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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 리포트

입양을 인터뷰 하다

자식 셋 입양했지만... "죽은 아이는 안 지워져요"
[입양을 인터뷰하다 21] 아이와 사별하고 아이 셋을 입양한 강명순씨②

15.08.04 22:36 | 김지영 기자쪽지보내기

<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 1편에서 이어집니다.

- 입양에 대한 따님과 남편분의 반응은 어땠나요?

"우리 남편이나 딸은 엄마가 저러다 죽을 것 같으니까 안 죽게 하려고 그냥 따라온 거죠. 저러다 제풀에 지치겠지 하고요. 그런데 처음에 기관에서 사회복지사들이 (입양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2년 뒤에 오래요. 아들 죽은 상처 때문에 안 된다고. 지금 하면 대리만족이라고. 엄마가 매일 우울하게 있으면 교육적으로 안 되고 모든 게 안 된다고요. 그 때 그 기관에 강 부장님이라고  계셨는데 그분이 직원들을 부르시더니 왜 안 된다고만 하냐고 하더라고요. 내가 볼 때 저 사람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요. 가정체험으로 아이를 한 번 보내보라고 하시면서 도움을 주셨죠.

그리고 며칠 뒤 연락이 왔어요. 아이가 있다고. 보러 갔는데 아이 모습이 도윤이랑 똑같은 거예요. 창윤이를 처음 만난 날. 웃는 모습도 똑같아서 소름이 돋았어요. 못 키우겠다고 하고 돌아왔지요. 이건 못할 짓이라고. 그런데 아이를 보고 온 뒤 딸이 학교를 안 가고 있잖아요. 세상에 어쩜 이렇게 예쁜 아이가 있냐고. 자기는 천사 같은 애를 봤다고. 자기가 아기를 봐 줄 테니까 아이를 데려오래요. 딸이 그러니까 또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 다음날 오후에 가서 데리고 왔죠. 도윤이 가고 21일 만에 창윤이가 그렇게 왔어요. 창윤이는 그때 태어난 지 4개월이었어요."

"식구들이 모두 창윤이 얼굴만 쳐다봤죠"

▲ 강명순씨에게 아들과 사별의 슬픔은 슬픔일 뿐 불행은 아니었다. ⓒ 김지영

- 집안 분위기가 달라지던가요?
"그럼요. 주택에 살았는데 밤에 동네 사람들이 볼까 봐 집에 있는 커튼을 다 쳤어요. 누가 들을까 봐. 볼까 봐. 우리 창윤이가 우는 법이 없어요. 진짜 천사였어요. 그래서 지금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내가 봐준다니까요."

- 웃음도 나오고요?
"그럼요."

- 그럴 때는 도윤이에 대해 잊어 버릴 수 있었던 건가요?
"도윤이 생각나는 거 하고는 다른 거죠. 애기는 천사잖아요. 그 자체만으로도. 그날 밤부터 큰 애를 애도하는 기간이 없었어요. 식구들 다요. 나만 그랬으면 나만 약간 이상한 사람이지. 도윤이는 안 잊히죠. 지금도 울잖아요. 식구들이 잠이 없어요. 자식 하나 보내 놓고 애 하나 데려와서 세 명이서 그 아이 하나만 쳐다보고... 정말 어쩌면요. 창윤이가 살아 있는 천사예요. 창윤이가 4개월 때 왔어요. 보통 4개월 아기들은 깨우면 운다든지 잠을 많이 잔다든지 하잖아요? 그런데 창윤이는 그냥 가만히 있다가 부르면 싹 웃어요. 울어 본 적이 없어요. 내가 창윤이 때문에 속아서 애를 세 명이나 입양했다니까요."

- 창윤이 입양할 당시에 다른 아이를 선 보기도 했나요?
"창윤이는 그냥 강 부장님이 이런 애가 있으니까 어떡할래요? 해서 입양을 했어요. 생후 4개월에 남자 아이는 입양이 사실상 어려운 형편이죠. 그렇게 창윤이가 집에 와서 두 달이 지났어요. 두 달을 꿈 같이 살아온 거예요. 아들을 보내놓고도. 그때부터 시설이 보이더라고요. 그 전에는 시설이 뭔지 고아원이 뭔지 입양이 뭔지 관심도 없었어요.

근데 창윤이와 두 달을 살아보니 어머 이렇게 예쁜 애들이 왜 저기서 살아야 돼? 이런 생각이 들었죠. 창윤이를 진짜 뱃속에 4개월 집어넣었다가 빼내고 싶더라니까요. 잃어버린 4개월이 너무 아까웠어요. 난 애 태어난 것도 못 보고. 탯줄도 못 봤고, 다 잃어 버렸던 거예요. 애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데. 이런 생각을 하니까 시설이 보이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입양을) 더 해야겠다, 그 생각을 했죠."

- 다른 가족분들도 같은 생각이었나요?
"입양이라는 걸 몰랐는데 창윤이를 보면서 우리 식구들이 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귀한 애가 시설에서 있을 수 있느냐. 그래서 창윤이 입양하고 몇 개월 뒤에 또 입양을 하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다 말렸어요. 지금 몸도 정신도 쇠약해져서 안 된다고."

- 왕윤이는 그럼 어떻게 입양하신 건가요?
"도윤이 죽고 창윤이 입양하고 2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요. 같은 교회 다니는 전도사님이 입양을 하고 싶다길래 창윤이를 소개받았던 기관으로 함께 신청하러 갔어요. 상담실로 가기 전에 로비에서 내 나이 정도 되시는 분이 애기를 안고 있어요. 아기를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예뻤어요.

상담실에 갔더니 전도사님에게 입양 될 예쁜 딸 아이가 와 있었고요. 그런데 뜬금없이 창윤이를 소개해줬던 강 부장님이 저기 로비에 있는 저 아이 어떠냐고 물어요. 누가 키웠는지 몰라도 정말 잘 키웠네요, 라고 말했더니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래요. 아이를 안고 있던 분은 위탁모였던 거예요. 그러면서 창윤이 동생 안 보냐고, 물어요. 아이가 옛날에 '사랑의 위탁모'라는 프로그램에 나왔었는데, 입양하기로 했던 연예인이 갑자기 못하게 된 사연이 있다고 설명하더라고요. 6개월 된 남자 아이였는데 (6개월이면) 해외입양도 못 간다고. 입양부모를 찾아야 된다고 하길래, 그럼 내가 데리고 갈게요 라고 말했죠."

- 가족들하고 상의도 안 하시고요?
"그랬죠. 전도사님 입양하는데 함께 갔다가 한 명씩 안고 온 거예요."

- 그럼 선현이 입양은 또 어떻게(하신 거예요)?
"왕윤이가 오고 2년 지났을 때, 강 부장님이 또 전화를 하신 거예요. 그때가 2006년이었어요. 선현이가 당시 23개월이었는데 친권 포기가 안 된 아이였어요. 열 일곱 살 엄마가 시설에서 낳고 친권 포기를 안 하고 밤에 도망을 가버린 거죠. 그래서 여자 아이인데도 입양이 안 된 거예요. 강 부장님이 아이가 저를 많이 닮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우리 선현이가 지금도 저를 닮았거든요. 당신 퇴직은 얼마 안 남았고 아이는 친권 포기가 안 돼 있고, 많이 안타까웠던 거죠.

그 다음 날 아이를 보고 당시 베이징에 유학 가 있던 큰 딸에게 날아갔죠. 저 혼자 세 명은 도저히 못 키우잖아요. 그 전에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이제 말도 꺼내지 말래요. 우리 일 아니라고. 싫어서가 아니고 힘들다는 거죠. 딸 아이도 이제 그런 이야기하지 말래요. 창윤이 왕윤이 둘도 너무 재미있으니까 남들처럼 재미있게 잘 살아보자고 오히려 저를 설득하는 거 있죠.

그런데 기가 막힌 게 딸 여권 비자 만료일이 이틀 뒤라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틀을 딸과 함께 있다 한국에 왔죠. 한국에 왔는데 식구들이 반대하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무조건 선현이가 있던 의정부 영아원으로 갔어요. 자는 아이 깨워서 차에 태워오면서 강 부장님께 전화를 했어요. 부탁이 있다고. 내가 이렇게 아이를 데려가면 혼날 텐데 우리 남편한테 전화를 해서 선현이는 입양이 아니고 부모가 찾을 때까지 잠시 위탁하는 걸로 말해 달라고."

- 큰 딸은 선현이를 나중에는 받아들였나요?
"처음에는 매일 반대를 했죠. 엄마 이번에는 아니야, 힘들어서 못 해. 딸이 보기에도 엄마가 너무 힘들어 보였겠죠. 제가 건강이 안 좋기도 했거든요. 도윤이 보내 놓고 많이 아팠는데 그게 오래 갔어요. 그런데 아빠도 반대를 하니까 딸 입장이 변하더라고요. 딸이 뭐라고 그랬냐면, '아빠 우리 솔직히 말해보자. 내가 볼 때 아빠가 경제적인 이유로 안 된다는 거는 남들이 들으면 욕한다고, 이번에는 우리가 눈감아 줘요'라고 했어요."

- 딸이 왜 그랬대요?
"진짜 애들이 눈앞에서 왔다갔다 해 봐요. 못 보내요. 정도 정이지만 그 형편을 알잖아요. 동생들 입양하면서 시설을 봤잖아요. 시설을 보고 나니까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보게 되잖아요. 자기가 얼마나 혜택을 받고 사는지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큰딸에게는 참 고마워요. 지 오빠 그렇게 되고 지금까지 동생들 키우는 일을 저와 함께 해줬어요. 대학 졸업 하고 입사해서 집을 떠나기 전날 그러더라고요. 내가 이만큼 키웠으니까 이제는 엄마가 키우라고."

"도윤이도 제가 행복한 걸 바라지 않았을까요?"

▲ 담담하게 죽은 아들을 이야기하는 강명순씨 ⓒ 김지영

-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도윤이 생각은 매일 하시죠?
"우리는 아직 도윤이와 찍은 가족사진, 도윤이가 쓰던 물건들 그대로 다 있어요. 우리 애들은 형이 꼭 살아 있는 거처럼 이야기를 해요. 어디 나가서도 자랑해요. 우리 형아는 하늘나라 갔다고, 아주 뭐 옆에서 같이 있는 것처럼 친근하게요."

- 저는 그런 경험은 없잖아요.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요.
"제가 도윤이 사고 나서 하늘로 갈 때까지 병원에 있었던 계절이 돌아오면 딱 그 기간만큼 식음을 전폐했어요. 7년인가 8년인가 그랬어요. 그러다 어느 날 제가 알았어요. 아,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게 아니구나, 나도 언젠가 갈 수 있겠구나. 그랬는데 내가 살아서 해야하는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아들이 열일곱에 가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했구나. 내가 머리 풀고 울면서 애한테 이런 마음을 보낸다고 해서 아이가 기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 말씀하시는 거 보면 도윤이를 잃은 슬픔이 그대로 있어요.
"부모가 자식을 키웠어요. 열일곱 살까지. 그런데 그 자식이 갔다고 어떻게 하얗게 다 지워질 수가 있어요. 안 지워져요. 그렇지만 불행이나 상처는 없다는 거죠."

- 자식이 죽었는데 입양을 할 경우에 죽은 자식에 대한 미안함도 생길 것 같아요.
"우리 도윤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전들 그런 생각을 왜 안 하겠어요. 그런 생각을 해보면요. 제가 행복하게 사는 걸 더 바라지 않을까요? 저도 자식 앞세운 부모들 만나봤어요. 보면 알코올 중독이 된다든지 병이 온다든지 아니면 세상 사는 거에 재미가 없다든지 그래요. 먼저 간 사람이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을 기뻐할까요?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고 이 세상을 사는 건데 다음에 내가 죽은 자식을 만날지 안 만날지 모르지만, 저는 만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 왔단다, 너한테 고맙고 애들한테도 고맙단다'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저는 다 고마워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서사에는 편견이 있었다. 인터뷰이를 만나기 전 죽은 자식에 대한 상실의 고통을 입양을 통한 새로운 자식 사랑으로 승화시켰다는 극히 진부한 결론부터 내렸었다. 어떻게 해도 번듯하게 키워낸 아들을 잃은 어미의 마음을 내가 헤아릴 길은 없다.

부모된 사람은 누구나 그러겠지만 난 그런 발칙한 상상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불온한 일은 내게는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부모 된 자의 지극히 상식적이고 절박한 바람이긴 해도 장담할 수 있는 인생의 미래는 아니다. 닥치기 전까지는 누구든 그런 건 상상조차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강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가 얻은 결론은 상실의 고통은 고통대로 남는 것이지 물이 수증기로 기화하듯 날아가는 게 아니었다. 강씨는 사고로 자식을 한 명 잃었고, 입양으로 자식 셋을 얻었다. 쉽게 생각할 때 얻은 자식 셋이 주는 기쁨이 죽은 자식 하나를 잊게 해줄 것 같지만 죽은 자식이나 살아 있는 자식이나 강씨에게는 여전히 사랑의 몫을 똑같이 나누는 자식들이었다. 

강씨는 얻은 자식 셋이 주는 기쁨은 기쁨 대로, 죽은 자식 하나가 주는 슬픔은 슬픔 대로 긍정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자신에게 닥친 삶을 과장하지 않고 딱 그만큼만 인정하고 긍정하는 삶이 중요하고 오히려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게 슬픔이든 기쁨이든 마찬가지다.

열일곱 살 도윤이는 엄마인 강씨에게는 아직도 열일곱 살 도윤이로 그녀의 행복한 삶 안에 함께 살아 있었다. 슬픔은 그녀가 도윤이를 기억해내는 아픈 감정일 뿐 불행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무관한 게 분명해 보였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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