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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가는 꿈틀버스

"국회의원 쫓아다니던 노인들이 달라졌다"
[행복을 찾아가는 '꿈틀버스' - 광주 광산구⑤] 강위원 더불어락 노인복지관장

15.05.15 11:26 | 소중한 기자쪽지보내기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과 광주 광산구는 오는 5월16~17일(1박2일) '꿈틀버스'를 운행합니다. 꿈틀버스 1호차는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광주 광산구에서 꿈틀거리는 협동조합 '클린광산' '더불어락' 등을 찾아가며 오연호 대표의 '행복특강'도 개최합니다.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오마이뉴스와 광산구가 꿈틀버스 공동 취재단을 구성했습니다. [편집자말]
▲ 광주 광산구 더불어락노인복지관의 강위원 관장이 12일 오후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모철홍

학생운동, 한총련 의장, 두 차례 옥고…. 이런 이가 2011년 노인복지관을 이끈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변신"이라고 말했다.

"누구는 변신이라고 하고, 누구는 파격 행보라고 하고, 심지어 누구는 '왜 정치하냐'고 하는데, 이 길(복지)은 일관된 삶의 과정이고, 가장 전투적인 정치고, 작게나마 가난과 고난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구체적 삶이다."

광주 광산구 더불어락노인복지관(아래 더불어락)의 강위원 관장은 한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청춘 시절 꿈꿨던 소신, 철학, 신념을 잘 지키는 게 복지의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 관장은 "복지는 시혜가 아니다"라는 철학을 더불어락에 그대로 녹여냈다(관련기사 : 계단 한 칸 못 오르던 할머니, 바리스타 됐다).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 쫓아다니며 무얼 받아낼지 압력을 가하던 노인들"이 이젠 스스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북카페를 짓고, 직접 만든 커피를 손님에게 내놓는 행복한 사람으로 변했다.

강 관장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운동에 몸담고, 감옥에 다녀왔을 때만 해도 공공 영역에선 나를 해적 취급했다"며 "지금은 사방 군데에서 글을 써달라 하고 강의를 요청한다"며 웃었다.

다만, 그는 "불안한 행복"이라고 말했다. 강 관장은 최근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경찰 조사를 받은 박래군 세월호국민대책회회의 공동위원장을 거론하며 "(나도) 광장에 있어야 하고 노상의 천막에 있어야 하는데, 새 담론으로 불리는 복지라는 외피 안에 숨어 너무 편하게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만히 있으면 화났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 항상 밝은 표정을 짓는다"는 강 관장이 눈물을 훔쳤다.

"복지, 스스로 일궈야 행복하다"

▲ 광주 광산구 더불어락노인복지관의 강위원 관장이 12일 오후 더불어락으로 견학 온 서울 성북구청 공무원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있다. ⓒ 모철홍

그에게 더불어락 만큼 소중한 것이 '여민동락 공동체(아래 여민동락)'다. 두 번째 감옥에 다녀온 뒤, 한총련 합법화 운동, 농촌사회복지시설 근무 등으로 시간을 보낸 강 관장은 2007년 고향인 전남 영광 묘량면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동지' 권혁범·이영훈씨와 함께 여민동락이라는 농촌복지공동체를 만들었다.

"농촌의 재생보단 마지막 설거지 역할을 하고 있던 복지"에 답답함을 느낀 강 관장은 "복지가 농촌의 성장에 기여하기 위해선 교육, 문화, 경제 분야가 기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귀농을 장려하고, 이를 위해 귀농지원센터를 만들었다. 이어 귀농인을 위해 협동조합 형태의 마을기업을 만들었다. 학교-마을-기업이 교육-문화-경제의 선순환으로 자리잡았다.

강 관장은 "복지는 누리는 당사자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 삶이 얼마나 더 존엄해지는지를 척도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민동락이 있던 묘량면은 동락원이라는 농장부터 할매손이라는 공장까지, 어르신들의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마을로 거듭났다. 더불어락 역시, 북카페 공사부터 협동조합 설립까지 지역에 사는 어르신들이 직접 일군 성과다.

"시골 어르신들이 직접 손으로 송편을 빚어 10만~20만 원을 벌고, 농사를 지어 작지만 월급이란 걸 받고, 이 돈으로 교회에 헌금도 내고, 절에 시주도 하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인간은 어떨 때 가장 행복할까. 노동 가능한 근력을 갖고 있는 한, 자기 노농을 통해 자기의 삶을 영위하게끔 만드는 게 최고의 복지다."

강 관장은 여민동락에서 농촌복지모델을, 더불어락에선 도농복합복지모델을 실험했다. "앞으로 완벽한 도시형 모델인 곳을 거점 삼아 새로운 마을 공동체의 모델을 만들려고 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나아가 "광주의 시민재단을 꿈꾼다"고 덧붙였다. "광주광역시청이 지방자치정부라면, 내가 꿈꾸는 시민재단은 권력의 향배와 관계없이 광주 시민의 자주, 자치, 자립과 관련해 노력하는 민간 자치정부"라고 말한 그는 "5·18 50주년인 2030년까지, 전세계 자치의 상징으로 광주 공동체가 거론될 수 있게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아래는 12일 오후 더불어락에서 강 관장과 한 인터뷰 전문이다.

"'노인복지관, 그 징한 곳 왜가냐'고 말리더라"

▲ 광주 광산구 더불어락노인복지관의 강위원 관장이 12일 오후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모철홍

- 항상 표정이 밝다. 비결이 뭔가.
"내 일을 찾은 것 같다. 잘 할 수 있는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그러면서도 시대정신과 공익을 위한 일을 지금 활동하고 있는 현장에서 찾아 행복하다. 또 밑바닥 현장에선 새로운 실험의 결과가 곧바로 드러나는 재미가 있다. 하루하루 변화를 실감하고 사니까, 정말 행복하다."

- 농촌에서 여민동락의 대표로 있다가, 2011년 처음 광산구노인복지관(지금의 더불어락)에 들어왔을 때, 많은 눈길을 끌었다. 당시 스스로 "파견 나와 있다"고 말했는데 벌써 4년이 지났다.
"도시에서 복지를 근간으로 한 마을공동체가 가능한지 실험하기 위해 더불어락에 들어왔다. 4년 동안 좋은 동료를 많이 만났다. 더불어락에 막 왔을 때 만난 최고의 동지 고 박만영 전 사무국장은 이곳을 새로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은 광산구의원이 된 김광란 전 사무국장과 처음엔 낯설었던 현장의 사회복지사들도 소중한 동지들이다. 모두가 힘을 모아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새롭게 개척했다는 것과 대한민국 복지의 역사를 새로 만들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 2007년 농촌으로 들어가, 여민동락을 만든 까닭은.
"처음 여민동락을 구상하며, 동료들과 막걸리를 앞에 두고 각자 꿈이 뭔지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야, 우리가 시골 변방으로 들어가지만, 우리의 상상과 염원은 적어도 한반도 전체에 둬야 하는 것 아니냐. 세상을 바꾼다는 관념적인 슬로건 말고, 구체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모델을 만들어보자.' 그러면서 공간을 마을로 잡아 초점을 좁혀야 우리가 생각하는 모델이 빨리 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촌모델을 생각해 여민동락을 만들었다."

- 단순히 베푸는 게 아닌,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게 복지의 초점인 것 같다.
"처음 더불어락(당시 광산구노인복지관)에 온다고 했을 때 지역 유지 한 분이 '거기 징한 곳이요, 뭣헐러고 오요'라며 말리더라. 오죽했으면 전에 위탁하던 법인이 더 이상 위탁 못하겠다고 내놨겠나. 막 들어왔을 땐 한 직원이 어르신 13명의 이름이 적힌 블랙리스트를 가져오며 '이 13명만 조용히시키면 복지관 전체가 조용해진다'고 하더라. 그랬던 어르신 13명이 지금은 더불어락 자치위원이다. 어르신을 통제하고, 규율 속에 가두는 게 아니라 인생의 문화재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이 가진 경륜을 지역사회에 잘 나눌 수 있도록 돕는 게 노인복지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마을의 원로를 초등학생처럼 계도하려고 했으니 얼마나 불만이 많았겠나. 관점을 바꾸면 달라진다."

"작지만, 소중한 변화에 자부심"

▲ 광주 광산구 더불어락노인복지관의 강위원 관장이 12일 오후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모철홍

- 최근 선거철마다 꾸준히 하마평에 오르내렸다.
"사실 오늘 아침에도 '내년 총선에 출마 할 거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런 말은 수도 없이 들었고, 누구는 (출마를 하지 않아) 비겁하다는 말까지 했다. 심지어 정치 혐오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웃음). 미래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학생운동과 여민동락, 더불어락이 출마의 정치를 위한 준비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설령 나중에라도 출마의 정치가 나에게 압박을 가하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내가 살아온 역사를 존중하고 싶다. 살아왔던 인생이 정치를 위한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가장 구체적 정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유력한 도구가 됐으면 한다."

- 첫 질문에서 했던 물음을 다시 던지려고 한다. 항상 표정이 밝다. 행복한가.
"불안할 만큼 행복하다. (뒤를 가리키며) 사무실에 한 켠에 이불이 있다.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많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과거에는 무슨 책을 본다고 잡아가고, 무슨 글을 썼다고 문제 삼고, 무슨 말을 했다고 이적용공 취급 받았다. 지금은 사방 군데에서 글을 써달라 하고, 강의를 요청한다. 요청 들어온 것의 절반을 거절할 정도다. 항상 잠이 부족하지만 고난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작지만 소중한 변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작은 자부심도 있다. 일하면서 맑은 영혼을 가진 동지들을 계속 만나고 있어 행복하다. 이런 행복에 아내도 동의하고 있다는 것 또한 행복하다. (강 관장은 머뭇거리더니 눈물을 훔쳤다) 얼마 전 인권운동가 박래군 선생이 세월호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간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썼더라. 박래군 선생이 있는 자리에 나도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앞서 '불안한 행복'이라고 한 거다. '내가 이렇게 누려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더 투신하고, 더 몰두한다.

복지의 완성은 자치라고 하는데, 나는 자치의 목적을 한반도를 자치분권형 연방통일국가로 만드는 것으로 두고 있다. 자치의 실험과 분권의 완성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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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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