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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 리포트

입양을 인터뷰 하다

마흔 아홉에 얻은 둘째, 아빠는 화장실을 못갔다
[10만인리포트-입양을 인터뷰하다⑫] 연장아 입양한 차성수·유현미 부부1

15.03.26 17:44 | 김지영 기자쪽지보내기

<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편집자말]
2014년 11월 28일 서울 금천구청에서 차성수(58·금천구청장), 유현미(57·전업주부) 부부를 만나 인터뷰했다. 차성수·유현미 부부는 2006년부터 2008년에 걸쳐 연장아(신생아가 아닌 연령이 있는 아이) 셋을 입양해 키우고 있다.

이 글은 부부가 들려 준 긴 이야기와 엄마인 유현미씨의 일기 중 일부를 섞어 유현미씨의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차성수·유현미 부부는 연장아 입양이 어렵긴 하지만 시설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입양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전해 주었다. 그만큼 연장아 입양은 까다롭고 특별한 입양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고 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연 중심으로 글을 구성했으며 3부에 걸쳐 이야기를 전한다. - 기자말

▲ 차성수유현미 가족의 행복한 시절 좌로부터 차혜윤(둘째딸), 차성수, 차남준(아들), 차혜주(막내딸), 유현미, 차혜인(큰딸) ⓒ 유현미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틈을 비집고 오래 전 마음에 심었던 작은 씨앗 하나가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부모 없는 아이를 입양해서 내가 부모가 돼주어야겠다는 마음의 씨앗이었다. 당시 부산 동아대 교수로 있던 남편이 주말을 틈타 서울 집을 오고 갈 때였다. 2006년. 남편 나이 마흔 아홉, 내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남편의 오랜 꿈이었던 딸을 입양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십이 목전인 남편과 내 나이를 고려하면 신생아보다는 좀 더 나이가 있는 연장아 입양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달 큰 수입을 안겨주던 대치동 학원도 정리하고 전업주부로 들어섰다. 단 한 번도 쉬는 일 없이 활동해 오던 내가 이러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입양에 대한 결심을 하고 나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들을 임신했을 때 그냥 낳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던 것과 같았다.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라는 방송프로그램을 보고 기억해 두었던 경북 김천의 임마누엘 복지원으로 전화를 하고 달려갔다. 원장 선생님은 아주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입양 결심을 이야기했고, 기다렸다.

남편만 보면 막무가내로 자지러지던 혜주

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보고 내게 꼭 맞을 만한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선택한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낳은 아들도 사실은 내가 선택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돼서 나에게 온 아이였다.

임마누엘에서 입양을 보냈으면 하는 아이가 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주저하지 않았다.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아이에 대해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처럼 아이가 나한테 오면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설렘과 떨림이 교차하는 마음을 안고 남편과 아들과 함께 김천으로 아이를 보러갔다. 두 돌이 지난 여자 아이라고 했다. 첫 딸 혜주였다.

그 날 남편은 혜주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안지도 못했다.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혜주는 남편을 보면 막무가내로 자지러졌다. 시커먼 성인 남자를 그동안 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방으로 들어가 혜주의 얼굴을 마주 보고 안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유리 창 너머로 본 혜주의 모습에 홀딱 반해버렸다. 처음부터 내 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혜주가 울고불고 고집 피우는 모습이 좋다고 했다.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라나. 고집 세고 드센 나와 결혼을 했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했다.   

그 후 일주일 간격으로 서울과 김천을 오고가며 서로 낮을 익혔다. 당시 신생아의 경우는 그냥 데려올 수 있었지만 두 돌이 넘어 보행도 자유롭고 말도 자유롭게 하는 아이에게는 지금껏 지내던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완전히 낮선 공간에서 낮선 사람들과 생활해야 하는 부담감을 덜어낼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은 혜주에게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두어 달 후 원장 선생님이 이제 아이를 데려가도 좋다고 했다. 온 가족이 혜주를 데리러 서울에서 길을 나섰다. 그 때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비로소 혜주가 우리 딸이 되는 순간이었다. 한 번 혜주를 마음에 담은 이후로 김천을 다녀가는 길에는 먹먹한 허전함만이 길가에 남겨졌었다. 이제 내 딸인데 시설에 남겨두어야 하는 그 마음은 먹먹함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길을 다시 되짚어 올 때는 더는 그런 마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혜주를 온전하게 내 딸로 맞이하러 가는 길이었다.

말귀도 잘 알아듣고 말도 잘 하는 혜주에게 시설에서는 우리가 엄마아빠가 되어 데리러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고 이해시킨 모양이었다. 보육원을 나서면서 혜주는 울지 않았다. 대신 혜주는 서울에서 가지고 온 열 개짜리 치즈 한 통을 앉은 자리에서 쉬지 않고 다 먹는 걸로 자신의 불안한 심정을 말하고 있었다. 그 뒤로 아직까지 혜주는 치즈를 입에 대지 않는다.

"엄마는 혜주 엄마야"...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 차성수 유현미 부부 ⓒ 김지영

혜주에게 남편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남편이 혜주의 손을 처음 잡은 날도 집으로 데려오던 그 날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과자를 사주겠다고 꼬드기면서 간신히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혜주는 서울 집에 가서도 한참 동안 남편만 보면 질색을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거실에서 자는 걸 좋아했던 혜주 때문에 주말에 집에 올라 온 남편은 거실을 지나야 하는 화장실도 갈 수 없을 정도였다.

"엄마. 혜주가 저 조그만 손으로 지 얼굴보다 큰 컵에 물을 따라 마실 수 있어."
"엄마. 혜주가 혼자 문도 열어."

형제 없는 집에서 혼자 자라온 아들은 어린 혜주가 하는 모든 행동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들은 한참 어린 동생 혜주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고 혜주의 모든 것을 금방 사랑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 마흔 일곱에 얻은 둘째 자식이고 첫째 딸이었다. 나 역시도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육아에 대한 서투름 때문에 아이 옷에서부터 나이에 맞는 장난감과 가구들을 사서 입히고 놀게 하고 구색을 맞추는 게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혜주는 두 돌 반이 지나는 동안 시설에서만 자란 아이였다. 무엇 하나 자기 것이라고는 가져 본 적이 없었고 자기 것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 혜주가 내 딸이 되고 나서 혜주에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가르친 것은 이제부터 너를 둘러싼 모든 것은 온전히 너만의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여기는 혜주 집이야' '이 장난감은 혜주 꺼야(것이야)' '엄마는 이제 혜주만 엄마야' '엄마는 혜주한테만 엄마고 다른 애한테는 엄마 아니야' '아빠도 혜주만 아빠야' '오빠도 혜주만 오빠야'

입양이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제 아빠, 제 오빠, 제 엄마가 되는 건데, 그건 물이 물인 것처럼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건데 그걸 가르쳐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제가 그 나이를 먹도록 살아 온 삶이 공동의 엄마, 공동의 방, 공동의 장난감 같은 것들로만 이루어졌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어린 혜주를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그렇다는 걸 혜주가 받아들일 때까지 그걸 말하고 또 말하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그래야지만 혜주가 비로소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었다. 가족은 원래 그렇게 배타적인 사랑 속에서 자기 존재감을 빛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빛나는 존재감이 제 건강한 삶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한 달쯤 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시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던 혜주가 함께 생활했던 아이들을 빗대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빠는 혜주만 오빠야. 민국이는 오빠 아니야."
"이건 혜주 꺼야. 이 집은 혜주 집이야. 진영이 집 아니야."
"엄마는 혜주 엄마야. 다른 애 엄마 아니야."

'엄마는 혜주 엄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다른 애 엄마' 가 '아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얼굴은 붉어지며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드디어 혜주에게 가족이라는, 저만의 엄마 아빠 오빠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혜주가 그걸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다는 것이었고 이제부터는 아무렇지도 않은 당연한 제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혜주는 그렇게 집에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어서 비교적 일찍 내 딸이 돼 주었다.

혜주에게 언니가 생겼으면 좋겠다

혜주가 아빠를 받아들인 건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돌이켜보니 시설에서 집으로 온 지 백일 되던 그 즈음이었다. 주말을 맞아 서울 집으로 온 남편의 품에 혜주가 안겼고 남편은 그런 혜주와 처음으로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눈빛을 나누었다. 남편에게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고,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남편은 평생 그 날의 그 벅찬 감동을 잊을 수 없을 거라 했다.

혜주가 모든 가족을 저만의 가족으로, 혜주만의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온전하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교감할 수 있는 길을 터준 날이기도 했다. 

평화와 안정이 동시에 찾아왔다. 서로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화학적인 결합을 완전하게 이루어가고 있다는 안도감도 들기 시작했다. 혜주가 우리를 드디어 받아주었다는 확신이 들면서 혜주에 대한 가족들의 사랑은 더욱 걷잡을 수 없어졌다. 혜주는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예뻤고, 혜주는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가장 예쁘고 가장 귀한 존재인 혜주를 볼 때마다 나이 많은 우리 부부가 겹쳐지고 혜주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혜주가 나중에 혼자 남게 되면 어떡하지?' 그래서 '혼자 외로우면 어떡하지' 사랑이 깊어갈수록 걱정도 따라서 깊어갔다. 자식을 하나 낳아 키우는 모든 부모들이 으레 그렇듯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걱정이었다. 남편 표현으로 '어차피 꼬인 인생, 하나 더 키우자'로 생각이 모아졌다. 혜주가 집에 온 지 불과 4개월 만이었다.

다시 임마누엘 보육원으로 달려갔다. 달려가기 전에 고민을 했다. 이번 입양은 순전히 혜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누가 또 오든, 오는 아이는 순전히 그 아이 때문이 아니라 혜주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도덕적인 자기검열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부모들이 둘째를 낳고 셋째를 낳는 것도 그 출발은 앞서 낳은 자식에 대한 연민 그리고 앞으로 남은 자신들의 삶을 자식들과 함께 더욱 풍성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모두가 부모로서 자연스럽게 가지는 같은 마음이었다.

두 번째 입양은 처음보다 더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많았다. 우리 부부의 나이와 자식을 책임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여건들을 검토하고 살펴야 했다. 두 번째 입양은 혜주에게 언니뻘 되는 아이가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단 두 번째 입양을 결심하자 마음은 급해졌다. 혜주가 이제야 온전한 가족이 되었는데 더 시간이 흐르면 위로 언니를 받아들이는 데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임마누엘에서 여섯 살 여자 아이를 소개를 했고, 혜주를 그랬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집으로 데리고 왔다. 순서는 바뀌었지만 혜주보다 늦게 우리 딸이 된 혜인이는 그렇게 혜주 언니이자 우리 부부의 큰 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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