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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 리포트

조호진의 역사 독립군 임종국

자기 아버지 '친일'까지 기록
일본인 교수 "임종국은 무서운 사람"
[역사 독립군 임종국 2-1화] 임종국 선생의 누이 임경화씨가 들려준 '오빠' 임종국

16.08.23 21:39 | 글:조호진쪽지보내기|편집:김지현쪽지보내기

▲ 충남 천안 요산재 시절의 임종국 선생은 투병과 외로움에 시다렸다. ⓒ 민족문제연구소

[프롤로그] 반역의 시대와 싸운 임종국과 역사 독립군들

삶의 무게가 역사의 무게보다 더 무거울 수 있습니다.

서슬퍼런 1960년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친일 독재 세력에 의해 역사가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외면했던 것은 생존 때문이었습니다. 다들 역사의 수레를 구정물 통에 처박은 채 자기 살길로 갔는데 '역사 독립군' 임종국은 바퀴가 부서진 그 수레를 이끌고 제2의 독립투쟁인 친일청산 전투를 위해 홀로 떠났습니다. 이 민족에겐 천만다행이었지만 당신의 아내와 자식과 부모형제에게 당신의 투쟁은 고통이었습니다. 항일투쟁 때도 그랬습니다.

삶의 무게가 역사보다 무겁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당신의 외로운 싸움을 수수방관하던 사람들은 삶의 뒷골목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생존과 생계가 역사보다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장도(壯途)는 민족혼을 살리는 길이었지만 누구도 동참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친일청산의 무거운 길을 홀로 가던 당신에게 찾아온 것은 가난과 병마와 외로움이었지만 역사 독립군의 투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벗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 다음엔 형제가 떨어져 나가고, 또 그다음엔 돈이 떨어지고, 아예 그 다음엔 쌀과 원고지마저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정신은 오롯했으나 삶의 비수를 막기엔 허술했습니다. 그래서 찔리고 찔리면서 만신창이가 된 것입니다. 글을 쓰다 피를 토하고, 토한 피를 수건으로 훔치면서 글을 쓰고, 병마에 쓰러졌다 일어서 글을 쓰길 반복했지만 최후의 일격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곤 다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피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못다 굴린 역사의 수레가 우리 앞에 놓였습니다. 이 수레바퀴를 굴리지 못한다면 우리 가슴 속에 뜨겁게 자리한 친일청산의 염원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삶의 무게가 역사보다 무겁지만 당신의 유업을 이으려는 역사 독립군들의 사기는 충천 일로입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란 것처럼 피를 토하며 기록한 당신의 역사 또한 발전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입신양명의 길보다 역사의 길을 택한 재야 사학자

▲ 조월희 화백이 제작해 민족문제연구소에 기증한 임종국 석고상.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기도 했던 조 화백은 2015년 세상을 떠났다. ⓒ 이아림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사장 출신인 아버지(임문호)와 교사 출신인 어머니(김태강) 사이에서 태어난 선생은 수재들이 다녔던 경성사범학교(해방 후, 서울대 사범대학)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의 증언처럼 그 실력대로 살았으면 판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은 입신양명의 넓은 길을 버리고 고난의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막내여동생 임경화(71)씨는 "오빠가 출세의 길이 아닌 험난한 인생길을 선택한 것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체질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했었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민법총론>이란 책을 송두리째 외울 정도로 고시공부에 몰두했지만 시대에 좌절하고 건강까지 악화되면서 판·검사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선생의 당시 심경입니다.

"한 많은 피난살이 속에서 그런 울분(이승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한)과 충격도 낡은 앨범처럼 퇴색해 가고 땃벌떼(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동원한 정치깡패집단)다, 정치파동이다, 휴전회담이다로 어수선한 세월이 흘렀다. 폐허에서 하루의 삶에 쫓기던 나는 판사 검사가 돼서 떵떵거리고 살아야겠다는 엉뚱한 꿈에 사로잡혔다."

청산 대상인 친일파가 친미파로 둔갑하면서 득세하는 세상에서 정의는커녕 일말의 양심마저 쓰레기통에 처박혔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4.19혁명 그리고 황군(皇軍) 출신 박정희에 의해 암흑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국은 꿈을 펼칠 곳을 찾아 방황해야만 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한 청년의 희망이 불의한 시대로 인해 박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인간 임종국은 불행했습니다. 첫 결혼의 실패로 아들과 헤어지면서 부모형제와의 갈등까지 겪었습니다. 선생의 괴로움을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펜을 꺾지 않은 선생의 뜨거운 피였을 뿐입니다. 선생의 아픔과 유족의 슬픔까지도 헤아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임종국을 따르는 역사 독립군이라면 친일파 청산엔 뜨거운 심장이어야 하지만 마음은 다정다감해야 합니다. 정의로울 뿐 아니라 가슴 따뜻한 역사의 신작로를 내야 합니다.

선생께서는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 되며 진실만을 밝혀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듯이 개인의 역사 또한 꾸미거나 과장해선 안 될 것입니다. 진실하지 않은 삶이 어떻게 역사의 정의를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임종국과 학자 임종국을 되새기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난 8월 3일 선생이 가장 사랑했던 누이 임경화씨를 만나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그리고 음악을 사랑했던 오빠



▲ 다재다능했던 임종국 선생은 한 방송국 주최 클래식 기타 경연대회에 출전해 2등에 입상할 정도로 기타 연주 실력이 뛰어났다. ⓒ 민족문제연구소

- 오빠가 다재다능했다고 들었습니다.
"청년 시절의 오빠는 예술에 심취했어요. 예술가 기질도 뛰어났었어요.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음악가 혹은 문학가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아코디언과 첼로와 기타 연주 실력이 수준급이었어요. 오빠는 브람스와 쇼팽, 랄로(프랑스 작곡가)의 첼로 협주곡과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 2악장을 좋아했어요. 오빠는 격정적인 곡보다 마음이 잔잔해지는 곡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불같은 성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어요."

-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서울대의 이어령, 고려대의 임종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오빠의 머리가 우수했다는데.
"오빠는 뛰어난 수재였어요. 둘째 오빠(임종철,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셋째 오빠(임종한, 서울대 철학과 졸업)도 공부를 잘했지만 오빠를 따라가진 못했어요. 오빠의 재혼 결혼식 주례였던 조용만(전 고려대 교수) 선생님의 말씀이 '(전체 수석으로 서울대에 합격한) 종철이 머리가 좋긴 하지만 종국이를 따라갈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수재였어요. 두 오빠는 큰오빠가 대충 공부하는 것 같은데 시험을 보거나 글을 쓰면 엄청난 결과를 만드니까 기가 죽는다고 말했었어요.

그런 오빠가 불행한 시대를 만나면서 시련을 많이 겪었어요. 가난 때문에 대학을 휴학하고 잠잘 곳이 없어서 고아원에서 방을 얻어 지내기도 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방황하다 대학을 저하고 같이 졸업했어요(1952년 고려대에 입학했지만 장기 휴학했다가 1969년 21회 졸업생이 됨). 오빠가 친일파 연구를 하지 않고 그 좋은 머리대로 살았으면 부와 명예를 누렸을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체질상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선생은 다재다능한 예술가였습니다. 해방 직후인 1947년 18세에 서울음악전문학원 첼로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한 방송국 주최 클래식 기타 경연대회에 출전해 2등에 입상하는 등 음악에 재능을 보였지만 판검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1956년 27세에 시인 <이상전집>(3권)을 발간하면서 문단과 학계에 주목을 받으며 문학평론가가 되고, 1959년 <문화예술>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문학가가 될 수 있었지만 그 길로 가지 못했습니다. 친일파들의 추악한 행적을 발견하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친 것입니다."

- 오빠의 성품이 불같은 편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오빠 성격이 까다롭다고 말하는데 저에게 오빠는 편한 사람이었어요. 오빠는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할 줄 모르지만 인간의 아픔에 대해서는 감싸주는 분이었어요. 10점짜리면 10점 그대로를 내놓으면 봐주었지만 거짓말하면 혼냈어요. 오빠는 무지한 것과 노력하지 않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는데 '공부도 안하고, 책을 안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개돼지 같은 사람이 된다!'고 수없이 강조하면서 저와 올케에게 책을 읽고, 공부하고, 생각하며 살라고 하셨어요."

인간 임종국은 괴로운 사람... 일본 학자들 감동시킨 재야 사학자

▲ 임경화씨(가운데 학사모 쓴 여성)의 대학 졸업식 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임종국, 오른쪽에 중절모를 쓴 사람이 부친 임문호다. ⓒ 민족문제연구소

- 가족사의 아픔에 대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신 뒤 저의 어머니와 재혼하셨어요. 큰어머니에겐 이복오빠(임종원, 전 마포구청장)가 있었는데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통해 태어난 형제는 3남3여예요. 종국 오빠가 사실상 장남인 셈이죠. 종국 오빠와 종한 오빠는 돌아가셨고 남은 형제는 종철 오빠(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큰언니(임신화)와 작은언니(임순화) 그리고 저까지 모두 4명입니다.

어느 날, 오빠가 '나는 부모도 버리고, 아내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형제도 버린 놈이다'라며 자책하셨어요. 어머니의 바람대로 출세의 길로 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친일문학론>에 싣고, 친일파 연구를 하느라 아내와 자식도 살피지 못하고, 형제들을 돌보지 못한 데 따른 괴로움을 털어놨어요. 역사학자로서 임종국은 훌륭하지만 인간으로서 임종국은 괴로움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 오빠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주세요.
"천안 '요산재'(樂山齋)에서 오빠와 6년 정도 같이 살았어요. 오빠랑 같이 살면서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아름다운 추억도 있었어요. 그건 오빠가 들려준 음악이었어요. 달빛이 그득한 밤, 올케(이연순)와 저는 방에 누워 있고 오빠는 마루에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와 '아람브라의 궁전' '금지된 장난'을 들려주셨어요. 첼로로는 '빈사의 백조'를 연주하셨는데, 영국의 발레리나 마코트 폰테인이 발레로 표현한, 죽어가는 백조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연주할 정도로 오빠는 감성이 풍부한 분이었어요.

그때도 요산재 시절이었어요. 그날은 비가 내렸는데 몸살이 나서 덜덜 떨었어요. 그러자 오빠가 저를 위해 군불을 때어주셨는데 군불 때던 오빠가 '따뜻해졌냐!'고 물으면 저는 '아니오!' 라고 대답했고 그러면 불을 더 때주셨어요. 한창 불을 때던 오빠가 숨을 헉헉 내쉬며 방에 들어와 '그렇게 불을 땠는데도 안 따뜻하냐!'면서 아픈 저를 보살펴 줄 정도로 인정이 많으셨어요.

저에게 오빠는 애틋한 사람이에요. 오빠와 제가 다정하게 지내니까 주변에서 연인 같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오빠는 저에게 사탕도 사다 주시고 남자와 데이트할 때 주의할 점에 대해서도 알려줬어요. 오빠가 브람스의 협주곡과 차이콥스키 카세트테이프를 선물로 주고 가셨는데 가끔 테이프를 꺼내 음악을 들어요. 그러면 오빠가 더 보고 싶어서 눈물이 흐릅니다."

(임경화씨는 이 대목에서 눈물을 계속 훔쳤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이야기할 때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고요. 칠순 넘은 누이가 아니라 앳된 시절의 누이로 돌아간 임경화씨는 청년 시절의 오빠와 추억의 데이트를 했습니다.)

▲ 임종국 선생이 누이 임경화 여사에게 선물한 클래식 카셋트 테이프. ⓒ 이아림

1980년 생계 곤란에 처한 선생은 농사를 지으며 연구하려고 서울 생활을 접었습니다. 천안시 삼룡동 흑성산 산기슭으로 이사해 외딴집을 직접 짓고는 집 이름을 요산재라고 붙였습니다. 그곳은 버스도 다니지 않는 데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우편배달도 되지 않는 산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밤농사와 가축 기르기 등은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친일파와 일제침략 연구를 하기엔 적당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산속 누옥에서 사과궤짝을 엎어놓고 하루에 10시간씩 어떤 때는 며칠씩 밤을 새며 <일제침략사> 등을 집필했습니다. 1981년 요산재를 찾아온 와세다대학 '오오무라 마쓰오 교수'는 선생을 보면서 "무서운 신념을 가진 이가 여기 있구나!"라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오오무라 교수는 선생의 <친일문학론>을 일본에 알린 한국문학 전공자로 사실적이고도 실증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기술한 선생의 실력에 감탄했습니다.

"문학자로서도, 역사학자로서도 존경 한다"며 깊은 신뢰를 보인 오오무라 교수는 한국에선 구할 수 없는 자료를 구해 선생에게 보내줬습니다. 친분을 쌓으면서 서신 왕래를 하다 요산재까지 직접 찾아온 것은 신념을 바쳐 연구하는 외톨이 재야 사학자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외로운 선생에게 오오무라 교수는 한국에선 만날 수 없는 협력자이자 동지였고, 오오무라 교수에게 선생은 연구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자극제였습니다.

오오무라 교수뿐 아니라 와세다대학에서 일본 근대사를 강의하는 미야타 세츠코 교수 등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선생의 실력과 신념을 높이 샀습니다. 그들은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 학자로서 자신들이 해야할 연구의 몫을 선생이 감당하는 것에 대해 반성하고 교류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밝혀 나갔습니다. 철저히 외면당하던 외톨이 재야 사학자가 다섯 평 좁은 방 사과 궤짝에서 써내려 간 육필 원고는 일제 침략사와 친일파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돈 만원도 꾸지 못하는 오빠... 쌀 팔아달라고 결혼반지 뺀 올케"

▲ 천안 요산재 시절의 임종국 선생. 생계와 연구를 함께 하기 위해 밤나무를 심었으나 밤농사는 살림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 선생께서는 가난에 시달렸다고 했습니다. 
"오빠가 고려대학교 다닐 때 유일한 외출복이 담뱃불에 구멍 난 바바리와 바지였는데 바지가 오래돼 얇아지면서 추위에 덜덜 떨었어요. 마침 꾸어준 돈을 받은 게 있어서 양복을 해드렸어요. 오빠에게 가장 잘한 게 있다면 옷을 해드린 것, 오빠 곁에서 도와드린 것, 마음의 동무가 돼 이야기 들어준 것이에요. 오오무라 교수님에게 보내는 편지 심부름도 제 몫이었어요.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조카(수연)가 태어났을 때였어요. 올케가 결혼반지를 빼주면서 전당포에 맡겨 쌀을 팔아달라는 거예요. 가슴이 미어져서 '어떻게 결혼반지를 파느냐'고 반지를 돌려준 뒤에 쌀을 구해다 줬어요. 오빠가 속상해 할까봐 쌀이 떨어진 사실을 말하지 않은 올케는 속이 참 깊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정성을 다해 오빠 연구를 뒷바라지 했어요. 친일연구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준다면 올케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임경화씨가 이연순(임종국 선생의 부인)씨의 칠순잔치(9월 3일)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남편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이연순씨의 칠순잔치에 꼭 참석할 생각입니다.)

오빠는 돈 만원도 꾸지 못해요. 그래서 올케가 꾸러 다녔는데 제가 취직(국립보훈원)하면서 도울 수가 있었어요. 오빠 집에 갈 때마다 올케에게 돈을 다 털어주면서 '돈이 떨어지면 꾸러 다니지 말고 연락해라, 소액환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오빠는 저를 참 많이 속상하게 했어요. 쌀이 떨어져서 올케와 조카들이 굶을까봐 노심초사했는데 오빠는 쌀이 떨어지고 굶는 것보다는 원고지가 떨어지는 것을 더 걱정했어요. 오빠는 친일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더 두렵다고 했어요."

▲ 둘째 아들 연택의 돌사진. 임종국 선생은 1984년 중학교 2학년 휴학 중인 아들 연택을 데리고 상경해 국립도서관에서 자료 조사를 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 임경화씨의 오빠 임종국 이야기는 [역사 독립군 임종국 2-2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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