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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을 인터뷰 하다

"동생 키우겠다기에 물었죠, 왜 난 안 데려가냐고"
[입양을 인터뷰하다 18] 한국입양홍보회 설립자 스티브 모리슨

15.06.09 16:27 | 김지영 기자쪽지보내기

▲ 한국입양홍보회 설립자 스티브모리슨 ⓒ 김지영

1956년생. 국적 미국. 고향 강원도 묵호(동해). 미국 퍼듀대 졸업. 미항공우주연구소 수석연구원. 전문분야 인공위성 하드웨어. 한국계 아내와 2남 3녀. 다섯 남매 중 아들 둘 입양. 원 가족과는 다섯 살 때 헤어짐. 친부, 사망. 사망원인 동사. 사망 시기 모름. 친모, 사망으로 추정. 남동생, 소식 모름. 양부, 2008년 84세 일기로 사망. 양모, 생존 91세. 콜로라도스프링스 소재 요양원에 입원 중.     

내년이면 만 나이 육십을 바라보는 해외입양인 스티브 모리슨. 한국 이름 최석천. 간단할 수 없는 사연들이 얽혀있는 그의 약력이다. 지난 5월 10일 서울 명동의 한 호텔 라운지 카페에서 입양의 날 행사 참석을 위해 모국을 방문한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44세이던 2000년 과천시민회관에서 열린 국내 최초 공개입양가족 전국대회의 주역이었다. 그는 그 해 역시 국내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공개입양가족들의 전국단위 자조모임인 사단법인 한국입양홍보회의 설립자다.

해외입양인 출신 미국인 스티브 모리슨은 한국입양문화가 이만큼이라도 발전해 오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공개입양문화의 첫 발을 뗀 선구자다. 이른바 '한국입양계의 대부'로 자리매김한, 미국에서 성공한 해외입양인 출신인 그가 왜 사재를 털어가며 한국의 입양문화 발전을 위한 운동에 헌신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살아온 인생이 그걸 대신 말해줄 거라 생각했다.

뿔뿔이 흩어진 네 식구

약속 시간에 먼저 도착했다. 카페에 앉아 기다리는데 그가 불규칙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얼핏 살폈다. 오른쪽 무릎이 굽혀지지 않았다. 그는 장애인이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동해바다가 보이는 동네 언덕바지 짚으로 만든 움막집에 살았어요. 석탄을 실어 나르는 기차가 생각나고, 바다 위에 군함과 어선이 떠 있었어요. 아침에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도 기억나요. 아주 평화스러운 광경이었어요."

네 살, 다섯 살 무렵이니 그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생각하는 엄마, 아빠가 있고 동생과 함께 살았던 유년시절의 풍경은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풍경은 곧 회색빛 암전으로 변한다.

"아버지가 하던 큰 사업이 망했다고 해요. 기억에는 없지만 그 전에는 아주 잘 살았던 것 같아요. 그 뒤로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어요. 술에 취해서 얼굴이 붉어지고 눈빛이 겁이 날 정도로 무서웠어요. 그리고는 어머니와 동생과 저를 때렸어요. 특히 어머니를 정말 심하게 때렸어요."

아버지는 매일 술을 먹었고, 어머니는 매일 구타를 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아버지의 매를 맞다 아버지가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신발만 신고 도망을 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아버지를 따라 외갓집에 들러 잠깐 어머니와 만났지만 그 날 이후 더 이상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매를 피해 신발만 신고 도망쳤던 그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처음부터 장애는 아니었어요. 어느 날 외할머니 집에 하루 맡겨졌는데 하룻밤 사이에 발이 퉁퉁 부었어요. 그리고는 무릎이 굽혀졌는데 그 뒤로 펴지지가 않았어요. 어머니가 집을 나간 그날 낮에 어머니 등에 업혀 병원을 갔어요. 어머니는 정말 인자하고 착하신 분이었어요.

병원에 가는 길에 어머니가 그래요. '석천아, 이따가 저녁에 아버지가 또 엄마를 때리면 네가 아빠한테 엄마 그만 때리라고 말 좀 해줘라.' 오죽하면 어머니가 다섯 살짜리 아들한테 그 말을 하겠어요. 그 날 아버지는 또 술에 취해 들어오셔서 두 아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때렸어요. 어머니는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맞기만 했어요.

그렇게 한참이 지나갔어요. 막 소리 지르고 때리고. 동생하고 저는 그 때 자다가 깨서 어리둥절하다가 울기만 했지요. 제가 어머니가 낮에 한 말을 기억해낸 건 어머니가 한참 동안 정신을 잃을 만큼 맞고 있을 때였어요. 아버지한테 다가가서 엄마 그만 때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나한테 다가와서 '그래, 석천아 미안하다, 그만 때릴게' 그랬는데 불과 1분인가 2분인가 지나니까 또 다시 가서 때리는 거예요.

어머니가 그 때 도저히 안 되겠는지 아버지가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후다닥 뛰쳐나갔지요. 하지만 곧 아버지한테 잡혀왔어요. 그리고는 또 때리는 거예요. 그러다 또 아버지가 한 눈을 팔았고 어머니가 다시 뛰쳐나갔어요. 맨몸에 신발만 신고. 그렇게 도망가는 데 성공했어요."

그에게는 어머니와의 삶이 끝이 나는 고통스러운 장면이었을 텐데도 '성공'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무척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와는 함께 살 수 없었지만 그 '도망'이 어머니에게는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도망에 성공하고 남은 그와 세 살 터울 동생의 삶은 어린 노숙자의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집을 나가 밤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거나 며칠씩 들어오지 않은 날도 부지기수였다. 어린 형제에게 아버지는 이미 없는 존재였다. 1961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8년,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일반 국민들도 배를 곯아야 했던 시절이다. 다섯 살, 두 살 어린 형제는 어떻게 지냈을까?

"저희는 낮에는 늘 거리를 헤매면서 특히 땅을 쳐다보고 다녔어요. 떨어진 동전을 찾으려고. 그런데 희한하게 거의 매일 동전을 찾았어요. 그걸로 빵 사먹고, 과자 사 먹고 그랬죠. 그렇다고 전혀 굶지 않은 건 아니에요. 몰골이 말이 아니었죠."

그런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다 어느 날 아버지가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어린 형제들이 수소문할 수도 없었고 그 길로 아버지와의 인연도 끝이 났다. 그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그리움의 존재가 되지 못했다. 천사 같은 엄마를 도망가게 한 악마일 뿐이었다.

부모가 모두 사라진 자리에 어린 형제 둘이 남았다. 둘이 할 수 있는 일은 굶지 않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것이 유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제에게 삶은 게를 공짜로 주며 온정을 베풀던 노점 아주머니가 동생을 자기가 키우겠다며 데려갔다.

"동생을 보니까 새 옷 입고 신발도 사주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리고 나서 동생을 데리고 가는데 제가 물었어요. 아주머니 저는 왜 안 데려가요? 그랬더니 너는 다리 때문에 데려갈 수 없다고 그래요. 그게 동생과의 마지막이었는데 그 때는 그게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알 수 없었죠. 겨우 다섯 살이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내 동생 대천이하고."

함께 살던 네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데는 채 일 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천사 같은 어머니와, 함께 먹을 것을 찾아 길거리를 헤맸던 동생은 그에게 평생의 안타까움이자 그리운 사람이 되었다.

간절한 소망, '입양'

▲ 한국입양홍보회 설립자 스티브모리슨 ⓒ 김지영

동생과도 헤어지고 홀로 길거리를 헤매던 그는 어느 신사의 도움으로 강원도의 한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아픈 다리를 수술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 고아원의 배려로 당시 서울 녹번동에 있던 홀트고아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다리 장애 때문에 동생과 헤어졌지만 그 다리 때문에 그가 홀트로 옮겨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할 만큼 밥도 못 먹던 시절이었고,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국내의 다른 가정으로 입양이 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자기 가족들 먹고 사는 문제조차 당장에 해결이 어려워 하루 밥 세끼가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입양은 아예 바랄 수도 없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당시 다른 가정을 찾아 행복하게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은 해외입양이 유일했다.

홀트에 간 그는 행복했다.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었고, 때에 맞춰 옷도 신발도 새 걸로 입고 신을 수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도 어울려 병정놀이도 하고 구슬치기 딱지치기도 하며 즐겁게 생활했고, 홀트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살 수 있었다.

무릎이 펴지지 않아 오른 손을 무릎에 짚고 걸어다녀야 했던 다리 수술도 곧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펴진 무릎이 구부려지지 않았다. 절름거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펴지지 않았을 때와는 다르게 손을 무릎에 짚지 않고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고 또 행복했다.

학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학교를 갔고, 성적은 잘 나왔다. 그렇게 행복한 고아원 시절을 보내면서도 그에게는 떨쳐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었다. 엄마와 동생이었다. 다섯 살 때 헤어졌지만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고 어머니가 주는 헌신적인 사랑을 알았다. 한 번은 고아원 울타리에 서 있는데 또래아이가 소풍가방을 매고 물병을 차고 양 손에 엄마 아빠 손을 꼭 잡고 웃음을 지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부러웠고, 목이 메었고, 그리움이 차올랐다.

미국으로 입양 가는 아이들처럼 나도 빨리 입양이 되어 엄마아빠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사이 많은 친구들이 미국으로 입양되어 떠났고 또 많은 친구들이 남았다. '왜 나는 입양이 되지 못하고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던 시절이었다. 정말이지 입양은 간절한 소망이었다.

중학교 1학년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있을 무렵이다. 당시에는 법적으로 만 14세는 해외입양을 갈 수 없는 나이였다. 1970년 2월 27일이 지나면 입양되는 건 포기해야 했고, 고아원에서 살다 나이가 차면 거친 세상에 혼자 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입양은 그가 사회에 나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고, 그가 간절하게 꿈꾸던, 가정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고아원에서의 생활이 어린 시절 길거리를 배회하던 때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안겨주었지만 그는 엄마아빠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을 받고 싶었고, 안정된 공간에서 공부하고 싶었고, 사회에 나가 성공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1969년 말, 미국에서 발행되는 홀트 기관 잡지 뒷면에 인쇄된, 입양이 필요한 30~40명의 사진 속에 그의 사진이 들어갔다. 14살 입양 불가 연령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연이 함께 실렸고 11개 가정이 그를 입양하겠다고 나섰다.

1970년 5월 28일, 그는 성경책과 일기장이 든 가방을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나이 열네 살 때였다.

"미국 가족은 누나 둘과 저랑 나이가 같은 아들이 하나 있었고요. 그 밑으로 2년 전에 입양 와서 열두 살이 된 백인 혼혈아 동생이 하나 있었죠. 형제들 우애는 좋았어요. 거실에서 보드게임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아버지는 정부 소속 생물학 연구원이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셨지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중산층에 가까운 가정이었어요.

아버지는 정말 검소하고 인자하고 겸손한 분이었어요. 어머니도 그랬고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를 많이 사랑해 주시고 5남매도 화목하게 잘 지냈어요. 적응하는 데 참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은 정말 신사다웠어요. 매일 뽀뽀해주시고 그러는데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정말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면서 제 생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거예요.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완전히 대비되는 가족의 모습이었어요. 제가 그 때 아버지 상을 배우게 된 거예요. 아내한테는 저렇게 사랑해야 되는구나, 자녀들은 이렇게 사랑해야 되는구나. 정말 멋진 아빠가 되고 싶었어요."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믿기 힘들었어요"

그는 공부를 잘했다. 미국에 가서 그가 가장 잘한 과목은 수학이었다. 물리와 화학도 그에게는 맞는 공부였다.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 이후 영웅으로 부상했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시절 즐겨보던 어린이 잡지에 닐 암스트롱에 대한 이야기들이 연이어 나왔을 때 그는 우주를 동경하기 시작했고 닐 암스트롱과 같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꿈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앞으로 많은 대학의 입학허가서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닐 암스트롱이 다녔던 퍼듀 대학을 선택했고, 닐 암스트롱이 전공했던 우주항공과에 입학을 했다. 

"대학 4년 동안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아버지 어머니에게 저는 자랑거리가 되었죠. 물론 저도 그런 아버지 어머니를 보며 기뻤어요. 1979년 졸업을 앞두고 굵직한 인공위성 관련 대기업으로부터 러브콜이 많이 왔어요. 이제 며칠에 걸친 졸업시험만 무사히 치르면 사회에 나갈 수 있었어요.

새벽까지 공부하며 졸업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며칠 남겨 두지 않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아버지가 심장질환으로 병원에 계시는데 위험할 수 있다고요. 아... 그 때 그 심정은...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마지막 시험을 봐야 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매일 어머니께 전화하고 공부하고 전화하고 공부하고 그랬죠.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났고 아버지는 괜찮아지셨어요. 시험이 끝나고 졸업장을 받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 계신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방에 들어갔더니 (아버지는) 아직도 코에 이런저런 관을 꽂고 상당히 연약하고 창백한 표정이었는데 의식은 분명했어요. 제가 다가가서 아버지 손을 잡고 선물을 하나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졸업장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누워계신 그대로 졸업장을 열고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가시는데 제가 옆에서 그걸 지켜보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아버지는 나의 영웅, 나의 롤모델이었어요.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정말.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불과 9년 전에는 밥 한 공기도 못 사는 부모형제와 생이별한 그런 어린 소년이 이제는 최첨단 기술을 확보한 그런 연구소에서 좋은 보수로 나를 데려가고 대학원 공부까지 지원을 해주겠다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될 수 있나, 그러면서 옛날에 강원도에서 생활하던 모습도 떠오르고. 너무나 내가 뿌듯하고, 정말 감사하고, 홀트 할아버지가 흘린 땀을 생각하면 감동이 생기고, 미국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참 믿기 힘든 거예요.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입양을 통해 자기 인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었던 반면에 입양되지 못하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없었던 한국 고아원 친구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자신보다 훨씬 똑똑하고 재능 있었던 장애인 친구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미국에서 장애는 그의 인생에 장애가 되지 못했지만 한국사회에서 장애는 모든 것에서 장애가 되는 현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그의 하나님과 약속을 했다. 그가 버는 수입의 1/10(십일조)을 지금의 그를 가능하게 해 준 홀트에 기부하기로 했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 기부는 비밀입양이 대세였던 그래서 음지라는 그늘 진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의 입양문화가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나도록, 그가 공개입양운동에 헌신하게 하는 인연이 된다.

13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

▲ 한국입양홍보회 설립자 스티브모리슨 ⓒ 김지영

매달 빠지지 않고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하는 그를 미국 홀트지부에서 초대했고 곧 지부 이사 자리를 제안했다. 그는 흔쾌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의 나이 27세 때인 1983년, 이사 자격으로 입양 후 처음으로 모국 방문을 하게 된다. 한국을 떠난 지 13년 만이었다. 홀트 고아원의 원생이었던 그가 미국으로 입양 간 지 13년 만에 홀트의 이사가 되어 귀국한 것이다.

5년 뒤인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한국이 세계에 알려지고 비로소 세계 속에 한국이 되어갔다. 한국에 대한 각종 소식들이 세계로 알려지던 즈음, 한국 내에서는 해외입양의 부끄러움에 대한 보도가 '고아 수출국'이라는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비판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한국 사람들이 입양을 하지 않으니까 아이들이 할 수 없이 해외로 가는 건데 자기들은 입양을 하지 않으면서 왜 해외입양을 비판하는지. 자신들이 입양을 하고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러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근데 지금도 그렇지 못하잖아요. 제가 스스로 질문을 던진 거예요.

한국의 입양문화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왜 한국 사람들은 입양을 안 할까. 공개입양을 해야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입양은 부끄럽고, 창피하고, 두렵고 이런 인식이 있는 한 발전될 수 없어요. 그것 때문에 다들 비밀입양을 하잖아요. 한국의 입양문화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거 밖에 없어요. 해외입양을 줄이려면 국내입양이 많이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1999년 미국 내에 한인입양가족들의 자조모임을 만들었던 그는 그 해 한국에도 공개입양가족들의 모임을 만들 것을 계획하고 비행기를 탔다. 그 다음 해인 2000년, 과천시민회관에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국내입양 활성화를 위한 전국입양가족대회 열렸다. 같은 해, 공개입양가족들의 자조모임인 한국입양홍보회가 설립되었다. 공개입양운동의 시작이었다.

2006년, 전해 법률로 정한 5월 11일 입양의 날 행사가 서울 삼성동 코엑스 몰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2007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국내입양 아동이 해외입양 아동 수를 앞질렀다.

한국입양홍보회 설립 이후 15년 동안 설립자인 스티브 모리슨은 매년 2회 이상, 연구소에 휴가를 내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다. 올해 5월 7일 한국을 방문한 그는 입양 관련 인사들을 만나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같은 달 18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한국 방문은 올해 한 차례 더 있을 예정이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입양 문화가 많이 밝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공개입양과 비밀입양의 비율은 절반씩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아직은 한국을 계속 찾아야 할 이유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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