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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 리포트

입양을 인터뷰 하다

친자식도 아닌데... 의사도 깜짝 놀란 검사결과
[10만인리포트-입양을 인터뷰하다⑬] 성인입양아 CCM가수 박요한씨①

15.04.11 10:42 | 김지영 기자쪽지보내기

<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성인입양아를 인터뷰이로 섭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입양부모와 입양 당사자에게 성인입양아는 그게 누구든 한 번은 꼭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어쩌면 곧 자기들의 미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피하고 싶어한다. 대개는 성장과정에서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고 그 상처가 지금에 와서 다시 불거지고 되새겨지는 걸 마뜩치 않아 한다. 더구나 지금 성인이라면 공개입양이 공공연해지기 전 오직 비밀입양만이 대세였던 과거를 힘겹게 거쳐 온 사람이기 쉽다. 길든 짧든 삶의 과정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돼 난임가정에 입양되어 자란 후 15년차 기독교음악(CCM) 가수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박요한씨는 처음 연결이 복잡했지, 실제 인터뷰 요청 수락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여기 참으로 험난했던 그의 성장과정과 그 삶을 통해서 걸러진 그의 통찰을 2부에 걸쳐 소개한다. - 기자말

▲ CCM가수 박요한씨 ⓒ 김지영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한창 격동의 사춘기를 보내고 있을 무렵이다.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한 살 어린 외사촌이 무척 조심스럽게 주저하며 말했다. 뒤에 생각해보니 열 네 살 어린 소년이 지니고 있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비밀이기도 했다.

"형. 나 엄마 아빠한테 들었는데 사실은... 사실은 형 엄마 아빠가 진짜가 아니래. 원래 형,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는데 데려다 키우신 거래."

'무슨 소리야, 그런 장난은 치는 게 아니야'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동생이 어렵게 뱉은  그 말이 심장에 와서 그대로 꽂히는 느낌이었다. 참 이상하게도 그 때 그 즈음에 '엄마 아빠가 내 엄마 아빠가 맞을까?', '우리 엄마가 나를 낳아주신 분이 맞나?'하는 의문을 잠깐씩 가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질 수 있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통과의례인 줄로만 알았다. 하필이면 그런 즈음이었다. 그렇게 심장에 날아와 꽂힌 동생의 말에 잠시 얼어붙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개구졌다. 한 때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집안 살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인자한 어머니 사이에서 온갖 사랑을 다 받고 자랐다. 아버지 역시 단 한 번도 매를 든 일이 없을 정도로 아들을 끔찍하게 대했다.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자식이었고 아들이었다.

그날 저녁 집에 들어와서도 다른 일로 부모님과 다투었다. 한창 그런 사춘기 시절이었다. 그렇게 다투는 와중에 말을 해버렸다. 다 알고 있다고. 엄마 아빠가 내 진짜 엄마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다 들었다고. 그래서 나한테 지금 이렇게 하는 거냐고. 해선 안 될 말까지 보태가며 쏟아냈다. 내심 '얘가 무슨 소리야?' '어디서 쓸데없는 소리를 듣고 이러는 거야?'라는 말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엄마가 그 자리에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도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심증이 확신이 되었다. 오랜 시간 정적이 흘렀다. 긴 정적을 깬 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엄마의 비통한 울음소리였다.

"형, 사실은 형 엄마 아빠가 진짜가 아니래"

▲ 기독교 음악을 하는 CCM 가수 박요한 ⓒ 김지영

2015년 3월 18일. 서울 방배동에 있는 카페에서 CCM(기독교음악) 가수로 활동하는 박요한(40)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지 하루 만에 홀트아동복지회로 옮겨지고 한 달이 안 돼서 그를 자식으로 맞아들였던 양부모에게 친자로 입적되어 자란 성인 입양아다. 몇 해 전에는 극적으로 생모와 만났고 그 만남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결혼 8년 차, 세 아이의 아버지인 가수 박요한씨의 지난 삶과 그 삶을 통해 얻은 생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긍정적 성찰은 우리 시대 입양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마주할 수 있는 선명한 거울이었다.

- 그렇게 울고 난 뒤에 어떤 말을 했나요?
"어머니가 우시고 잠시 정적이 흐르는데 어머니가 다시 우시면서 '요한아. 너 아니야. 네가 무슨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너는 엄마 아빠 아들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아들이야.' 그러고선 다들 울음바다가 되고 난리가 났었죠."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생활이 달라졌나요?
"그 다음부터... 제가 급격하게 비뚤어졌어요. 사실을 알았지만 인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엄마 아빠가 가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더 화가 나는 건 우리 친척들도 다 알고 있고 이 사실을 나만, 저만 모르고 지금까지 산 게 너무 바보 같은 거예요. 이런 일이 아니어도 사춘기 시절에는 반항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정말 너무 심하게 비뚤어졌어요."

- 주로 어떤 식이었어요?
"그냥 반항의 끝을 달렸어요. 대답도 안 하고, 대들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도 친구들이랑 놀다 밤늦게 들어가고, 무슨 얘길 해도 듣지도 않고."

- 몇 년이나 그랬어요?
"정말 오랜 시간요. 고등학교 지나고 스무 살 언저리까지 그랬어요. 그렇지만 저는 알고 있었어요. 제 안에, 제 마음 속에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나를 어떻게 키워 주셨는지를. 아는데 알고 있는데 그래서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해요. 그런데 제 입으로 말이 나갈 때는 어떻게든지 엄마 아빠를 화나게 하고 싶은 거예요. 제 못된 마음들이."

- 왜 그랬을까요?
"제 안에 있는 분노와 배신감들 이런 것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고통스럽다는 걸.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감당이 힘들어서 그 마음을 엄마 아빠도 겪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뀌고 집에 안 들어가고, 못된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 거리를 배회하고? 싸움도 많이 하고?
"그럼요. 제 안에 분노가 많으니까."

- 그렇게 말썽 피우고 그럴 때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어머니는 매일 울면서 지냈어요.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강해지라고 계속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 아버님은 술이나 이런 건?
"잘 안 드셨고, 어머니가 너무 힘들고 그런 시절을 보내니까 아버지가 옆에서 많이 지켜주셨죠. 두 분 금실이 참 좋으셨거든요."

- 어머니가 몸이 약하셨다고 그러셨는데?
"당뇨가 있었어요.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그 시기에도 어머니가 미용실을 하셨어요. 일 하시면서 몸도 안 돌보고, 저는 속 썩이고 그러니까 병이 급격히 악화되셨죠."

- 그러다가 저절로 철이 든 건가요? 아니면 어떤 계기나 이런 게 있었나요?
"어머니가 너무 힘드니까요.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시고 기다려주시는 어머니가 어느 날 제 눈에 보이고 제 마음을 움직였던 거죠. 제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그 시절을 떠올려 봤어요. 이제는 같은 처지니까요.

그렇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저는 아들을 포기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내 품에서 너무 힘들어 하니까, 더 비뚤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죠. 울기만 했지 뭐라 그러시지도 않고 그저 기다려주셨거든요. 그게 어쩌면 더 고통스러웠을 텐데도...(눈가에 살짝 물기가 비쳤다)"

- 입양 사실을 안 다음에 생모나 생부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의문이랄까요. 그런 마음은 안 드셨나요? 
"그 당시에는 그리움이 아니라 분노였죠. 분노. 이거였어요. 나를 버릴 거면 왜 낳았는지.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그거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었죠. 그런 것들이 더해져서 제가 더 방황하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방황의 시간들이 지나고 어머니 눈물과 기도와 침묵의 힘으로 잘 이겨내고 다시 정상의 삶으로 돌아왔어요. 결혼을 할 시점에 문득문득 나를 낳아 준 생부모는 어떤 분들일까, 살아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무기력하게 어머니를 잃을 수는 없었다

삼수 끝에 대학에 입학한 박요한씨는 곧바로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했다. 전역을 했지만 대학에는 미련이 없었다. 경영학과는 적성과는 무관했다. 미래에 대한 막막함에 고민하고 있던 중 우연히 읽던 책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즐겨할 수 있는 걸 직업으로 하라.'

어릴 때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어딜 가도 항상 앞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노래할 때가 제일 좋고 즐겁구나.' 결론을 내리고 공개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데모 시디를 만들고 일 년을 그렇게 수많은 기획사를 오가며 오디션을 봤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기독교 음악이라는 장르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그렇게 종류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오디션을 보고 데모 시디를 무작위로 보냈다. 그러던 중 두 군데 기획사에서 동시에 합격을 하게 된다. 한 군데는 일반 기획사였고 다른 한 곳은 기독교 음악을 하는 기획사였다. 어머니 병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에게 사실을 말씀드리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향을 물었다.

평생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의향은 물으나 마나였다. 살면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어머니 얼굴을 처음 보았다. 아들이 기독교 음악을 하는 가수가 되고 찬양을 하는 가수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머니는 금세 병이 나을 듯 기뻐했다. 자신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몸에 있는 병을 더 깊게 만들었는데, 어머니가 그렇게 기뻐하시는 걸 보고 다른 결정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박요한씨는 기독교 음악을 하는 CCM 가수의 길에 들어섰고 15년을 변함없이 그 길을 걷게 되었다.

사회에 나와 자신이 평생 좋아하면서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직업도 찾고 청소년기 그토록 방황을 하며 고통을 주었던 부모님에게도 속죄하고 효도하며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세는 갈수록 깊어졌고 마침내 투석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장이식이 아니면 더 이상 살 수 있는 길이 없을 상황에 다다르자, 어머니는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준비하시는 눈치였다. 대기명단에 올려도 실제 이식에 이르기까지 기다려줄 시간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가족들의 신장을 이식하자고 했을 때 어머니는 극구 반대했다. 그렇게까지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가족들의 살을 받아 연명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지나온 삶이고 어떻게 이겨낸 삶인데, 이제 서로 사랑만 하며 살아도 되는 그런 호시절이 왔는데 그냥 무기력하게 어머니를 잃을 수는 없었다.

울면서 설득했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담당 의사까지 동원해서 검사라도 받아보자는 답을 얻어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이식을 할 만큼 조직이 맞을 확률도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 신장조직이 맞을 확률은 거의 없었고 박요한씨 역시 배로 낳은 자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수술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다. 의사는 박요한씨가 입양한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검사를 했고 결과가 나왔다. 의사로서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가족들로서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과였다.

"가족들 중에서도 안 맞을 수가 있는데 아들 조직이 정확하게 일치를 하는군요. 수술을 하면 되겠습니다."

○ 편집 ㅣ 홍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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