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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아만남

"백발 투사? 난 울보다"
[10만인리포트-김병기의 아만남] 백기완 선생과의 대거리 다섯 마당④

14.09.23 08:39 | 유성호 쪽지보내기|김병기쪽지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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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0만인클럽 '아름다운 만남'에서 "누구든지 혼자 살 수는 있지만, 짓밟히고 원통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백기완 선생은 이야기꾼이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체험담을 들려줬다. 그 이야기 속에는 구체적 인물이 등장했다. 탄탄한 예술적 뼈대도 갖추었다. 물론 밑바탕에 흐르는 정서는 '알통들의 것'이다. 그저 민중 정서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무지렁이로 살아왔고, 민중의 길에 앞장서 왔다. 백발 투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 난 울보였다

새김말(좌우명)이 뭐냐고 물으면, 말 꽤나 하고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은 동서양의 명사들이 남긴 명언을 되뇐다. 백 선생은 달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님이 들려준 말을 지금껏 가슴에 새겼단다.
 
배경은 구월산 밑이다. 백 선생은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상황은 이랬단다. 문을 차고 집에 들어와서 '엄마 밥 줘'라고 하니 고개만 끄덕이더란다. 솥을 여니 콩국 한 그릇과 강냉이 한 자루. 그걸 홀랑 먹고 배고프다고 어머니를 졸랐단다. 보리밥도 좋고 조밥도 좋고 밥 좀 먹어보자고. 

"그 때 우리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어. '야 기완아! 이웃들이 다 어렵게 사는데 네 배지(배)만 부르고 네 등만 따스고자 하면 너 인마, 키가 안 커!' 그 말이 내 일생을 길라 잡는 새김말이 돼버렸어. 몸뚱어리 키도 안 크지만 마음의 키도 안 큰다는 말이야. 이 말보다 더 위대한 말이 어디 있어!"

# 눈물은 힘이다


그는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붉히더니 급기야 나무 가죽처럼 깊게 패인 주름살 속으로 눈물을 주르륵~ 떨궜다. 거리에서 보아왔던 거침없는 투사 백기완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울보 백기완'.  

"맞아. 난 울보야. 울보라는 시도 지었어. 누가 시집을 내겠다고 해서 그 시도 끼워 넣으라고 줬더니 그걸 빼고 시집을 냈더라고. 왜 그랬냐고 물으니 '우리 선생님이 왜 울보냐'고 하더라고. 허, 참. 그런데 내가 울보인 까닭이 있어.

옛날에는 빌뱅이가 많았어. 거지를 빌뱅이라고 해. 어릴 때 빌뱅이 가족이 우리 집에 왔어. 밥을 달라고 한 게 아냐. 그때 부엌은 그냥 거적문이었어. 눈보라가 치면 부엌 바닥에 이만큼씩 쌓일 정도야. 빌뱅이 식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어린 꼬마들까지…. 12식구였어.

우리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어. 초가집 단칸방이지만 들어오라고 했는데 안 들어온다는 거야. 대신 실컷 울 수 있는 자리만 달라는 거야. 너무 춥고 배고파서 길거리에서 울 수 없다는 거야. 실컷 울어야 힘이 생길 것 같다는 거야. 정말로 부엌에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나더라고. 코흘리개들은 배고파서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할아버지는 늙은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냐고 울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금만 참으시라고 말하면서 우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우리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우시는 거야. 그 사람들보다 더 슬프게 말이지. 어린 내가 잠이 와? 나도 울었겠지. 그 때부터 나는 조그마한 일이든, 큰일이든 괴롭고 안타까우면 울어. 세월호 싸움에 매일 나가는 데 꼭 울고 와. 그래서 내 덧이름이 울보야. 산다는 게 우는 거 아냐? (탁자를 치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는 게 뭐야? 사람 죽이는 세상 아냐? 내가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어?

그리고 말이야, 옛날 눈보라 소리가 문풍지를 울리면 배고픈 게 더욱 무서웠어. 그래서 엄마, 나 힘도 없고 무서워, 그랬더니 골굿떼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야. 기완아, 옛부터 저 쌩쌩 눈보라 치는 소리는 골굿떼가 보내는 화살 소리라고 했어. 그 화살에 쪽지가 붙어 날아오는데 뭐라고 했느냐.

'너무나 배가 고파 배알이 꼴리고 주먹이 꼴리는 놈들아! 냉큼 따라 나서질 못할까. 그저 훨훨 따라 나서기만 하면 먼저 네놈들에게 한 번쯤 고기에 이팝은 실컷 먹여줄 터이니 얼핏 따라 나서거라!'

그래서 따라 나서면 정말로 고기에 이팝은 실컷 먹여주는 골굿떼(꼴리는 놈들이 굿하는 떼거리)가 있었어. 그 골굿떼가 온다고 해서 어머니 품에서 화살을 기다리며 밤새 울던 생각이 나."

# 어머니,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발로 차는 축구를 하고 있어요

황해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백 선생은 1946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다.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백 선생은 서울에 가서 중학교에 들어가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살았고 중학교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물론 백 선생은 그 뒤에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그가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육성 편지를 띄웠다.(☞ 백기완 선생의 육성편지)


"엄마, 내가 축구선수 되려고 서울엘 왔는데 축구선수는 못 됐어. 엄마, 미안해. 서울에 와보니 돈이 없으면 중학교도 못가고 중학교에 못가면 축구선수가 될 수가 없어. 그때부터 내가 뭐가 된 줄 알아? 돈이 없으면 중학교도 못 가고 돈이 없으면 재주를 살리지 못하는 이놈의 세상을 발로 차는 거, 그게 진짜 축구라고 생각했어. 엄마,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나도 늙었어. 하지만 난 이참 엄마를 찾아가고 있어. 상어 떼가 입을 벌리고 나를 쫓아와도 난 죽어라고 엄마 찾아가고 있어."

# 아, 백범... 아, 저런 분을 두고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백 선생을 '아만남'에 초청한 노성출 회원은 말했다. "백기완 선생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몇 해 전 TV에 나와서 한 말씀이 뼈에 각인돼 있다"고. 대신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일지를 보면 소중한 말씀이긴 한데 당시 상황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물었다. 백기완 선생이 본 백범 선생은 어떤 분인지? 

"백범은 한마디로, 요만한 일에도 모두를 내놓는 분이야. 말만 내놓고 이따금 눈물만 보이는 분이 아니라 조그만 일에도 몽땅 다 내놔. 1946년도 겨울일 거야. 마포 강가에서 내가 거적때기를 쓰고 누워있었어. 강바람의 차가움은 그냥 겪는 바람과 달라. 그야말로 칼날이지. 여기저기서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죽어갔어. 그런데 어디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

곁눈질을 하니 웬 할아버지가 거적때기를 들쳐보곤 울고, 또 거적때기를 들쳐보곤 또 울고. 그러다가 갑자기 입었던 두루마기를 벗어 누워있는 분의 얼굴까지 덮어주고 울면서 발길을 옮기더라고. 뭔가 와 닿는 게 있어서 그 분을 쫓아갔어. 알고 보니 백범 김구 선생이었어. 아, 저런 분을 두고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소년 백기완은 그 뒤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김구 선생을 찾아갔다. '아바이, 난 안 갈래'라고 버텼는데, 아버지는 "너의 할아버지와 친했던 분"이라면서 누구를 만나는지 말하지도 않고 무작정 끌고 갔단다. 신발도 없던 시절, 맨발로 끌려간 경교장. 김구 선생의 비서들이 가로막았다.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백범 할아버지 앞에 선 백기완 선생. 

# "3·1 만세 때 태극기 3천장 찍었다, 그 일로..."

"아버지가 나를 구월산 밑 백태주 어르신의 손자라고 말씀드렸어. 그랬더니 무릎 위에 앉혀놓고 우시는 거야. 그동안 잊었었는데 그때 우리 할아버지한테 쇠(소고기) 대접을 받은 것이 생각났다는 거야. 왜놈을 맨주먹으로 때려눕히고 감옥 갔다 온 뒤에 우리 집에 오셨을 때 할아버지가 대접을 한 거지. 난 배고프고 추워서 빨리 국밥이라도 사줬으면 했는데, 예쁘다고 쓰다듬기만 하더라고. 어린 마음에 기분이 나빴지."

이 말을 들으니 문득 백 선생의 집안이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지, 백 선생을 데리고 서울로 온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아버님은? 그땐 실업자지. 길거리에서 헤매고 자고 그랬지 뭐.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까지는 못했어도 뒤에서 도왔어. 3·1만세 싸움 때 우리 집에서만 태극기 3천장을 찍었대. 전국에서 기록이야. 전깃불도 없는 산골짝에서 3천장을 찍었다니까. 그 일로 할아버지가 잡혀가서 매를 맞았어.

아버지는 마침 서울에 와 있었던가? 잡혀가진 않았는데, 큰아버지는 3·1만세 때문에 3년 동안 옥에서 사시고, 계속된 독립운동으로 또 9년을 사셨어. 갈비 다 부러지고 어깨 부러지고 손가락 마디마디 부러지고, 그래도 큰아버지는 독립운동 내막을 털어놓지 않았대. 큰아버지가 나오니까 큰어머니는 도망을 갔어. 집안은 풍비박산 났지. 우리 집은 황성옛터 같은 기와집인데, 겉모습만 그랬어. 아침저녁으로 끼니가 간 데가 없어. 지붕에 쑥이 우거져서 구멍을 뚫었단 말이야. 안방에도 비가 줄줄 샜지. 그런 집에서 내가 태어났어."

# 따끔한 한 모금 준 찹쌀떡 장수

백 선생은 서울역 지게꾼 '가대기 형'을 스승이라고 말해왔다. 꽁꽁 얼어 죽은 '이' 열 마리를 보여주며 '이건 다 네 몸에서 나왔으니, 네가 갖고 가라'고 말했던 친구 살구를 두드려 팼을 때 말렸던 사람이다. 가대기 형은 그때 이렇게 말했단다.

"싸움은 턱없이 뺏어대는 놈, 일테면 있는 놈하고 붙었을 때 이기고 지고가 있는 거야. 인석아, 가진 것이라곤 '이'밖에 없는 것들끼리 붙어봐야 서로 코피만 터져."

이날 백 선생은 또 다른 스승을 소개했다.

"찹쌀떡~이라고 소리 지르며 돌아다닌 적이 있어. 그때 찹쌀떡 궤짝을 만들어주고 떡을 외상으로 받아줬던 형이 정씨야. 창신동에 있는 떡 도매집인데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았지. 그 형은 원금을 갚으라는 말도 안 했어.

눈보라칠 때 웬 꼬마가 '나, 찹쌀떡 두개 만요'라고 하더라고. 돈은 2~3일 뒤에 주겠다는 거야. 그렇게 몇 사람에게 외상을 주었더니 내 밑천이 많이 떨어졌어. 그때 강도를 만났어. 돈을 내놓으래. 못주겠다고 돈을 쥐고 있었는데, 그냥 때리는 거야. 나중에는 돌멩이로 내 손을 찍어. 나도 받았지 뭐. 그놈과 뒹굴다보니 나도 지치고 그놈도 지쳤어. '오늘은 네 돈을 못 빼앗겠다'고 말하는 강도와 헤어진 뒤 기운이 빠져서 창신동에 갔지.

형이 '따끔한 한 모금'을 먹여주더라고. 술이지 뭐. 배고픈 게 싹~ 없어지고 기운이 벌떡 나고 그래. 그때 형은 '네 목숨 하나 사는 건 살 수가 있어. 사람이 산다는 건 원통한 놈이 살 수 있어야 해 인마! (탁자를 내리치며) 너 같은 놈, 나 같은 놈! 알았어?' 그러더라고. 짓밟히고 원통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길은 지금도 어려워. 그게 진짜 사는 건데 말이야. 그 형님이 나를 가르쳐주고 떠난 거야. 그러다가 6·25 전쟁이 일어났지. 그 뒤로는 못 만났어."

[백기완 선생과의 대거리 다섯 마당①] "세월호 참사? 그건 정권의 참혹한 학살이야!"
[백기완 선생과의 대거리 다섯 마당②] "내가 싼 똥과 오줌을 핥으라고? 난 절망했다"
[백기완 선생과의 대거리 다섯 마당③] "세 번이나 반역한 건 박정희밖에 없을 거야"
[백기완 선생과의 대거리 다섯 마당⑤] "뿔로살이처럼 네 성깔대로 살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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