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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올해의 인물·네티즌
2000
올해의 인물
그가 나타나면 경찰들은 수군거렸다. "깡패신부가 나타났다"고.

2000년 한 해, 그는 뉴스의 한 복판에 있었다. 그를 만난 건 늘 뜨거운 아스팔트거나, 폭격의 굉음이 울리는 매향리, 또는 쓰레기차 위였다. 그의 뉴스는 땀에 찌들고 때론 피가 튀었다. 그래서 어둡고 무거운 뉴스였다. 하지만 그 뉴스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뉴스였다.

오마이뉴스는 문정현 신부의 인생 자체가 뉴스였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창간 첫 해 올해의 인물로 그를 선정했다.

2001
올해의 인물①
2010년 현재 당신은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 이문열을 알 것이다. 그런데, 부산의 한 사진관 주인 화덕헌씨를 아는가.

지난 2001년 거대 언론사의 위선을 까발린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에서 언론과 큰 관련이 없는 두명의 인물이 등장했으니, 한명은 이문열이었고, 다른 한명이 화덕헌이었다. 이씨가 언론개혁론자들을 지칭해 '홍위병'이라고 표현하자, 화씨는 이에 분노, 말 그대로 '일어섰다'. 인터넷을 통해 동참자들을 모았고, 그들이 '자진반납'한 이문열의 책 733권에 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을 마친 책들은 단돈 10원에 고물상에 넘겨졌다.

이 사건은 평범한 시민이 만들어낸 불씨가 어떻게 사회를 움직이는가를 보여줬다.

올해의 인물②
그의 요구는 너무 단순하고 지극히 명료했다. "우리도 버스를 타고 싶다."

2001년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과 장애인들은 수차례 시내버스를 점거했다. 그들은 쇠사슬로 온 몸을 묶었고, 그 때마다 전경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왔다. 그들은 그렇게 지하철 철로 아래에서, 서울역 천막에서, 일반버스 안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외쳤다. 단지 "장애인인 우리도 마음 놓고 버스를, 지하철을 타고 싶다"고.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10년,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2001년은 장애인 이동권에 있어서 역사적인 해로 기록되고 있다.

올해의 인물③
여대생의 몸으로 안해본 것이 없었다. 24시간 1인 릴레이 시위, 무기한 천막 농성, 단식...

학생, 교수, 교직원이 따로 없었다. 여기에 졸업생들도 큰 힘을 보탰다. 하지만 재단과 교육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회적인 무관심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2001년 10년 24일, 01학번 새내기를 포함한 20여명의 여학생들과 그 스승들은 '눈물의 삭발식'을 결행했다. 그들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굵은 눈물방울은 '무관심'이라는 벽에 균열을 일으켰다.

2001년 덕성여대 민주화 투쟁에서 이들이 보여준 모습은 분규를 겪고있는 모든 사립학교에 모범이자 희망으로 자리잡았다.

2002
올해의 인물
2002년 11월 30일 토요일. '예정시간'인 오후 6시를 30여분 앞둔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은 긴장감이 흘렀다.
10여분 뒤인 오후 5시40분경, 이미 40여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동지들'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2002년 겨울, 대한민국을 뒤흔든 '효순-미선 추모 촛불시위'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실 '효순-미선 추모 촛불시위'는 아무도 보증하지 못하는 실체가 불분명한 약속일 뿐이었다. 네티즌끼리 사이버상에서 오고간 말 뿐이어서, 실제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는 닥쳐봐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첫날인 11월 30일 1만여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일주일 뒤인 12월 7일엔 5만개의 촛불이 켜졌고, 다시 일주일 뒤인 14일엔 10만이 모여 광화문을 그야말로 '촛불의 바다'로 만들었다. 한 네티즌의 진심어린 제안이 수많은 네티즌을 오프라인으로 이끌어낸 순간이었다.

2002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여러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중 하나는, '네티즌들이 현실 세계로 뛰어든 원년'이라는 점이다. 이후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이 영향력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2002년 12월 31일 보도]
촛불시위 제안 네티즌 '앙마'
2003
올해의 인물
전북 부안 해창갯벌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약 305km. 어림잡아 12만 번의 걸음이 필요한 거리다. 이 먼 길을, 2003년 봄 문규현 신부는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걷고 또 걸었다. 그냥 걷기 만 한 게 아니라, 세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진심을 담은 절을 했다. 삼보일배. 뜨거운 아스팔트에서도, 비 내리는 흙길에서도, 4만번의 절을 하며 걷기를 65일째,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던 순간, 모든 성직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말 그대로 초인적인 이 고행은 잊혀졌던 새만금 간척사업을 다시 사회적인 의제로 끌어올렸다. 삼보일배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문 신부는 부안군이 핵폐기장 유치를 신청하면서 다시 핵폐기장 반대 투쟁에 나섰다. 그가 있던 부안 성당은 '반핵의 성지'로 떠올랐다.
이렇게 문규현 신부는 2003년을 뜨겁게 달궜던 '새만금'과 '부안 사태'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생명'과 '평화'였고, 그 활동은 2010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4
올해의 인물
2004년 12월, 사상 초유의 단식농성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300명이 곡기를 끊기 시작하더니, 일주일 뒤엔 560명으로 불어났고, 급기야 12월 20일 1000명을 넘어섰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이들이 외친 것은 단 한가지. "국가보안법 폐지, 이젠 끝장을 보겠다."

하지만 이들의 꿈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당시 여야가 격렬히 부딪혔던 국보법 문제는 결국 끝장을 보지 못했고, 2010년 현재도 국가보안법은 엄연히 살아서 존재한다. 대체 몇 명이 더 단식을 해야할까.

올해의 네티즌
"그래도 너흰 아니야. 제발 너흰 나라 걱정 좀 하지마. 너희만 삥 안 뜯어도 경제는 살아날거야. XXXX 너희들은 아니야."

2004년 3월,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와 이어진 국민적 저항은 무명의 작곡가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윤민석씨. 그가 직접 만든 민중가요 '너흰 아니야'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80년대 민중가요를 함께 만들었던 동료들이 하나둘 현장을 떠났지만, 윤씨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인터넷 사이트 송앤라이프(www.songnlife.com)를 만들어 노래를 보급하는 등 꾸준히 현장을 지켰다.

<오마이뉴스>의 첫번째 '올해의 네티즌' 수상자로 윤씨가 선정된 지 4년 뒤인 2008년 5월, 역시 그가 만든 곡 '헌법 제1조'는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서 여중생들에게 가장 많이 불리워진다.

2005
올해의 인물
노충국과 그의 아버지 노춘석. 이들은 특별할 것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 이래 한번도 도전받지 않았던, "병사들은 아파도 무조건 견뎌야 한다"는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전역 2주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하던 노충국씨는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이땅의 보통 사람들에게 남겨준 선물은 무척 크다. 노춘석씨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금전적 보상 대신, 허술한 군대 의료체계 개선을 요구했다. 여론에 밀린 국방부는 결국 "군 의료체계를 개선하겠다"고 장관이 약속하기에 이른다.

노충국과 노춘석. 놀랄만한 사건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이제 이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군대에 있거나 갈 예정인 젊은이들, 또 이들을 둔 부모 형제들은 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큰 빚이 있다.

올해의 네티즌
우상을 깬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우상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믿고 있을 때 더더욱 그렇다.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진위 논란은 2005년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애국주의 광풍 속에서도 묵묵히 황 교수팀에 문제제기를 해왔던 이들이 있었다. 포스텍(포항공대)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bric.postech.ac.kr)에 모인 젊은 과학도들. 과학계의 절대 카리스마와 빗발치는 여론의 압박에 대항해 이들이 가진 무기는 '기본'이었다. "과학은 사실을 갖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는 기본 명제에 충실한 이들은 학문적인 양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황 교수팀의 연구에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황 교수팀의 논문 성과를 잃었지만, 한국 과학의 미래를 열어갈 젊은 과학도들을 얻었다.

[2005년 12월 20일 보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힌 두 젊음
2006
올해의 인물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2003년 4월부터 햇수로만 4년째. 젊은 사람들이 나선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60~70대 노인들이었다.

급기야 2006년 5월 국방부와 경찰 병력이 강제집행을 위해 대추분교에 진입할 때 이들은 가장 앞장서서 싸우고 또 싸웠다. 대관절 미군기지가 무엇이길래,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투사'로 만들었을까.

2006년 말 "사는 재미가 무엇이냐"는 오마이뉴스 기자의 질문에 당시 72세 방승률 할아버지는 "고향을 지키는 게 재미"라고 말했다. "7살짜리 손자가 팔뚝질 등 경찰과 싸우는 주민들 모습을 그대로 따라해 속상하다. 하지만, 불안하지만, 오랫동안 같이 산 사람들과 마을을 지키는 게 재미있다."

오마이뉴스의 2006년 '올해의 인물'은 미군기지 이전 계획에 맞서 '마을 사수 투쟁'을 벌인 경기도 평택 대추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돌아갔다.

[2006년 12월 22일 보도]
2006년 대추리 주민들의 희로애락
2007
올해의 인물
사건의 시작은 2006년 6월 16일 <시사저널> 편집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 이학수 부회장 관련 2쪽짜리 기사 하나가 금창태 사장에 의해 무단으로 삭제됐다. 이후 이어지는 편집국장의 사표, 일선 기자들의 반발, 연이은 해고와 징계, 전면 총파업, 수많은 협상과 눈물... 하지만 기자들은 끝내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참언론실천기자단을 조직하고 결국 새 시사주간지 창간으로 이어졌다. 문정우 당시 편집자은 말했다.

"윤전기에서 나온 <시사IN> 창간호를 손에 쥐었을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구나'라는 놀라운 느낌을 받았어요. 그날 집에서 목욕을 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상의 흐름이 돈 중심이고, 대통령도 그런 기준으로 뽑지 않았습니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나라 경제 권력의 최선두에 있는 삼성과 척을 두고 나온 이 기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성원을 보내주다니... 세상의 큰 주류와는 다른, 이런 것도 하나의 흐름이고,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돈이 최고라지만, 누군가는 그 돈 앞에서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맞는 것을 맞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2008
올해의 인물
모두 실의에 빠져있을 때, 길을 몰라 힘들어 할 때, 모르는 척 외면하거나 부정할 때, 대한민국에는 여중고생들이 있었다.

2008년 5월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파동의 한가운데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신선함과 감동' 그 자체였다. 그들은 최고 권력자를 향해 "네 마음대로 하라고 국민이 뽑아준 게 아니다"라고 외칠 줄 알았고, '전교조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이라는 말에 "우리의 배후는 바로 당신"이라고 받아칠 줄 알았다. 때로는 "살고 싶다"고 절규했고, 종종 "같이 살자"고 외쳤다.

그들로 인해 바야흐로 새로운 집회·시위의 시대가 열였다. 더 이상 힘들고 우울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그 무엇이었다. 그러면서도 말이 진실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있으면 호소력이 생기는 법. 그들의 외침은 세대를 잇는 노둣돌이 됐고, 험난한 물줄기를 건너게 해주는 다리가 됐다. 그래서 1만 촛불이 2만이 됐고, 10만이 100만이 됐다.

고맙다, 촛불소녀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줘서.

올해의 네티즌
2008년 대한민국에는 두명의 '경제수장'이 있었으니, 한명은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요, 다른 한명은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장관의 말에는 콧방귀를 꼈고, 반면 미네르바의 말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학습하기에 바빴다. '경제의 반은 심리'라는데, 이래서야 어디 국가의 경제정책이 제대로 운영되겠는가. 급기야 국가정보원과 사법당국까지 나서 미네르바 색출작전에 돌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까? 한 언론사 논설위원의 칼럼처럼 '미네르바를 키운 건 8할이 이명박 정권'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기록하거니와, 2008년 대한민국에는 경제난국에 강림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있었으니, 갈 길 잃고 불안한 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2009
올해의 인물
2009년 1월 20일 터진 용산 참사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2월 초, 시신을 냉동고에 넣어둔 채 장례도 치르지 못하던 유가족들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결코 반가워하지 않았다.

용산 참사가 일찌감치 해결됐다면, 아니 애초부터 그날 남일당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지 않았다면, 유가족들은 이름없는 철거민으로 살았을 것이다. 아니, 정부가 세입자 생존권을 보장하는 재개발 정책을 추진했다면, 이들은 철거민도 아닌 평범한 식당 사장님이었을 것이다.

왜 유독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더욱 가혹할까. 좀 같이 살아갈 수 없을까. 이렇게 밖에 재개발이 진행될 수는 없는가. 대체 이 사회는 왜... 2009년을 관통한 용산 참사는 사회 곳곳에서 진행된 '불도저 대한민국'의 우울한 단면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결국 2009년 12월 30일 정운찬 국무총리가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유감을 뜻을 표명함으로써 일단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