맞은 사건 이후 어떻게 됐나요.
"철학과 역사책에 흠뻑 빠졌습니다. <친일문학론>과 함께 신동엽 시인의 <금강>에 빠지면서 역사를 전공하려고 했는데, 아버님이 서울대 아니면 대학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독학으로 교사가 된 아버님은 박봉으로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아버님 형제 두 분을 각각 고등학교와 대학에 보내야 했습니다. 누님은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아버님은 자식보다 형제를 거두는 게 장남의 도리라고 여기셨습니다.

대학을 포기하고 택시운전사가 되려고 동네 선배 택시운전사 조수로 따라다녔는데 국사 선생님이 '장학금 받고 입학한 놈이 대학을 포기하면 되겠느냐'면서 학비가 거의 안 드는 공주사대 원서를 대신 써주셨습니다. 그 은사님이 아니었으면 택시운전사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2006년 교육위원에 당선됐을 때 가장 기뻐하셨던 분도, 교육감 출마를 권유하신 분도 그 은사님입니다."

뺨 때리는 꼰대로 살 것인가? 진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살 것인가?

▲ 김지철 충남교육감. ⓒ 이아림

- 대학에서 역사가 아닌 영어를 전공하셨네요.

"전공은 영어였지만 역사를 더 많이 공부했습니다. 한국경제사, 세계경제사, 해방 전후의 역사, 철학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가정교사와 과외교사를 했는데 돈만 모이면 책을 샀습니다. 4년 동안 모은 책이 270권인데 철학과 역사책이 가장 많았습니다. 역사에 관심 갖게 만든 분이 임종국 선생님입니다. 지금도 서재에 역사책이 150권 가량 있습니다."

- 대학 재학 당시는 박정희의 유신 시절이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은 구속되거나 제적되는 등 고초를 겪던 시절인데 대학생활을 어떻게 했습니까.
"대학 다니면서 후배들에게 경제사와 사회사상사, 철학사 등 사회의식을 갖게 하는 강연 활동을 하는 한편 '흥사단 천안도산연구회' 소식지에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글이 경찰에게 들어가면서 요시찰 인물로 찍혔습니다. 가정 교사하던 집 대문 옆에 이상한 표시(◎)가 있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형사가 와서 분필로 표시했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사찰이 일상화 된 시절입니다. 임종국 선생 댁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형사들이 왜 가느냐고 검문했습니다. 교육위원이 되면서 알게 된 정보과 형사가 '경찰뿐 아니라 보안사와 국정원 등의 자료에 자생적 운동권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당시의 사찰 정보를 귀띔해 주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괜찮았는데 전교조 충남지부장을 맡으면서 해직되고 구속되면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 "모윤숙은 친일파"라고 외쳤다가 뺨 맞은 학생이 선생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참교육을 외쳤다가 해직교사가 됐습니다. 맨 오른쪽이 김지철 선생. ⓒ 김지철

- 교사가 꿈이었나요.
"아닙니다. 방송기자가 꿈이었습니다. 그냥 기자가 아니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1975년, <동아 방송> 앵커인 공주사대 선배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기자가 될 수 있는지 물었더니 아버지 직업에 물었습니다. 평교사라고 했더니 돌아가라고 하더군요. 기자가 되려면 '빽'(background, '배경')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기자가 되기 힘들다고 해서 기자를 포기했습니다."

- 언제 교사가 됐나요.
"1976년 11월 3일 스물여섯에 태안여중으로 첫 발령이 났습니다. 기자의 꿈이 좌절된 대신 교단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싶어서 시대와 역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다 전교조 선생이 됐습니다. 전교조 충남지부장이 되면서 참교육과 역사를 따라다녔더니 형사들이 내 꽁무니를 따라다니더군요. 사회정의와 역사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피를 토하며 글을 쓰시던 선생님...

▲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바로 뒷줄 체크무늬 잠바 차림이 김지철 교육감. ⓒ 민족문제연구소

- 임종국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게 언제인가요.

"1983년 천안여고에 재직할 때였습니다. 그때 임종국 선생 등의 글이 실린 <해방 전후사의 인식>(한길사) 2권을 읽고 있을 때였는데 우연히 <한국인>이란 월간 잡지에서 임종국 선생님의 글을 읽었는데 천안에 거주한다고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우체국 교환원에게 천안에 사는 임종국이란 이름의 전화번호를 물었더니 모두 17명이나 됐습니다. 일일이 전화를 했더니 16통 전화까지는 동명이인이었고 17번째 통화에서 임종국 선생을 확인하고 그 주말에 선생이 살던 요산재를 찾아갔습니다."

- 임 선생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선생님의 말씀을 1시간가량 경청하다 이승만에 대한 시각 차이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이승만 뒤에 미국이 있다고 말한 반면 선생님은 미국 문제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친일파 연구는 훌륭하신데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한 역사에 대해서는 공부하셔야한다'고 외람되게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영어선생이 역사를 쉽게 말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 문제는 다음에 토론하기로 하고 헤어졌다가 7개월쯤 뒤에 다시 만났는데 미군정과 해방공간에 대해 공부하셨는지 이승만 뒤에 미국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밤의 일제침략사>등 선생님이 쓴 책 3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꽉 막힌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한해 전인 1988년 9월쯤 천안문화원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국어교과서에 나타난 친일문학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으셨는데도 친일문학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연해주셨습니다. 강연에 참석한 충남지역 국어교육연구회 선생들이 강연을 통해 교과서에 실린 친일문학의 폐해를 깨달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임종국선생 조형물 건립촉구 행사에서 인사하는 김지철 교육감. ⓒ 김지철

- 임종국 선생의 건강은 어땠나요.
"아주 나빠 보였습니다. 이야기하는 중에도 밭은 숨을 내시고 기침하면서 피를 토하셨습니다. 피를 토할 것 같으면 잠깐 밖에 나가서 처리한 다음에 들어오셨고 밖에 나갈 새가 없으면 손수건에 피를 뱉으셨습니다. 피를 토하면서 글을 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친일파 청산과 역사정의 실현에 나서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부친과 스승을 <친일문학론>에 담아야 했던 선생님의 인간적 고뇌와 외로운 투쟁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옵니다.

모두 일곱 차례 찾아 뵈었는데 날이 갈수록 선생님의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말씀을 몇 마디 못할 정도였는데도 '이것(친일파총서-10권)을 다 쓰고 죽어야 하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데 해직당할 때보다 가슴이 더 아팠습니다. <친일파총서>를 조기에 탈고하기 위한 일념으로 최후까지 글을 쓰던 독립군 같은 모습이 떠오릅니다. 핏줄이 불거지고 앙상한 손에 만년필을 쥐고 원고지 빈칸을 메우시던 선생님의 투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김지철 충남교육감 인터뷰는 [역사 독립군 임종국 3-2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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