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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배신자가 되었나

군대 왕따가 된 '의인'
그가 죽지 않고 버틴 이유
[나는 왜 배신자가 되었나1-③] 윤 일병 사건 내부 고발자, 김재량씨

15.04.08 13:41 | 강민수 기자쪽지보내기

여기 회사를, 조직을, 동료를 ‘배신’한 사람들이 있다. 조직의 부정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배신자가 된 사람들, 바로 내부고발자다. 그들의 용기는 현실을 바로 잡았지만 해고와 전출, 따돌림을 당했다. 무엇이 그들을 고발하게 만들었을까? 관심이 사라진 지금,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혹시 너무 외롭지는 않을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말]
☞ 1편 바로가기 : "너만 입 닫고 있으면 돼" 칠흑같은 밤 수화기를 들었다
☞ 2편 바로가기 : 폭로한 병사가 너라며? 지옥의 군생활이 시작됐다

[말년] 자살 충동에 시달렸지만..."승주에게 쪽팔려서"

김재량 상병의 '말년'은 엉망진창이었다. 전출 부대의 후임병들은 '김 상병님, 밥 먹었어요?'라며 말끝마다 '요'자를 붙였다. 심지어 김 상병을 '아저씨(다른 부대 병사를 지칭하는 말)'라고도 불렀다. 선임병은커녕 동료 부대원 대우조차 받지 못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김 상병도 후임병들에게 '요'자를 붙이며 존댓말을 썼다. 의지할 전우 하나없이 말년을 보내야 했다. 말 그대로 '왕따'였다.

간부들의 '관심'도 사라지지 않았다. 김 상병이 전출을 간 부대는 같은 포병연대 소속이어서 간부들은 이전 부대 간부들이 겪은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전출 부대 간부들은 김 상병을 향해 "안 해도 될 짓을 왜 해서 고생이냐", "아프다고 해, 의병 전역하게"라고 한 마디씩 던졌다.

3일에 한 번은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했다. 군의관은 우울증이라고 했다. 잠이 안 와서 수면제를 먹어야 했다. 하루는 담배를 피우다, 가로등을 보았다. '내가 죽어야 이 고통이 끝이 날까', '전투화 끈으로 가로등에다 목을 매면 한 번에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윤승주 일병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죽으면 나중에 승주 얼굴을 어떻게 보나. 쪽 팔린다. 이 악물고 버티자."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독하게 마음 먹었다. 우선 담배부터 끊었다. 줄넘기, 달리기 등 운동을 하며 살도 뺐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계급은 병장이 됐고, 남은 군생활 일수도 두 자리로 줄었다.

지난해 10월 30일, 김재량 병장은 TV뉴스를 통해 가해 병사들의 1심 선고 내용을 확인했다. 사건의 주범인 이아무개(27) 병장은 징역 45년형, 하아무개(23) 병장은 30년형, 이아무개(22) 상병과 지아무개(22) 상병은 각각 25년형, 이들의 폭행을 방조한 유아무개(24) 하사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만 적용된 것이다. 김재량 병장은 '이게 아닌데...'라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 병장의 머릿 속에는 '부족하다'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가해 병사들이) 사형, 무기징역을 받아도 승주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사형을 받아도 부족하다.'

▲ 고(故) 윤승주 일병의 혼이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돼 있다. 윤 일병 위 아래로 6.25전쟁과 월남전 참전 용사들의 혼이 윤 일병을 감싸고 있다. ⓒ 강민수

2015년 1월 초, 제대를 앞둔 김재량 병장은 말년 휴가를 나오자마자 윤승주 일병의 유해가 안치된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을 찾았다. 입구의 비석에는 '조국의 품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충혼당 봉안동 1층에 자리 잡은 윤승주 일병의 유해. 그 위로는 월남참전 용사, 밑으로는 6.25 전쟁 참전 용사의 유해가 안치돼 있었다. 윤 일병의 영정을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지막 휴가를 보낸 뒤 지난 1월 15일, 김재량씨는 사회로 돌아왔다.

[그는 누구?] "빨리 신고 못한 게 두고두고 한이 돼요"

▲ 윤 일병 사망 사고의 최초 고발자, 김재량(24)씨. 그를 지난 5일부터 6일, 이틀간 그가 살고 있는 부산에서 만났다. 지난해 4월, 상병이던 김씨는 가해병사 지아무개(22세) 상병의 자백을 듣고 포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폭행 사실을 처음 알렸다. 지난해 12월에는 참여연대가 주는 ‘의인상’을 받기도 했다. ⓒ 정민규

3월 5일 정오경, 부산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에서 김재량씨를 만났다. 어색하게 걸어오는 그는 건장한 20대 청년이었다. 군인 시절 빡빡 밀었을 머리카락은 그 사이 살짝 자라 있었고, 얼굴에 남아있는 여드름 자국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김씨는 군대에서부터 썼던 검정색 뿔테 안경을 아직 쓰고 있었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튀면 안 된다'는 이유로 검정색 뿔테 안경을 주로 착용한다.

그와 마주앉아 돼지국밥을 먹었다. 저녁에는 횟집에서 소주잔도 기울였다. 두 남자가 만났고, 끝을 알 수 없는 군대 얘기가 시작됐다. 기자와 김씨의 군번은 6년 차이가 나지만, 같은 포병 출신이라 말이 잘 통했다. 기자가 군 생활을 하던 2008년 신인 걸그룹 '카라'와 2014년 김씨와 전우들을 설레게 했던 '레이디스코드' 얘기가 나오자 서로 경쟁을 하듯 목소리가 커졌다. 두 예비역의 군대 이야기는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1992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재량씨는 2011년 경주의 한 전문대학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2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2013년 4월 16일, 스물두 살의 나이로 306보충대에 입대했다. 입대 후 1년 동안 그의 군 생활은 평범하게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해 4월 6일, 의무반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부대의 정적을 깨면서 그의 군 생활도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 윤 일병에 대한 폭행 사실을 포대장에게 최초 보고했습니다. 그 이후 많이 힘들었을텐데, 부모님에게도 그런 사실을 말씀 드렸나요? 반응이 어땠어요?
"어머니가 전화로 '왜 그랬냐', '굳이 왜 얘기해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던 것 같아요. 아들이 그런 일 끌어안고 살길 바라는 어머니는 없겠지요."

- 어머님의 반응이 서운했겠어요. 부대에서도 외로웠을 텐데.
"처음에는 서운해서 아들한테 그런 말 하지 마시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 뒤에 전화했는데 어머니가 '내가 생각이 짧았다',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라'고 하시면서 위로해주시더라고요. 전역 한 달 앞뒀을 때는 참여연대가 주는 의인상 수상자로 뽑혀서 시상식에 갔어요.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셔서 큰 격려가 됐어요."

- 지금 후회하지 않나요?
"제가 참 겁이 없었어요. 오히려 빨리 신고하지 않은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되네요."

[그의 미래] "승주같이 자기 목소리 못 내는 사람들 돕고 싶다"

▲ 윤 일병 사망 사고의 최초 고발자, 김재량(24)씨가 21개월간 군생활하면서 찍은 동료들과의 사진이다. 오른쪽은 전역을 앞두고 전출 부대 대대장과 찍은 기념사진이다. ⓒ 정민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원래 그렇게 용감한 성격이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입대 전 아르바이트하면서 있었던 일화를 떠올렸다.

"패스트 푸드점에서 일할 때였어요. 야간 배달을 하는데, 앞에서 차가 휘청휘청하면서 가더라고요. 운전자가 술을 마신 거죠. 그 차가 가다가 옆에 주차돼 있던 다른 차를 박아서, 사이드미러가 날아가고 앞 범퍼가 들어갔어요. 그런데 운전자가 내려서 살펴보더니 그냥 도망치는 거예요."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배달 안 가고 3킬로미터를 따라갔어요.(웃음) 신호에 걸렸을 때 오토바이를 차 앞에 세웠어요. 내리라고 손짓하니까, 그 사람이 나오면서 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 주는 거예요. '그 돈 필요없다'고 하면서 운전자 팔을 잡아놓고 112에 신고했어요. 근데 경찰이 더럽게 늦게 오더라고요. 잡고 있느라 힘들었어요."

- 오지랖이 심한 거 아니에요?(웃음)
"생각해보세요. 내 차를 박고 도망갔으면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승주 일도 마찬가지 같아요. 제 동생이 있는데, 저보다 일곱 살 어려요. 승주가 내 동생이었다면... 그런 생각하면서 포대장에게 전화를 했던 것 같아요."

그는 군대에서 쓴 일기장과 수양록(훈련병들에게 제공되는 일종의 군인 수첩)을 보여줬다. 헌혈을 하고서 상품으로 받은, 적십자사 마크가 찍힌 일기장이었다. 2013년 일기장 첫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다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기에는 선임과 후임, 간부들에 대한 이야기와 군생활의 불만도 적혀 있었다. 특히 그는 선임병이 되어 가면서 생활관 내 부조리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후임병들이 선임병들의 '군대리아'(군 햄버거)를 만드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했다. 상당수 부대에서는 후임병이 햄버거 빵에 고기 패티와 샐러드 등을 싸서 선임병에게 바치는 일이 일상이었다.

"후임병들이 부조리를 하고 있으면 제가 혼냈어요. '내가 이렇게 가르쳤냐' 하면서 정색했어요. 후임병들은 좋아했지만 선임병들은 싫어했어요. 선임병 입장에서는 하극상이라고 여겼죠. 선임병들에게 욕도 엄청 먹었죠."

"많이 배워서 힘없는 사람에게 베풀고 싶다"

입대하기 전, 그의 꿈은 법의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우연히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슬로건을 본 적이 있었다. '진실을 밝히는 과학의 힘'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왜 죽었는지 진실을 밝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경험은 그의 꿈을 바꿔놓았다.

그는 이제 변호사가 되려고 한다. 로스쿨에 들어가려면 먼저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 전역 후 그는 집 근처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수능을 준비하고 있다. 공부는 잘 되느냐고 묻자 그는 "머리가 굳어져서 쉽지 않다"며 웃었다. 헤어지기 전, 그는 변호사가 되려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승주 같은 사회적 약자들, 자기 말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많이 배워서 많이 베풀고 싶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공부를 안 해서 쉽지가 않네요.(웃음) 일단 오래 앉아 있으려고요. 그 더러운 군생활도 견뎠는데, 못할 거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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