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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 리포트

입양을 인터뷰 하다

"임신했어? 헤어지자"...나홀로 엄마가 되다
[10만인리포트-입양을 인터뷰하다②] 입양 결심했지만 결국... 스물다섯 미혼모의 고백

15.01.05 15:12 | 김지영 기자쪽지보내기

<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입양가족을 대할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개의 극단적인 시선으로 갈린다. 존경하거나 이해할 수 없거나. 그러나 호기심 어린 시선만큼은 공통적이다. 사람들이 이런 이유는 입양을 잘 몰라서다. 나 역시 딸 소린이를 얻기 전에는 그랬다. 그래서 입양과 관련한 사람들을 가능한 많이 만나보기로 했다. 때문에 일당쟁이 목수 일을 접고 취재여행을 위해 짐을 꾸렸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기쁘게 자초한 일이다. 좋은 결실로 맺어진다면 그건 순전히 내 사랑하는 딸 소린이로부터 빚어진 것이다... 기자 말

▲ 거친 세상 속에서도 이 둘의 마주 잡은 손이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 김지영

어렵게 미혼모와의 인터뷰 약속을 잡은 건 제주 집을 떠나 온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떠나와 낯선 거리를 걷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살가움 없는 잠자리에서 뒤척였다. 게다가 옷가지와 취재 자료가 섞인 배낭에 카메라 가방을 이고지고 노트북 가방까지 따로 들고 다녀야 했다.

본래의 일상을 벗어나면 다른 일상은 가능한 한 이고지고 게다가 들고까지 다녀야 하니 어쨌든 불편하고 번거롭고 힘든 법이다. 물론 취재 여행 동안 사람들을 만나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모든 과정이 앞서 말한 불편과 어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버티는 것이다. 모종의 어떤, 희망 때문이다.

육지의 겨울은 분명 제주보다 더 춥고, 더 시리다. 내 살 냄새 밴 베개와 이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밥상에 둘러앉아 '따순 밥'을 함께 나눌 가족 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 시린 여행을 혼자 감수해야 한다.

1993년 5월에 채택, 1995년 5월에 발효된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의 취지는 아동의 '인권 보호'다. 현재 중국과 미국 등 96개국이 가입해 있다.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은 아동이 원래의 가정에서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일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다음으로 국내 입양이 우선 고려돼야 하며, 이도 어려울 경우 아동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해외 입양이 고려되고, 시설 보호는 마지막 방안이 돼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어린 엄마의 모성... 눈물겨웠다

23개월의 딸 채영이(가명)를 미혼모 시설에서 혼자 키우는 김유미(25, 가명)씨와 지난 11월 27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가혹하다, 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 젊은 엄마의 고통스러웠던 지난 3년을 마주하면서 나는 함께 한숨을 쉬고 함께 목이 메었다. 또 순전히 내가 남자라서 미안했다. 그리고 푸르디푸른 나이에 그 칠흑 같은 밤을 견뎌내고 제 몸으로 낳은, 이제는 존재의 상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딸과 함께 생존을 위해 바동거리는 어린 엄마의 눈물겨운 모성에 감동했다.
 
미혼모 시설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출산 전 임신부를 위한 시설과, 출산 후 입양이나 시설 등으로 아이를 보내지 않고 홀로 아이를 양육하기로 결정한 '미혼모자' 시설이 그것이다. 김유미씨의 경우 입양 목적으로 시설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입양 동의서 사인을 자기 손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어 양육을 결정했다.

경북의 산골 작은 읍내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직장을 찾아 대도시로 나온 유미씨가 그를 만난 건 삼 년 전 스물두 살 봄이었다. 고향도 같고, 나이도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그. 알고 지낸 지 한 달 만에 그와 연애라는 걸 시작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보통의 연인들처럼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곤 하는 그런 흔한 관계로 지냈다. 그리고 스물셋 봄. 원래 생리가 불규칙하긴 했지만 석 달을 건너뛰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임신 테스트를 해봤다. 선명한 두 줄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평소에 피임은 안 하셨어요?
"피임을 계속하다가 이게... 작은 실수 하나 때문에..."

- 하필이면 그날?
"네..."

그 실수가 어떤 실수인지까지는 묻지 않았다. 사실 내가 지금 열일곱 먹은 아들을 가진 날도 작은 실수(?)가 있었다. 실수 자체에 어떤 정의나 평가 따위를 굳이 붙일 이유는 없다.

그는 "헤어지자"는 말뿐이었다

▲ 어린 딸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어린 엄마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 김지영

-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그에게) 바로 전화를 했어요."

- 뭐라 그러던가요?
"우선 집에 와서 같이 얘기를 해보자. 우선 침착하게 같이 얘기를 해보자 했는데 결국에는 둘 다 지울 생각밖에 없더라고요. 저도 앞날이 있고 애 아빠도 앞날이 있으니까..."

- 서로 사랑하지 않았어요? 아이 아빠가 군대도 갔다 오고 직장도 다녔잖아요. 둘 다 직장생활도 하고 마음만 굳게 먹으면 결혼도 가능한 조건일 텐데...
"이게... 좋아하다가 조금씩 서로 바쁘다 보니 조금은 약간은 소원해진 시기였거든요. 연락도 잘 안 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고, 하루에 한 번 1, 2분 전화 통화만 하는 그런."

- 오래된 연인처럼?
"네. 그랬는데 애가 들어서 버리니까 둘 다 난감한... 서로 이야기를 하다 일 주일만 시간을 가져보자, 따로 생각을 해보자, 해서 저는 그 일 주일 동안 병원도 가보고 지울 생각만 계속했는데... 그게 못 지우겠더라고요.

(병원에선) 지울 수는 있는데 애가 너무 커버려서 벌써 조금이라도 하나하나 다 생긴 시기라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만약 지우려면 유도 분만으로 아이를 일단 낳고, 강제로 죽여야 한다고 했어요. 비용도 불법이다 보니 한 육백, 칠백만 원 정도 달라고 하고. 그 어마어마한 치료비가 겁도 나고..."

- 양쪽 집안에는 전혀 알리지 않았어요?
"네. 남자 집안도 전혀 모르게... 저의 부모님도 말씀드리기에는... 아빠가 저 고등학교 1학년 때 뇌출혈로 쓰러진 적이 있으세요. 또 쓰러지면 너무 위험하니까."

- 일 주일 동안 각자 생각한 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아이 아빠랑 만났는데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 밖에..."

- 어떻게 하자는 말도 없이? 
"네. 어떻게 하자라는 얘기도, 도움을 주겠다는 얘기도 없고 얘는 어떡할 거냐 그랬더니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었어요. 혼자 다 감당하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원망스럽고..."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 시설에서 출산교육을 하고 있는 모습 ⓒ 대한사회복지회 사랑샘

아이 아빠는 그렇게 한동안 연락을 끊어 버렸다. 배가 불러오면서 직장도 그만두고 오갈 데 없이 친구 집에 머물던 유미씨는 마침 고향 읍내에 따로 나와 살던 둘째 언니 집으로 가게 됐다.

"(언니가) 제 배를 보더니 '이건 뱃살이 아니라 임신한 배다'라며 경악했어요. '어떻게 할 거냐? 지워라' 그래요. '못 지운다. 유도 분만으로 낳아서 보는 앞에서 죽인다는데 그걸 어떻게 보고 있냐'고 울면서 말했어요."

유미씨는 언니와 상의 후 출산 뒤 입양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언니가 수소문한 미혼모 시설에 입소 신청을 했다. 이후 배가 만삭이 됐을 때 입소를 하게 되었다.

- 시설에 들어가니 어땠어요?
"입양을 보내기로 하고 들어갔어요. 들어가니까 저랑 똑같은 산모들이 많아 더 막막해지더라고요."

- 더 안정되진 않고요?
"네. 안정되지도 않고, 더 불안해지고... 밥 먹을 때마다 산모들이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거든요. 더 못 보겠더라고요. 그래서 밥도 먹으러 못 내려가고 울기만 바빴어요.

- 매일 그랬어요?
"네. 매일 그러니까 언니가 '안 되겠다. 그냥 퇴소하고 집에 며칠 있다가 병원에서 아이 낳고 시설에 들어가서 한 일 년 보내는 걸로 하자'했어요. 퇴소서도 다 쓰고 그 다음 날 아침 집으로 가는 날이었는데 그날 밤에 양수가 터진 거예요. 그때가 12월 24일 12시가 땡 하고 넘어갔을 때였거든요. 그 때 휴대폰을 보고 '아 크리스마스 이브네'하면서 딱 자려고 하는데 뭔가 터지려는 느낌인 거예요."

- 자연분만 하셨어요?
"네."

- 그 다음엔 어떻게 하셨어요?
"무작정 울었어요. 아기를 보니까 갑자기 그 때 그 생각이 났거든요. 사실은 제가... 아기 아빠랑 헤어지고 바로 약을 먹었어요. 너무 막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누구한테 알릴 수도 없고, 아이를 지울 수도 없고... 그래서 그 때 제 판단이 그냥 조용히 (아이와) 같이 죽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수면제를 먹고 같이 죽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뭔가 느낌이 들었는지 문을 따고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응급실로 실려갔어요.

병원에서 산모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 다급해졌죠. 혈압도 엄청 떨어지고 그랬으니까요. 그래도 다행히 둘 다 건강해졌는데 의사 선생님이 제가 자살하려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그 분 말씀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애가 이렇게 살려고 바동거리는 거니까 낳아서 악착같이 기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기를 낳자마자 그 생각이 난 거예요. 그 한 마디밖에 안 떠올랐어요. 악착같이 기르라는... 제가 퇴소하기 전날 양수가 터졌잖아요. 만약에 퇴소를 했으면 밖에서 추운 날씨에 집에서 낳을 수도 있었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예요. 애가 제 발목을 잡아준 거예요. 시설에 있어라, 하고요. 그래서 애를 안고 많이 울었어요."

- 처음엔 입양을 보내기로 했는데.
"법이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이젠 입양을 보내더라도 일 주일간 입양 숙려 기간을 보내야 해요.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있었죠. 아이 아빠와 연락하는 데 한 달 정도 시간이 걸렸어요."

- 아이 아빠는 뭐라 그래요?
"결국에는 낳았느냐는 식으로..."

아버지는 아직 아이를 보지 못하셨다

유미씨와 같은 고향 사람인 당시 스물네 살, 지금은 스물여섯 살의 이 비겁한 청년에 대한 나의 분노는 사실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던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스멀스멀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리 철딱서니 없는 청춘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이 지경에 있는 여자 친구와 제 아이를 이런 식으로 무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아이 아빠에게 이제는 법이 바뀌어 입양동의서를 아빠도 써야 한다, 와 줄 수 있겠냐 그랬더니 저 몰래 입양 동의서만 쓰고 다녀갔더라고요. 아이 얼굴 한 번 보지도 않고요. 이제 저만 사인하면 끝이었는데... 못 쓰겠더라고요. 채영이 낳고 한 달 정도 됐을 때예요.

못 보내겠더라고요. 만약 애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과연 제가 잘살 수 있을까... 내가 또 죽으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이고, 계속 생각이 아른아른댈 것 같아서... 보낸다는 심정으로 데리고 있어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내 눈에 없으면 얼마나..."

- 그래서 동의서 사인을 안 하시고 키우겠다고 얘기를 한 거네요?
"네. 하지만 언니 반대가 좀 심했어요. '입양을 보내는 게 맞다. 엄마 아빠 얼굴 어떻게 볼 거냐'고."

유미씨는 이미 양육을 결심했지만, 가족들은 입양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부모와 형제들은 유미씨의 미래만 걱정했을 뿐 유미씨가 낳은 딸 채영이의 미래는 존중하지 못했다.

- 가족들은 언제 알았어요?
"부모님한테는 정말 끝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사촌 동생이 알게 되면서 결국은 엄마에게 전화가 왔어요. 괜찮냐고. 그러면서 입양을 보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못 보낸다. 엄마도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듯 나도 애가 중요하다. 애를 보내면 내가 두 발 뻗고 살 수 있겠냐. 나는 결국 죽게 될 거다. 그런 딸을 원하면 입양을 보내겠다' 그랬죠. 엄마가 그럼 인연을 끊자, 하시더라고요. 하루 있다 다시 전화가 왔어요. 엄마 생각이 짧았다고, 대신 후회는 하지 마라 하시더라고요. 나중에는 엄마가 아빠에게도 말씀을 드렸어요. 하지만 아빠는 아직까지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으세요."

- 부모님이 아이를 한 번도 안 봤어요?
"엄마는 한 번 봤어요. 딱 한 번요. 아빠는 아직까지 보지 않으세요."

- 경제적으로 도움 주는 건 없으시고요?
"네. 아빠가 (재정) 관리를 다 하시니까."

- 채영이 낳고 계속 시설에만 계신 거네요? 언제까지 있을 수 있나요?
"내년까지예요. 최대 3년 동안 있을 수 있어요."

채영이가 돌을 넘기고 아빠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연락이라는 것이 술만 먹으면 전화를 해서는 어디서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를 물어보곤 하는 것이었다. 지난 10월 새벽에 갑자기 전화가 왔다. 미안하다고.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그런 판단밖에 못 내렸다고. 이제 같이 살면 채영이 키울 수 있겠냐는 말까지 했다.

12월 24일이 채영이 두 돌이니 나한테는 잘할 필요 없지만, 아직 얼굴 한 번 못 본 채영이를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뽀로로 하나 사서 보러 오라고 했다. 그렇게 약속했고, 올 줄 알았다. 이후 술이 아닌 맨정신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카톡을 보냈다. 혹시 전에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곧 답장이 왔다.

"미안하다. 기억이 안 난다."

내가 같은 남자인 것이 유미씨에게 미안했던 대목이다. 표현은 못했지만 어쩌면 이런 무책임한 사람과 안 살기를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술의 힘을 빌려 알량하게 남아 있던 양심마저 덜어내고 있었다.

▲ 미혼모시설에서 진행하는 임신부 요가. ⓒ 김지영

- 내년에는 채영이와 둘이 시설에서 나가 살아야 하잖아요. 어떤 계획이 있으세요?
"당장 채영이와 함께 살 집이 걱정이에요. 임대 주택도 조건은 되는데 워낙 밀려 있어서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예요. 지방 자치 단체에서 한부모나 저소득층에게 집을 저렴하게 주는 게 있긴 한데 그것도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나라에서 한부모라 해서 15만 원 주고, 시설에 있다고 5만 원 그리고 여기 복지 재단에서 매달 40만 원을 용돈으로 줘요. 적게나마 적금도 붓고 있지만, 여기서 나가 살 생각을 하면 걱정은 되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도 우선은 다른 어떤 생각보다 채영이를 최대한 열심히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제일 커요."

입양 대신 양육 결정한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세 살

유미씨가 채영이를 입양 보내지 않고 양육을 결정했던 나이가 스물세 살이다. 어쩌면 유미씨 전 인생에 가장 찬란해야 할 시절이었다. 그 시절 채영이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갔지만, 채영이로 인해 살아날 수 있었고 채영이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채영이를 키우면서 단 한 번도 후회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는 그녀였다.

너무 이른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지만, 도무지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막막함과 원망, 한탄과 더불어 주위의 차가운 시선까지 모두 지나가고 남은 자리에 감당하기 벅찬 사랑이 박혔다. 채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나는 다만, 내년 겨울이면 시설을 떠나 어쩌면 더 거칠고 편견 가득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두 모녀의 삶이 제발 따뜻하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언제든 돌아가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는, 그들의 살 냄새 배인 베개와 이불이 깔린 온전한 집이 존재하기를 더욱 희망한다. 그 안에서 소박한 밥상 앞에 앉아 둘이 함께 '따순 밥'을 먹고 있기를...

대한민국은 1993년 5월 만들어진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을 그로부터 꼬박 이십 년 후인 2013년 5월 24일 진영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의 서명으로 가입한 상태며, 2014년 현재 국회의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은 입양 미혼모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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