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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실험, <밀양> 이창동 감독도 반했습니다”
[인터뷰] 15년 비정규직 돌봄교사 문경숙 회원

14.04.16 18:31 | 김혜승 기자쪽지보내기

▲ 10만인클럽 회원 문경숙씨(53). 인천약산초등학교 돌봄교실 1학년 김고운 학생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어주자 고운 양이 "아파요!"라며 장난스럽게 칭얼거리고 있다. ⓒ 김혜승

▲ 15년차 비정규직 돌봄교사인 10만인클럽 회원 문경숙씨와 학생 김고운 양이 함께 미소를 짓고 있다. ⓒ 김혜승

"어머! 정말 오셨네요? 시간이 늦어서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순식간에 커피와 소박한 롤케익이 눈 앞에 차려졌습니다. 늦은 오후, 생각치도 못한 환대. 긴장이 와르륵 풀렸습니다.

"지난 15년간 비정규직 돌봄교사로 근무했어요. 이곳이 제가 가꾼 공간이에요. 연말이 올 때마다 계약이 연장될 수 있을까 얼마나 초조했는지 몰라요. 그 사이 학교 터줏대감이 다 됐네요.(웃음)"

그, 문경숙(53). 긴 생머리에 다소곳하게 꽂은 하얀 삔. 소녀같은 인상에 또박또박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문씨는 얼마 전 '아름다운 만남' 코너 인터뷰 인물로 당차게 '자천'한 주인공입니다. 돌봄교사, 합창단, 뮤지컬 단원, 상담사, 시민기자, 비정규직 여성보호 캠페인... 받아 적기에도 벅찬 수많은 일들을 소화하기에 바쁜 문씨를 만나려고 지난 4일 인천 간석 삼거리 역에 있는 인천약산초등학교를 찾았습니다.

"15년 동안 동네 유명인 됐습니다"

"비정규직으로서 한 학교에 이렇게 오래 머무른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무한 기록일 거예요. 선생님들은 순환제 형식이라 학교를 떠나야 해요. 이번에 새로 부임하신 교장선생님도 예전에 평교사였다가 다시 돌아오셨는데요, 저를 보고는 반갑고 놀랍다고 말씀하더라고요. 학교 주변 시장 상인들도 '문경숙 선생님'하면 다 알아요.(웃음)"

그렇습니다. 그의 자부심. '최장기 비정규직 돌봄교사'라는 역사입니다. 그간 소소한 실험들도 많이 벌여 왔답니다. 돌봄교실 아이들은 넉넉지 못한 집안 환경 탓에 대부분 자존감이 낮다는데요. 문씨는 "아이들의 자신감을 키워 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 2009년 인천약산초등학교 돌봄교실 아이들의 연극 수업 모습. ⓒ 문경숙

그래서 시작한 돌봄반 전시회. 문씨가 직접 기획하고 실천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종이접기, 그림 그리기 등을 가리켜 손수 만들게 했고 그것을 작은 콘테이너 박스 안에 전시했습니다. 연말 정기 행사로 자리매김한 전시회는 어느덧 10년 째. 4년 전 부터는 작은 연극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무대 주인공으로 세웠습니다.

"이건 세상에 처음 공개하는 건데요. 아이들의 연극 영상을 보시고 '밀양'을 찍으셨던 이창동 감독님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이들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요. 비록 2차 오디션까지 갔다가 떨어졌지만, 영화 오디션까지 보게 된 사실만으로 정말 놀랍고 기뻤어요."

때로는 "남의 아이에게 정성을 쏟을 시간에 내 아이들은 집에 혼자 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내가 이 아이들에게 진심을 다한 만큼 우리 아이들이 되돌려 받을 것이고 스스로 잘 커갈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텼습니다"라고 하네요.

들국화 문경숙, 아이들에게 향기 전하다

▲ 10만인클럽 회원 문경숙씨. "저는 자식들이 저를 보며 열심히 살아갈 동기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자식들의 빨래를 할 때 정말 빡빡 빨아, 쫙쫙 펴서 널어요. 아이들이 그렇게 곧게 컸으면 합니다." ⓒ 김혜승

1999년 IMF 위기로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자 "9회말 2아웃에 서는 심정"으로 시작한 돌봄교사. 지난 15년의 사진 기록을 보여주며 신이난 문씨에게 "뿌듯하시죠?"라고 말을 붙였습니다. "그럼요"라던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습니다.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바쁘게 훔쳐내며 그는 말했습니다.

"사실 여전히 가진 건 없어요. 저는 화려한 장미보단, 흔한 들국화 같은 사람이죠. 짓밟힐 순간마다 '절대 안 꺾여'라며 버텼어요. 이른 나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사업이 망했어요. 결국 중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인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넥타이 공장에 취직했어요. 결혼 후 사업이 망해 쫓기듯 인천으로 도망와 막내 아이를 업고 다니며 돈을 벌었어요. 정말 숨 가쁘게 달려왔네요. 누군가에게 제 삶이 어둑해 보일 수 있지만 매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저는 떳떳하고 당당해요."

'흔한' 들국화 한 송이. 그 꽃이 품은 진한 향기가 아이들에게 전해지며, 지난 15년 동안 수많은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 아래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대학생이 된 한 제자는 그와 같은 길을 가겠다면서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다른 삶과 견줄 필요가 있을까요?

비정규직 '박봉'을 쪼개 매달 10만인클럽에 보내주는 이유도 그만의 삶의 방식과 일치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소외된 약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계속 보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끝으로 그는 기자에게 되물었습니다.

"꿈이 뭐지요?"

꿈?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자 그는 조명이 켜진 게시판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한 번이라도 자신의 꿈을 기억했으면 해서 저 게시판에는 늘 불을 켜두어요. 빛 하나를 달아주고 싶었어요. 저 역시도 꿈이 있어요. 60살 정년퇴임까지 이 일을 무사히 마치는 거예요. 그 뒤에는 카메라를 들고 배낭여행을 가서 글을 쓰고 싶어요. 그땐 여한이 없을 거예요."

▲ 창 바깥으로 어두움이 스며들기 시작한 인천약산초등학교 돌봄교실 안에는 유독 한 곳만이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아이들의 꿈이 적힌 게시판이었다. ⓒ 김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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