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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

백기완 "불덩어리 신부님도 있구나, 그때 알았어"
[꿀잠] 백기완 소장-문정현 신부의 댓거리② 길 위의 만남

16.07.06 05:26 | 글:김병기쪽지보내기,서정은쪽지보내기|사진:이희훈쪽지보내기|편집:장지혜쪽지보내기

▲ '거리의 투사'로 불리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 이희훈

"붓을 들어보지 않았는데 무슨 붓글씨를 써!"

하지만 '거리의 백발 투사' 붓글씨는 살아 있다. 타령조로 잦아들었다가 굿거리로 차지게 이어지더니 허공으로 확~ 솟아올라 휘몰이 장단으로 몰아친다. 움켜쥔다. '비백'은 그래서 나왔다. 고구려적 널마(대륙)에서 말 타고 창을 휘두른 흔적 같다. 글의 뜻은 찬우물에서 막 퍼 올린 샘물이다. 한편의 마당극이자 민중 미학이다. 글귀마다 한 시간씩 댓거리해도 모자랄 판이다.

▲ '길위의 신부'라 불리는 문정현 신부. ⓒ 이희훈

"시간을 죽이려고, 화를 풀려고 판 건데, 무슨 작품이야!"

하지만 '길 위의 신부' 새김판(서각)은 깊이를 알 수 없다. 끝없이 낮은 곳에서 먹을 잔뜩 머금은 붓을 꾹꾹 누르고 한자 한자 이었다. 그 먹은 피다. 길 위에서 함께 흘린 땀이자 행동하는 삶이다. 혈서를 쓰듯 절박한 깨달음을 진솔하게 담았다. 신념과 확신의 글이다. 한지에 글씨를 써서 나무판에 붙인 뒤 칼과 망치를 들고 새겼다. 심장을 깎듯이, 심장에 새기듯이.
      
한지 위에 살아서 꿈틀대는 붓과 나무판에 꽂힌 심장을 베는 칼. 백기완 소장의 붓글씨를 보면 가슴이 뜨겁게 뛰고, 문정현 신부의 새김판을 보면 가슴이 옹골차게 다져진다.   

지난달 27일 오마이뉴스 서교동 마당집에서 열린 두 어른의 댓거리도 이와 같았다. 나이 여든넷의 투사와 일흔여덟의 신부는 길바닥에서 하얗게 센 머리와 수염을 쓸어내렸다. 수없이 넘나들었던 삶과 죽음의 이야기. 메마른 뺨에 흘린 눈물은 여린 게 아니고 결기였다. 깨달음이었다. 대체 노동이란? 통일이란? 평화란 무엇인가? 명쾌하게 농축한 한 문장이 나왔다.

▲ 백기완 소장이 <두 어른>전에 내놓은 작품. ⓒ 백기완

▲ 문정현 신부가 <두 어른>전에 내놓은 작품. ⓒ 문정현

[두 어른의 오래된 만남] "불덩어리, 나는 문 신부님을 감격으로 알았어"

우선 두 어른은 언제부터 알았을까? 백 소장에게 물었다.

"나는 문 신부님을 그냥 안 게 아니라 감격으로 알았어. 인혁당 사건 때 권총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까여서 어딘가로 끌려갔어. 나를 거꾸로 매달고 툭툭 쳐. 신물 똥물이 나왔지. 의사가 와서 위험하다니까 차에 태워 또 어딘가로 데려갔어. 나보고 뭘 찍어야 한 대. 엑스레이같은거야. 의사가 내 이름을 부는 데, 글쎄 '조 뭐시기'야. 대답을 안했더니, 나를 데려온 놈이 옆을 쿡 찔러. '야 인마, 왜 대답 안 해?' 아, 이놈들이 나를 조 모시기로 해서 죽일 작정이구나, 그 생각이 들더라고.

한 보름인가, 그렇게 있었어. 하루는 강 뭐시기 수사관이 들어오더니 뭔가로 나를 딱 쳐. 보니까 신문이야. '인혁당 처단'이라고 쓰인 걸 보여주면서 '자식아! 너도 이 꼴이 날 수 있어'라고 하면서 나보고 각서를 쓰래. 어디를 갔다 왔다는 지를 말하지 말라는 거야. (문 신부 '맞아, 그게 75년 4월 8일이지요.') 그 때 문 신부가 뭐를 했다는 게 신문에 났어. 그렇게 알았어. 아, 이렇게 불덩어리 신부님도 있구나 하고 말이지."

문 신부는 당시 사형 집행된 인혁당 피고인들의 시신을 경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크레인이 나타나 장의차를 묶고 경찰이 시신을 탈취하려고 하자 크레인 위에 올라가 몸부림치다가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 그 때 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백 소장은 문 신부 덕(?)에 감옥 간 일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 때 문 신부가 전주에 있을 때야.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내려갔지. 문 신부가 '좋은 술이 있으니, 걱정 말고 내려오시라'고 했지. 거기서 통일문제를 이야기 했어. 기분 좋게 술 먹고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열댓 명이 나를 둘러 싸. '어디를 갔다 오십니까?'라고 물었어. '그걸 뭘 물어봐'라고 답했지. 또 권총 개머리판으로 깠어. 끌려갔지. 신부님 때문에 작살나게 얻어맞았다니까. 하하-."

백 소장이 시작한 일로 문 신부가 엮여서 감옥에 간 일도 있었다.

"문익환 목사가 처음으로 감옥가기 며칠 전에 나하고 약속을 했어. 내가 하던 일을 문 목사가 대신하기로 했어. 술 한 잔을 샀지. 명동 들머리 맥주집이야. 내가 신발 뒤꿈치에 붙어있던 문건을 줬어. 민어 고기 뱃속에 있는 거를 끓이면 끈끈이 '가풀'이 되는 데 그걸로 붙인 게 3.1 구국선언문 초안이야. '영감, 이거 읽어 보고 낱말이 무서우면 영감 투로 고쳐'라고 했지. 그것 때문에 문 목사가 처음으로 감옥 갔어.(문 신부 : '어, 지금까지 초안은 문익환 목사님이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장준하 선생과 내가 그걸 준비했는데, 장 선생님이 돌아가신 거야. 암살당한 거지. 문 목사는 그 사건으로 한가위를 8번이나 감옥에서 지냈지."

문 신부도 76년 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인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문 신부는 당시의 백 소장을 이렇게 기억했다.

"백 선생님은 나를 보면 멀리서부터 소리를 쳤어. '야, 문정현이!' 내가 싸움꾼이니까 좋아서 그러셨겠지. 나는 도망쳤지. 워낙 시끄러우니까. 하-하-하. 백 선생님은 주로 문익환 목사님과 계훈제 선생님들과 어울렸어. 감히 옆 자리에 앉지 못했지. 그냥 꼽사리를 낀 거야. 당시 '박정희'를 직설적으로 거론한 사람은 딱 한사람, 백 선생님뿐이었어. 김지하, 황석영 등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조차 돌려 말했던 시대였거든."  

[죽음은?] 산 자, 죽은 자

▲ '길위의 신부'라 불리는 문정현 신부 ⓒ 이희훈

그 시대, 두 어른은 감옥과 길 사이를 오가면서 늘 함께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     

"자고 있는 데 감방 화장실 비닐 구멍에서 누가 날 부르더라고. '신부님, 박정희가 죽었어요. 난리 났어요.' 그 때부터 잠이 안 오잖아. 철거덩, 철거덩. 철망 소리가 날 때마다 경망된 생각이 들더라고. 정변이라면 정적을 죽일 텐데……. 그 때 기도를 열심히 했네. 하-하-. 살려달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비굴하게 죽지 않게 해달라고 한 거야." (문정현 신부)

"그날 종로경찰서에 구금됐다가 보안사로 끌려갔어. 열 시간 만에 깨어났는데 고문관이 '백기완 죽었다'고 말하는 게 들렸어. 그 때 담벼락에 내 피와 똥과 오줌으로 이렇게 썼어. '너희들은 모른다. 지난날 뒷골목의 찬바람을 가르는 이 주먹이 언젠가는 다시 쳐올 날이 있다는 것을 너희들은 모른다.' 죽어가는 나를 찾아온 건 예수도, 부처도, 의사도 아니야. 허-참-. 파리 새끼 한마리가 앵앵거리는데, 그 놈에게 말했어. '나가서 전해라. 내가 추워서 떤 게 아니라 분노에 떤 것'이라고." (백기완 소장)

한 어른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권총으로 쏜 날 감옥에 있었고, 한 어른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문 신부는 '3.1절 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됐다가 형집행정지된 뒤에 재수감된 상태였고, 백 소장은 계엄령 위반으로 서빙고 보안사에 끌려갔다. 두 어른은 그 때에도 지금처럼 함께였다.

"육체적 끝을 죽음이라고 하는데, 진짜 죽음은 뜻이 없을 때, 뜻을 접었을 때야. 살아 있지만 죽은 거야. 지금 박근혜 일당은 시체들이라고. 권력 좋고 돈 따르는 놈은 진짜 목숨을 걸고 찌르면 꼼짝 못한다니까. 총 믿고 까부는 거지. 내가 고문 현장에서 죽게 됐어도 유언을 담벼락에 남겨놨던 거야. 똥으로, 오줌으로. 이제 자본주의는 갔어. 더 해먹을 게 없잖아. 하-하-.

진짜 죽음은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전진하는 거야. 결단에 의해서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고 보진 않고 끊임없는 깨우침, 올바른 깨우침이 역사의 전진이고, 끊임없이 깨우치는 과정의 하나가 죽음이고 삶이라고 보는 거지. 죽음은 계속되지만 역사는 전진하는 거야." (백기완 소장)

권총 개머리판에 뒤통수를 까여서 감옥에 들어갈 때 백 소장의 몸무게는 80kg이었다. 나올 때는 38kg이었다.

[눈물이란?] 아, 어머니!

문 신부에게도 '죽음'을 물었다.

"다음날이니까 27일이지. 조기가 걸려 있어서 교도관에게 물었어. 자기는 말 못한대. 홍성교도소 소장이 부르더라고. '신부님,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정희를 시해했습니다. 더 이상 묻지 말아주십시오'. 그래서 '아, 잘 갔군요!'라고 답했어. 그런데 전에 구속됐을 때 어머니가 면회 와서 나를 안고 이렇게 말하더라고. '우리 신부, 김대건처럼 돼야 해.' 89년 임수경 씨와 함께 방북했다가 감옥에 갇힌 동생 문규현 신부를 면회 갔을 때도 같은 말씀을 했어." (문 신부)

순교자가 되라는 말이었다. 문 신부는 이 대목에서 핸드폰을 꺼내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이 때부터 문 신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어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먹먹해졌다. 문 신부도 울고, 백 소장도 울었다. 문 신부는 안경 안쪽에 고인 눈물을 닦은 뒤 "안중근 의사 어머니 못지않은 우리 어머니도 계시다"고 말했다. 평생을 길 위에서 거지같은 차림으로 싸우고 있지만, 삶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죽어도 죽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게 두 어른이 흘린 눈물의 뜻이다.

[싸움의 힘은?] "목숨과 알통이야"

▲ '거리의 투사'로 불리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 이희훈

두 어른은 40~50년간 길거리와 감옥 사이를 오갔다. 죽음 앞에 선 적도 많다. 젊은 때는 고문과 협박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두 팔순 노인들 앞에 검찰 고발장과 벌금 고지서가 쌓여 간다.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방식만 달라졌을 뿐이다. 두 어른은 "더 악랄해졌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두 어른은 이젠 세 발로(지팡이) 길 위로 서있다.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랄(꿈)은 세계 사상사에도 없고 종교사에도 없는 말이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의 꿈이자 염원이라고. 머리만 굴리는 사람은 언젠가는 꺾여. 김지하처럼. 선생님은 왜 그렇게 의지가 강하냐고 묻는데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목숨 밖에, 알통 밖에 없어봐. 부대끼면 부대껴야지. 때리면 맞으면서 올라가는 거야. 그건 의지가 아니고 목숨이야. 삶은 무엇이냐. 생명의 승리가 삶이야. 생명 아닌 것을 반생명이라고 하잖아? 자본주의 목숨은 생명이 아니야. 싸워서 이기는 생명이 삶이야. 끊임없이 싸워야지 뭘." (백 소장)

"현재 교회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 있지만, 내가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것은 나에게 엄청 큰 유산이라고 생각해. 외할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이야. 나만 외할아버지 수염을 타고 났더라고. 나는 외할아버지 무릎에서 컸어. 그 분이 한국 순교자를 위해 노력하셨어. 성당에서도 순교 이야기를 많이 읽었지. 참수당한 순교자들의 뒤를 따르는 것들이 내 안에 잠재해 있지 않았을까? 박정희 정권 하에서 물불 모르게 덤비던 힘은 거기서 나오지 않았나 싶어." (문 신부)

두 어른이 이번 전시에 내놓은 작품에는 이런 글이 있다.

'벗이여 짓밟힐수록 불꽃이 이는 서돌이여' (백 소장)
'삶과 죽음은 같은 길입니다' (문 신부)

[시란?]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라는 구절이 나오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는 백 소장이 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이 자행될 즈음, 감옥에서 쓴 시 '묏비나리'였다.

"비나리란 말은 '비나이다'란 말의 준말이 아니야. 비나리라는 것은 민중들이 읊조렸던 시의 형식인데, 첫째는 달구질이고 둘째는 을러대기야. 달구질은 숯불에 쇠를 달구듯 자기를 달구는 거야. '야, 기완아, 네가 일생에 한 끼만 따끈한 밥을 먹으면 말없이 산다고 하더니 며칠 굶었다고 이러면 되냐? 배고프면 좀 참으면 되는 거지.' 이렇게 자기를 달구는 거야.

그 다음이 을러대기야. 박근혜가 오마이뉴스 사장 잡아가겠다고 하고, 거래 관계를 파헤치겠다고 하면 기죽을 거 없어. 박근혜 뒤를 캐면 몽땅 거짓말이고 몽땅 사기야. 협잡이야. 그런데 사기꾼 거짓말쟁이 협잡꾼한테 뒷조사를 좀 당한다고 겁을 먹으면 돼? 용기를 내. 이렇게 을러대기와 달구질을 하나로 묶은 것이 우리 옛말로 비나리야.

감옥에선 연필도 종이도 안 줬어. 순복음교회 신문 하나 들어오고, 법정스님의 수필집 하나 들어오고, 사전 비슷한 거 하나 있었어. 아무 것도 안 들어와. 저 새끼는 정신적으로 메말라 죽여야 한다고 했어. 한번은 보안과장이 '제발 그 입 좀 다물 수 없냐'고 그러더라고. '내가 죽기 직전인데 왜 입을 다무나'라고 소리쳤어. 그럴 때 혼자서 웅얼대면서, 죽어도 죽을 순 없다, 들이받고 죽어야겠다면서 허공에 쓴 시가 비나리야. 입으로 써서 천장에 새겼어. '나는 비록 싸우다 죽지만 사랑하는 너희들은 앞장서 나가라' 이거야. 그게 바로 산 자여 따르라야." (백 소장)

백 소장은 "내 이야기를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특수한 경험이지 않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요즘도 마찬가지야"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19살 젊은이가 지하철을 고치다가 라면 하나 놓고 죽었어. 대통령이고 국방장관이고 경찰총장 검찰총장 있는데 죽었잖아. 자기는 잘 먹고 잘사는데 죽었잖아. 그렇게 죽어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거잖아. 어디나 다 적용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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