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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슨 소린가 하실 분이 많을 줄 안다. 생리를 하는 남자…? 물론 그건 아니다. 그러니 거두절미하고 표제시인 '생리대 사회학'부터 읽어 보자.

오래전에 폐경 선언을 한 아내와
생리대를 사러 동네 마트에 다녀왔다
전립선암 수술 후
보송보송한 여성 전용 생리대를
요실금 팬티 대용으로 착용한 지도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남자가 생리대를 차고 다닌다고
아내는 나를 놀리면서도
속내로는 짠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여자니까 당연한 일이지 했던 거다
피를 뚝뚝 흘려도 남의 일이었던 거다
아내가 반평생을 고생했으니
나는 반의반이라도 해야지
그러면 공평하겠다, 싶다 


사태는 명백하다. 시인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 어쩔 수가 없어 '요실금 대용'으로 생리대를 차게 된 것이다. 딱해도 이만저만 딱한 처지가 된 게 아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시인은 전립선암이라는 병마의 공세에도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나 기저귀 대신 생리대를 차고 다니는 남자요, 담담하게 말하고 있으니. 그도 생리는 '여자니까 당연한 일'로서 그저 '남의 일'이었던 것이지만 생리대를 차게 됨으로써 비로소, 타자로서 아내-여자들의 '반평생'의 '고생'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결국 자신이 생리대를 차게 된 건 딴은 '공평'한 거라고 말이다.

생각건대 인간은 경험주의자다. 철학사에서 다루는 관념론 대 경험론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무엇이든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그것을 실감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공감의 능력이란 것도 그 바탕엔 경험과 실감이 겹겹이 깔려 있을 터다.

'조금' 작아진 시인이 우리게 전하고픈 진실은 무엇?

《생리대 사회학》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경험이 선사하는 실감의 진실, 혹은 진실의 실감이 바로 전해오는 시편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시편들은 힘겨운 병마가 오히려 시인의 오감과 영혼을 세상 만물을 향해 활짝 열어놓게 했음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4월, 조금 이른 아침
간밤에 춘설이 내렸나
산길에 눈이 조금 쌓여 있다
바람 조금 차갑고
햇살 조금 따뜻하다
차가운 것 조금
따뜻한 것 조금
서로를 조금씩 내어놓고
흥정을 붙이더니
어르고 달래더니
이내 알맞게 섞인다
그 사이
초록, 조금 짙어진다
                                          - <조금> 전문

그렇다. '조금'……! 누군가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라고도 했거니와 이 '조금'의 진실이야말로 실감의 진실과 통한다. 이를테면 1000억의 재산은 하나의 관념이고 허튼 욕망덩어리라 하겠지만 파지 줍는 꼬부랑 할머니의 5천원은 생명을 실감케 하는 무엇이다. 요컨대《생리대 사회학》의 첫 시로서 <조금>, 그러니까 이 '조금'의 사상은 병마로 하여 어쩌면 '조금' 작아진 시인이 정녕 우리에게 가만가만 전해주고자 한 삶의 진실로 다가온다.

'돌 위에/ 돌 하나 놓여 있'는 돌탑을 바라보다 그 위에 '돌 하나를 더 얹으려다,' 마는 행위도 그렇고 (<탑>), '수천수만의 이파리가 달려' 있는 나무 앞에서 '오늘 처음/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파리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며 참회를 하는(<참회록>) 장면도 그렇다. 자연이나 나무는 거대하지만 '이파리 하나하나'는 조그만 하기에 실감도 가고 진실도 느껴진다. <눈 가난하게 내린 날에는>엔 이런 구절도 있다.

눈 가난하게 내린 날에도
산에 가보면 눈이 푸지게 쌓여 있다
먼 친척 어른이라도 오신 날처럼
가난한 살림에도 희디흰 쌀밥이
고봉밥으로 차려져 있다

눈이 '가난하게' 내렸다는 건 아주 작게 왔다는 뜻이다. 고봉밥은 '희디흰'- 환한 고봉밥의 천국을 볼 수 없다. 그건 가난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성서는 말하기도 했다.) '절정이 지나 찾아간/ 가을 선암사'에서 '눈을 압도하는/ 온 가을의 무성함 대신/ 지워진 풍경 너머로/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고 노래(<다 늦을 무렵 찾아간>)할 수 있었던 것도 시인의 마음이 '가난'과 '조금'의 진실 쪽으로 가 있기 때문이다.

'손님'처럼 찾아온 암이란 병마
'쓸쓸할수록 다정해지자고, 같이 다정해지자고'......


그러기에 문득 찾아온 암이란 놈조차 그에겐, 이전 시집 《별에 쏘이다》(2009)》의 첫 시 <손님>에서 노래했다시피 '손님처럼 찾아온' 것일 뿐이어서 그는 다만 '잘 대접하여 보내'주고자 할 따름이다.

암 진단을 받고 나니
암일까 아닐까
가슴 조이던 시간들
이제는 안녕이다
좋은 일이다

나이 들면서
자리 잡기 시작한 조무래기 병들
명함도 못 내밀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다

가을을 사랑하는 일이
누구를 해치는 일은 아니겠으나
이렇게 마냥 행복해도 되는 건지
늘 미안했는데
좋은 일이다

걱정 근심 없이 살아온
내 몸에서도
암이라는 것이 자랐나 보다
세상 걱정도 하며 살라는 건지
좋은 일이다

암 진단을 받고 보니
많은 것들이 달라 보인다
세상은 더 아름답고
사랑할 것들이 더 많아졌다
좋은 일이다
                                              -<좋은 일> 전문

'암 진단을 받고나니' 되레 '좋은 일'이, '사랑할 것들이 더 많아졌다'는 시인의 말은 역설이면서 또한 직설이다. 죽음이란 거울 앞에 서기도 했을 시인은 불타는 집과도 같다는 사바세계가 바로 불국토-천국의 정원임을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 그는 탈속한, 구름 위의 도인이 되고 만 것인가? 그건 아니다. 가끔 생리대를 차는, '사랑할 것들이 더 많아'진 그는 오늘도 지상의 시인으로 살기를 소망한다.

'죽는다는 것은/ 어쩌면 통쾌한 일이다'라면서도 '한 가지 욕심'으로서 '내게 남아 있는/ 아니 남아 있을 지도 모를/ 천 번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천 번의 산책>) 시인, 그러기에 한없이 쓸쓸해 질 때도 있는 것이지만 '제 안의 쓸쓸함으로 다정해진 억새가/ 황량한 겨울 들판에서 웃고 있다'며 우리를 향해 '세상 쓸쓸할수록 다정해지자고/ 같이 다정해지자고'(<억새>) 언제까지나 그렇게 속삭여 줄 수 있는 시인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