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새소식 [리포트] 6m 준설한 강에서, 꼬마물떼새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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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

신부님 수염 한 움큼 뽑아... 이건 치욕
문정현 신부님이 나무에 칼로 수염을 새긴 까닭

16.07.08 06:55 | 글:딸기쪽지보내기|편집:김준수쪽지보내기

▲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에서 미사가 끝나면 노란 깃발을 들고 인간띠 잇기를 하는 길가에서 선다. 지나는 차들이 혹시라도 사람들을 보지 못해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 노순택

평택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을 하겠다고 대추리 주민이 되어 사신 지 2년여. 너른 들녘 대추리에서 결국 쫓겨나와 군산으로 돌아온 후 무력감과 분노로 가슴이 죄여와 밤잠을 못 이루던 어느 날이었다. 문정현 신부님은 집에 나뒹굴던 나무로 된 선물박스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도록 허름한 나무박스에 커터칼로 밤새 글을 새겼다. 그의 첫 문장은 '껍데기는 가라'였다.

신부님은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했다. 신부로서의 명예나 안위,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온전히 알맹이를 지키며 살겠다는 것이다. 문정현 신부님은 인혁당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하며 거리에 나선 후 '길 위의 신부'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그의 삶에서 더 덜어낼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냉큼 들었지만 알맹이를 지키겠다는 것을 말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새김판(서각) 스승님을 찾아 사흘을 배워와 군산 평화바람 집 작은 창고에서 밤이며 낮이며 앉아 나무판에 글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업은 더디기만 했다. 나무판에 새길 글을 고르는 것도, 그것을 먹과 붓으로 쓰는 것도 어느 하나 쉽게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밤을 새워 글씨를 써도 맘에 딱 드는 것이 없어 수북이 연습종이만 쌓이기도 했다.

4대강, 희망버스, 강정으로... 세상이 그를 놔두지 않았다

▲ 강정 길거리 미사 천막은 미사가 끝나면 그의 작업실이 된다. 매일 아침 9시쯤 출근해 주변을 정리하고 오전 작업을 마친 후 미사를 드리면 점심 후 다시 천막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심장을 깎는 심경으로 새김일을 해 왔다. ⓒ 이우기

살아오신 모든 길이 그랬듯, 신부님은 포기를 모르는 분이었다. 서예에 관한 책을 사고 '기억, 니은, 디귿'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화선지가 아까워 신문지를 접어 자로 칸을 긋고 어린아이 글 배우듯 매일매일 쓰고 또 쓰기 시작했다.

밤을 새워 연습을 하고 마음에 올라오는 글들을 쓰면 하루에 한 글귀 얻는 일도 쉽게 되지는 않았다. '죽을 힘을 쏟아' 겨우 한 글귀가 완성됐다. 그러나 세상은 시골 방 한 칸에서 붓글씨 쓰고 새김질이나 할 수 있도록 가만두질 않았다. 그는 다시 짐을 챙겨 용산참사 현장으로, 4대강 공사 현장으로 나서야 했다.

지난 2010년 '4대강을 살리기 위한 사제단'의 단식이 명동성당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문정현 신부는 이날을 잊지 못한다. 밥을 굶으며 피조물을 보호하자고 나선 신부들에게 돌아온 답은 '업무방해'라는 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과연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차에 나무판과 칼, 붓과 먹을 챙겼다. 그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침에는 명동성당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고 오후 나절에는 성당 한 켠에 판을 펼치고 새김일을 했다. 파라솔 하나 펼쳐놓고 '민주화의 성지 명동성당 길 한구석에서 말씀을 새긴다'는 작은 푯말 하나 올려놓고 성서 말씀을 새겼다.

그에게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은 오직 주차장 안내원,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 가끔 그를 찾던 벗들뿐이었다. 교회의 외면 속에서 여름을 지나고 손가락이 곱아지는 겨울까지 노상에서 줄곧 서각을 했다. 모두가 존경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원로신부가 아니라 간판쟁이 할아버지로, 노숙자로 명동성당 뒷마당에서 글을 새겼다. 이때부터 나무와 칼이 가는 곳은 문정현 신부님의 거처가 됐다.

2011년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올라야 했다. '밥들은 먹여야지 않겠냐'고 1, 2차 희망버스 때는 밥차를 만들어 군산에서 함께 출발하셨다. 희망버스가 커지면서 탄압이 거세지자 신부님은 기꺼이 '희망버스의 통장' 주인을 맡아주시기도 했다.

희망버스의 여는 말은 백기완 선생님이 맡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약속의 말은 늘 신부님이 맡으셔야 했다. 무대도 무대 나름, 그 자리는 늘 사법 탄압을 각오해야 하는 자리들이었다. 검찰은 5년이 지나고 나서도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 이 '못된' 법정은 올해 8월 18일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건으로 끝내 신부님을 부산 법정에 세우겠다고 한다.

희망버스가 '싱싱' 달리기 시작한 후엔 짐을 싸서 강정으로 향하셨다. 그때도 가장 먼저 챙긴 것은 새김일 연장이었다. 어디든 여력이 되는 틈을 비집고 앉아 글을 새겼다. 신부님은 "새김일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어떻게 버텼을까" 하신다. 기도 중에 떠오르는 성서 말씀을 쓰기도 하고 강정에 대해 작가들이 쓴 좋은 글귀를 담기도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고 세상에 대한 외침이었다.

강정에서 멱살 잡혀 흰수염 '한움큼' 뽑히기도

▲ 2012년 4월 6일 테트라포트 추락 사고 후 40일쯤 지나고 퇴원 후 사고 현장에 온 문정현 신부님. 지금도 4월쯤이 되면 온 몸에 고통을 호소한다. 사람은 살았으나 몸과 정신은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매년 신호를 보낸다. ⓒ 이우기

2012년 4월 6일 문정현 신부님은 강정 바닷가에서 힘겨운 몸싸움을 벌이다 7m 테트라포트 아래로 떨어졌다. 기적처럼 생존한 신부님은 병원에서 퇴원하시곤 곧바로 다시 길거리 미사에 나섰다.

그해 7월 24일, 미사 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사 차량을 집어넣는 삼성물산 직원에 항의하던 신부님은 젊은 직원에게 멱살이 잡혔다. 사람들이 겨우 말린 후 나무 그늘에 들어오니 신부님의 옷깃에 하얀 뭉치가 떨어져 있었다. 흰 수염 한 움큼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 활동가는 이 수염을 버릴 수 없어 모두 모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강철같이 강하고 고함을 칠 때면 젊은이 못지 않았지만, 이날만큼은 그 큰 어깨가 한없이 작아졌다. 홀로 눈물을 삼키던 이 날의 '치욕'을 신부님은 나무판에 새겼다.

그렇게 땀과 피로, 온몸과 마음으로 새겨온 새김판이다. 멸시와 조롱 속에서도 온몸과 마음으로 버텨온 시간이다. 강정에 내려오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레디컬하고 불의에 자비롭지 못한 신부님 곁에는 이제 양복쟁이보다 운동화에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남았다.

존경받기보다 함께 싸울 동지를 갈구하는 문정현 신부님 곁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보다 함께 연대하고 싸우며 그가 도와야 할 친구들이 더 많이 남았다. 도와야할 사람들이 더 많이 남았으니 '이제 쉬실 나이'가 무색하게 자신의 온 힘을 짜내 동분서주 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거처를 만든다는 이야기에 '꿀잠' 건립에 함께하기로 했다. 백기완 선생님과 공동으로 '두 어른'이라는 전시가 7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니 전시를 할 수 없다"고는 했지만 막상 전시가 준비되니 가장 먼저 한 고민은 따로 있었다.

"내 주변엔 이걸 사줄 만한 사람이 없어..."

신부님 말마따나 '방귀 좀 뀌던' 사람들은 이미 그의 곁을 떠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어른의 친구이자, 세상의 스승인 두 어른의 수많은 제자들이 기꺼이 '두 어른'의 호소에 응답해주길 기대해 본다.

▲ 포기를 모르는 문정현 신부는 새김일 뿐만 아니라 아코디언도 독학으로 깨우쳤다. 어렵고 힘들면 포기할 법 한데도 신부님은 집요한 연습과 노력으로 기어코 해낸다. 신부님 인생에 어쩔 수 없이 멈춰가는 일은 있어도 포기란 없는 듯하다. ⓒ 박승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평화바람 활동가 '딸기'가 보내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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