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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 리포트

김도균의 전쟁과 노래

관타나메라에 스며 있는 '쿠바의 눈물'
[곰PD의 전쟁과 노래] 호세 마르티와 관타나메라

14.07.20 16:12 | 김도균 기자쪽지보내기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 리포트'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곰 PD의 전쟁과 노래'는 김도균 사회부 기자가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나는 진실한 사람
야자수 무성한 고장 출신

죽기 전에 이 가슴에 맺힌 시를 노래하리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내 시는 화창한 초록색
내 시는 불타는 선홍색

내 시는 상처 입은 사슴
산 속 보금자리를 찾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 한 몸 바치리라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나는 바다보다 더 좋아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우리의 아리랑만큼이나 쿠바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 바로 관타나메라입니다. '관타나모의 농사꾼 아가씨'란 뜻을 담고 있는 이 곡은 쿠바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호세 마르티(1853.1.28 ~ 1895.5.19)가 지은 시 구절을 노래말로 삼은 곡입니다.

시인이자 사상가, 혁명가였던 호세 마르티는 우리의 김구 선생이나 윤동주 시인에 비견될만한 인물입니다. 쿠바의 관문 아바나 국제공항의 이름에서, 또 1페소짜리 지폐 앞면에서 우리는 마르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요, 사실 쿠바 곳곳의 광장이나 학교, 거리 이름에서 마르티란 이름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죠. 

스페인군에 입대한 학생 비난한 편지로 17살 때 투옥

▲ 쿠바의 혁명가이자 작가로 이름을 날린 호세 마르티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열정을 자신의 글과 삶을 통해 실천했습니다. ⓒ cubanet.org

툭 튀어나온 역삼각형 대머리에 카이저 수염을 기른 그의 모습에선 강인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듯합니다. 1853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말단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7명의 누이들 틈에서 만성적인 가난에 시달리고 보수적인 아버지와 갈등을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던 쿠바의 현실은 마르티로 하여금 자연스레 조국의 운명에 눈을 뜨게 했습니다. 마르티는 이미 16살 때 쿠바 독립을 고취하는 <자유 조국>과 같은 시들을 발표했습니다. 17살이 되던 해 스페인군에 입대한 학생을 비난한 편지가 공개되면서 마르티는 6년형을 받고 수감됩니다. 출옥한 후에는 유럽과 미국을 떠돌며 기자로, 혁명가로, 또 문필가로 활동하게 되죠.

문학 재능이 뛰어났던 마르티는 1882년 시집 <이스마엘리요>를 펴내고 1891년에는 <소박한 노래>를 출판했는데요, 관타나메라의 노랫말은 시집 <소박한 노래>에 수록되어 있던 시 세 편에서 한 구절씩 따온 것입니다.

마르티의 작품들은 스페인의 폭압 아래 잠들어 있던 쿠바인의 민족혼과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백인, 혼혈인, 흑인, 19세기말 유입된 중국인을 막론하고 인종과 계층을 초월해 새로운 쿠바 건설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마르티의 이러한 호소는 쿠바뿐 아니라 비슷한 역사를 지닌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지지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바람에 흩날려 끝없이 방황하는 나뭇잎이 아니라 밝고 따뜻한 햇볕과 촉촉한 빗방울과 부드러운 바람의 혜택을 누리는 튼튼한 나무줄기에 뿌리 내린 꽃송이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나무 혼자가 아니라 빽빽이 숲을 이뤄야만 힘센 거인을 이겨낼 수 있다." (호세 마르티 <우리 아메리카> 중)

마르티는 <우리 아메리카>란 수필에서 역사적, 혈연적, 문화적 공통점을 지닌 라틴아메리카가 단결해야만 앵글로색슨 아메리카의 야심을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우려한 앵글로색슨 아메리카의 위협은 미국이 북미 전역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이른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으로 이미 구체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4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던 쿠바에 대한 스페인의 식민 지배부터 끝장내야 했죠. 1892년 마르티는 뉴욕에서 쿠바혁명당을 결성하고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1894년 쿠바혁명당은 마르티의 지도 아래 스페인군을 몰아 낼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해 12월 쿠바 독립군과 각종 무기를 실은 배 3척이 플로리다를 떠나 쿠바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미국의 방해로 배 2척이 플로리다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마르티의 계획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1895년 1월 29일 쿠바 국내의 독립 세력들은 마르티의 군사원조 없이 독립전쟁의 깃발을 올리게 됩니다. 1868년 시작해 10년 동안 이어졌던 제1차 독립전쟁에 이은 제2차 독립전쟁이었죠. 2월 24일 쿠바 동부 바이레와 주변지역에서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불과 일주일 만에 쿠바인 2500명이 독립군대에 합류했습니다.

마르티 사후 독립전쟁 격화....물러난 스페인 자리에 들어선 미국

▲ 1898년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메인호가 원인모를 폭발로 침몰해 승조원 26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은 미국이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 faqs.org

이후 독립군은 쿠바 중남부를 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가게 되는데요, 마르티가 조국 쿠바에 돌아온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4월 11일, 마르티는 10여 명의 동지들과 바하마 군도의 이과나 섬을 출발해 관타나모 부근의 마리시 곶에 상륙했습니다. 하지만 5월 19일 도스 리오스 전투에서 그는 스페인군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생전 자신의 시에서 노래했듯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죠.

마르티가 죽은 후에도 쿠바 독립의 불꽃은 활활 타올랐습니다. 스페인군의 새 사령관으로 임명된 발레리아노 웨일레르는 독립군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농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한편, 1896년 10월 21일 농촌과 교외지역의 모든 주민들은 일주일 안에 스페인군에 입대해야한다는 징집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은 모두 반역자로 간주해 처벌하겠다는 무지막지한 내용이었죠.

하지만 웨일레르의 징집령 선포 이후에도 독립운동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고, 스페인군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마침내 1898년 2월 스페인 여왕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쿠바가 자치정권을 수립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이 쿠바 자치정권을 허용하기 직전인 1898년 1월 24일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해군 순양함 'USS 메인'을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전격 파견했습니다. 쿠바 거주 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죠. 그리고 그해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메인호가 원인모를 폭발로 침몰해 승조원 26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폭발 이틀 뒤 미국 일간지 <뉴욕저널>은 메인호의 폭발사고에 "스페인의 배신과 적의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나왔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이 보도한 증거 따윈 어디에도 없었지만, 연일 미국 언론은 메인호의 침몰이 스페인의 소행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날랐습니다(지난 1974년 메인호 침몰 원인에 대해 재조사를 실시했던 미 해군은 "외부에 설치된 기뢰가 아닌, 내부 폭발에 따른 침몰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한 달간 진행된 미국의 자체 진상조사 결과 군함 외부의 기뢰 폭발로 인한 침몰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해 4월 미 의회가 스페인에 대한 선전포고를 결의한데 이어,  6월 10일에는 미 해병대가 관타나모에 상륙했습니다. 전쟁에 지친 노쇠한  제국 스페인은 젊은 미국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개전 석 달만에 스페인은 두 손을 들어야 했죠.

1898년 12월 체결된 강화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필리핀과 괌, 푸에르토리코, 쿠바를 미국에 넘겨줘야 했습니다. 미국은 이 강화조약에 쿠바 대표단을 참석시키지 않았습니다. "쿠바는 아직 해방되지도 독립되지도 않았다"는 쿠바독립군 총사령관 고메스의 절규도 아랑곳없이 1899년 1월 1일자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를 미국에 양도했습니다.

3년간 미군정 통치...독립 후에도 미국이 재정·외교 감독 

▲ 관타나모 만은 쿠바의 동남쪽 끝에 톱니 자국처럼 육지쪽으로 움푹 들어간 만입니다. ⓒ 위키피디아

쿠바를 점령한 미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르티가 만든 쿠바혁명당을 해체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간의 미 군정(軍政)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1902년 5월 20일 쿠바는 형식상으로 독립할 수 있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쿠바의 재정·외교 문제를 감독할 권리를 보유했습니다. 쿠바 헌법에 반영된 이른바 '플랫 수정안'이 그 근거가 됐습니다.

플랫 수정안에 따르면 쿠바 정부는 '쿠바의 독립을 보존하고 개인의 생명과 재산, 자유를 보호하기에 적합한 정부를 유지하고자…(중략) 미국이 개입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데 동의'(제 3조)해야했던 것이죠. 이와 함께 이 수정안은 미 해군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쿠바 정부가 영토를 할양하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관타나모였습니다.

"쿠바 정부는 미국에 급탄 및 해군기지 설치 목적으로 (관타나모만의) 영토와 영해를 할양해준다"고 명시한 플랫 수정안 제 1조에 따라 관타나모만에는 미 해군기지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속협정문에 따라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의 임대료는 연 2000달러로 정해졌죠.

1934년 두 나라는 임대료를 한 해 4085달러로 인상하는 데 합의했지만 전체 면적이120㎢로 서울시 전체 면적(605.2 km²)의 1/6이 넘는 방대한 지역을 사용하는 대가치곤 터무니 없는 돈입니다. 그나마 혁명으로 친미정권이 축출된 1959년 이래로 쿠바 정부는 매년 미국 정부가 보내오는 임대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쿠바와 미국, 두 나라가 모두 동의해야만 협정을 파기할 수 있도록 하는 독소 조항이 삽입돼 미군이 영구 주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입니다.

'인권 사각지대' 관타나모 수용소...오바마, 폐지 약속 안 지켜

▲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안에 설치된 불법 수감시설 캠프 엑스레이는 세계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 미 해군

이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이래 다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죠. 이른바 '적 전투원'을 가둬놓은 수용소 때문이었습니다. '캠프 엑스레이(Camp-X)'로 알려진 이 구금시설에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사로잡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포로들이 수용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들이 전쟁 포로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은 국제법의 테두리 밖에서 이들을 처리하겠다는 선언까지 했습니다.

미국은 이들이 모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위험한 테러리스트들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물론 일부 테러리스트들도 포함돼 있었겠지만 치매를 앓는 70대 노인, 이웃과 사소한 다툼을 벌였던 목동, 심지어는 테러리스트들이 차는 시계로 알려진 카시오 시계를 차고 있다고 붙잡힌 과학 교사까지 이곳에 끌려와 있었던 겁니다. 수용소 안에서 갖가지 고문과 인권침해가 빈번히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폭로됐습니다.

지난 2006년 마이클 원터바텀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관타나모 가는 길'에는 중동출신의 영국 대학생 3명이 친구 결혼식 참석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다가 테러범으로 몰려 관타나모로 끌려간 어처구니없는 실화를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짐승처럼 좁은 우리에 감금돼 수시로 폭행과 고문을 당하면서 운동도, 독서도, 대화도 금지된 채 끔찍한 세월을 보내야했던 이들 불운한 청년들의 이야기는 세계인들에 적잖은 충격을 줬습니다.

결국 거센 비판 여론 속에 미국은 캠프 엑스레이를 폐쇄하고 관타나모 기지 내 '캠프 델타(Camp-D)'로 수감자들을 옮겼지만, 역시 초법적인 인권침해라는 지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008년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는 관타나모 기지 내 수용시설이 미국의 위상을 손상한다며 이를 폐지할 것을 공약했지만, 지금까지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3월 기준 관타나모에 수용된 테러 용의자는 모두 154명으로 대부분 예멘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의 처리문제는 여전히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평화롭고 낙천적인 노래 뒤에 쿠바 민중의 눈물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호세 마르티와 관타나모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관타나메라의 가사는 마르티의 시에서 따온 것이 맞지만,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라는 후렴구는 마르티의 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후렴구는 1940년대 쿠바의 유명한 유행어였습니다. 당시 유명가수 호세이토 페르난데스는 아바나 CMQ 방송에서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요, 이 프로그램에는 여러 가수들이 출연해서 그날그날 일어난 사건·사고를 노래로 전달하고,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출연자들이 합창으로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사람들은 관타나메라의 작곡자가 호세이토 페르난데스라고 알고 있지만, 정작 호세 마르티의 시에 곡을 붙였던 사람은 페르난데스가 아니라 1940년에서 1963년까지 쿠바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작곡가 훌리안 오르본이었습니다.

자신의 전 생애를 쿠바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마르티의 시에 관타나모가 더해진 것은 쿠바 역사 속에서 이 곳이 지닌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494년 4월 30일 콜럼버스가 처음 이 곳에 발을 디딘 이래 관타나모는 쿠바를 점령한 스페인 침략자의 상륙지로, 또 열강들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쿠바 사람들은 독립의 상징인 마르티와 함께 아직도 식민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관타나모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노래가 쿠바를 넘어 세계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미국 가수 덕분이었습니다. 전 세계가 핵전쟁의 공포를 절감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인 1963년, 포크 운동의 기수였던 피트 시거가 평화를 염원하며 이 노래를 미국인들에게 소개했던 것이죠. 피트 시거는 컬럼비아 레코드를 통해 이 노래를 취입했지만 아쉽게도 크게 히트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1966년 10월 남성 3인조 보컬 '샌드 파이퍼스(The Sandpipers)'가 이 노래를 다시 불러 앨범차트 9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던 것이죠.


아름답고 고운 화음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듬뿍 담고 있는 관타나메라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명곡 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롭고 낙천적인 이 노래 뒤에는 불평등 조약으로 자국 영토를 빼앗긴 쿠바 민중들의 눈물이 배여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및 자료
천샤오추에(2007) 쿠바, 잔혹의 역사 매혹의 문화. 서울: 북돋음
유재현(2006) 느린 희망. 서울: 그린비
아비바 촘스키(2014) 쿠바혁명사. 서울: 삼천리
에두아르도 갈레아노(1999) 수탈된 대지. 서울: 범우사
박병규(2009) 웹진 트랜스라틴.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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