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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

영화에 등장하는 기택의 가족은 가난하다. 속된 말로 찢어지게 가난하다. 그들이 입는 옷도 찢어져있고, 집도 갈라져있고, 그들은 세상과도 철저히 분리되어서 찢어져있다. 우연한 기회에 기택의 아들의 친구가 부자집인 동익의 딸의 과외를 하게 되고, 이것을 신호탄으로 해서 온 가족이 동익의 집에 취직을 한다. 아빠인 기택은 운전기사로, 엄마는 가정부로, 아들은 영어과외 선생, 딸은 미술치료사로 취직한다. 이 과정에서 이 집에 원래 일하던 직원들은 기택 가족의 모종의 음모로 모두 해고된다.

모두가 실업자이던 가족은 모두 일정한 수익을 가지게 되고 한 동안 행복을 누린다. 고기도 구워먹고, 술도 마시면서 취직을 기쁨을 만끽한다. 하지만 기택 가족의 음모로 해고된 전직 가정부가 비오는 날 집에 찾아오게 되고 동익의 집에 있는 숨겨진 지하실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아수라장이 된다.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서로를 죽여버리고 입막음을 하고자 하고, 모종의 사건들이 겹쳐져서 전직 가정부는 숨지고 그의 남편이 기택의 가족을 죽이려고 덤벼든다. 기택의 딸은 사망하고, 기택은 동익을 칼로 찔러 죽이고 다시 집의 지하실에 들어가서 살아간다.
 
기생충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가난의 체험에서 비롯되는 '역겨움'

역겹다는 표현은 웬만하면 잘 쓰지 않는다. 이 단어는 그 자체로 '혐오'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게 역겹다고 하는 것은 발화자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모욕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난 이영화가 역겨웠다. 영화를 잘 만들지 못해서 역겨운 것이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는 '가난'에 대한 묘사가 역겨울 정도로 정교했다.

영화에서 기택의 아들은 이런 이유로 친구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간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장면이 계속 마음에 떠올랐다. 그리고 친구의 소개로 동익의 딸 영어과외 면접을 보러가는 아들에게 기택이 했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아들아 넌 대단하구나. 계획이 있구나. 자랑스럽구나." 지금은 의처증, 과대망상 등의 정신질환으로 이혼하고 얼굴도 안보는 아빠가 어릴적부터 맨날 하던 말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나에게 "자랑스러운 내아들." "넌 큰 사람이 되어야한다." "아빠처럼 살지 말아라"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죽도록 듣기 싫었다. 돈 한푼 못벌어와서 나를 가난하게 만든 아빠가 싫었고, 누워서 맨날 티비나 보다가 갑자기 나한테 아빠노릇을 하려고 드는 것이 싫었다.

이후에 기택의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은 나의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과 거의 비슷했다. 우리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해운대에 있는 아주 큰 고깃집에서 일했다. 우리 가족이 원래 살던 집은 재개발로 강제로 허물어졌고, 세입자였던 우리 가족은 이주금 한푼도 못받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러던 중에 고깃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다 무너져가는 한옥집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일 없이 집에있던 아빠는 야간에 고깃집 경비를 섰고, 우리 엄마는 고깃집에서 서빙을 했다. 나중에는 대학을 그만둔 우리동생도 돈을 벌기 위해서 고깃집에서 일했다. 나도 아빠가 아픈 날이면 좁디좁은 경비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영화의 표현에 따르자면 우리가족은 그 고깃집의 기생충이었다. 기택의 가족이 동익 가족이 여행간날에 집에서 몰래 파티를 벌이는 것처럼 우리 가족도 고깃집이 쉬는 날에 몰래 숨어들어서 고깃집에 남아있는 숯불에 고기를 구워먹었다.
영화 기생충 동익 역할의 이선균 배우ⓒ 네이버 영화
 
수직적인 계급을 드러내는 장치 '냄새'와 '폭우'

영화에서 동익 가족들은 기택 가족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한다. 기택의 딸은 '반지하냄새'라고 부른다. 나는 이 냄새가 뭔지 안다. 집이 오래되거나 지하나 반지하여서 햇빛이 들지 않고 습기를 막아주지 못하면 집 안에 계속 습기가 쌓인다. 벽지에 곰팡이가 피고, 옷에도 곰팡이가 핀다. 기택 가족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이 곰팡이 냄새다. 이 냄새는 가난한 사람들의 몸에서만 난다. 멀쩡한 아파트에 살거나 집에 사는 아이들의 옷에서는 이 냄새가 나지 않는다. 우리집에서는 계속 이 냄새가 났고, 나의 몸에서도 계속 이 냄새가 났다. 그래서 동익이 이 냄새에 역겨운 표정을 짓거나, 동익의 아내가 냄새를 견디다 못해 문을 여는 장면에서 화가 났다. 나에게 역겨움을 표하는 것 같았다.

기생하는 삶이 온 몸에 배여있는 것이 바로 냄새다. 영화에서 이 감각적인 계급격차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위한 수단으로 '폭우'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파국이 일어나는 것은 '폭우'때문이다. 폭우로 인해서 동익 가족들의 여행이 취소 되어서 빨리 집에 돌아오게 되었고, 그 날 하필이면 전직 집사가 집에 들어와서 지하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높디 높은 곳에 있던 동진의 집에서 내려와 수직으로 뻗어진 계단을 내려와서 그 밑에 있는 집에 도착한다. 이는 기택가족과 동진가족의 계급적 차이를 계단과 수직감이라는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서 보여준다. 문을 열어놓고 나왔던 기택의 집은 폭우로 잠겨서 더 이상 거주할 수 없게 된다. 반지하이긴 했지만 집이 있으므로 해서 기택의 가족은 독립적인 삶을 영위했지만 그 최후의 보루가 폭우 속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폭우는 냄새를 극대화한다. 해가 쨍쨍하고 습기가 없는 날에는 어느 집에 살건 냄새가 크게 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작은 차이로 민감한 사람들만 느낀다. 동익이 이야기하는 '지하철 타는 사람들'과 전혀 마주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느껴지는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터전이 폭우와 만나는 순간 냄새는 비로소 폭팔한다. 반지하 냄새는 진동을 할 것이고, 씻을 수 없어서 그야말로 썩은 냄새가 난다. 원래 냄새를 느끼지 못하던 동익의 아내도 폭우 이후에 기택의 몸에서 냄새를 느끼게 되고 창문을 연다.

이것과 관련해서 흥미로웠던 점은 냄새를 맡는 주체는 오로지 동익의 가족들이다. 처음에는 동익이 냄새를 맡고, 동익의 아들이 기택 가족의 냄새가 비슷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동익의 아내가 기택의 냄새를 맡는다. 기택의 가족들은 동익의 가족들이 냄새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자신들의 냄새에 대해서 의심한다. 하지만 그들은 기택의 딸을 제외하고서는 자신의 냄새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한다. 이런면에서 기택의 딸은 계급이동이 가능한 인물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녀만이 윗계급과 아랫계급의 차이를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 가족은 그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냄새를 맡는, 즉 감각하는 주체가 오로지 동익의 가족들이기 때문에 기택의 가족들은 동익 가족의 냄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들은 감각할 수 없다. 이를 통해서 냄새가 인간의 체향으로 표현되는 '개성'따위의 것이 아니라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계급을 표현하는 도구임을 알 수 있다. 일상어처럼 키가 큰 사람들이 작은 사람들에게 '아랫쪽 공기는 어때, 위쪽은 아주 맑아'라고 하는 상투어의 재현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곳에 따라서 공기는 다르고, 그 공기의 차이가 냄새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질적인 공기들이 만날 때 그것을 구분하는 자는 윗 공기와 아랫공기를 모두 마실 수 있는 키가 큰 사람이지, 윗 공기를 맡을 수 없는 아랫사람이 아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의 모습ⓒ 네이버 영화
 
출구없는 자본과 노동의 기생

영화의 큰 주제는 '계급'이고 그 속의 소재는 '냄새'다. 그리고 제목은 '기생충'이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벌레가 있지만 기생충은 그 중에서도 기생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해충이다. 숙주의 몸 속에 알을 낳거나, 숙주의 뇌를 지배하는 등의 방법으로 생존을 해나가는 벌레들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맥락에서는 꼭 벌레가 아니더라도 기생하여 존재하는 생물을 비하적으로 기생충이라고 부른다. 벌레라는 것 자체가 가장 미천한 미물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제목이 기생충이니 만큼 감독은 영화를 기획하면서 숙주를 설정하고, 기생충을 설정했을 것이다. 기생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가족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동익 가족의 재산을 빨아먹는 기택가족이 기생충이다. 이들이 기생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숙주가 될 것이다. 표면상으로 보면 기택 가족이 기생하는 대상은 동익이다. 동익에게서 월급을 받고, 동익의 명의로 된 재산에서 그 월급은 나온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동익이 죽고 그 가족이 떠나고 나서도 기택은 여전히 그 지하실에서 기생하며 살아간다. 동익이 없는 상태에서 기생을 이어나가는 기택의 모습을 보면 기택이 기생하고 있었던 대상은 동익이라는 인격이 아니라 그의 재산이나 토지 따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나가서 생각하면 그 집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거래되고 그 집을 움직이기 위해서 또 다른 노동자가 필요한 그 시스템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을 '자본주의'라고 칭해보면 영화의 시각에 따르면 자본주의 세계의 대안은 없다. 기생충은 숙주가 죽으면 더 이상의 영양공급 수단을 잃어서 자신도 사망한다. 기택은 동익의 가족이 사라진 순간 모두 해고되어서 다시 가난한 반지하로 돌아갔다. 동익의 태도에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고 동익을 죽인 기택은 반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숙주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구해주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구해주겠다는 생각도 결국은 자신이 새로운 숙주가되어서 기생충은 아버지를 구해주겠다는 발상이다. 모든 것은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기택의 아들이 하는 공상마저도 이 시스템의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스템인 자본주의가 우리의 헤게모니를 얼마나 강하게 잡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헤게모니는 결국 그 사회 구성원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냉소적인 상상력 속에서 우리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어딘가에 기생하고 있고, 그 숙주는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이며 그 시스템이 무너지면 우리의 삶도 함께 무너진다. 사실, 지상과 지하의 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지하에 있는 공간은 지상이 완전히 붕괴하면 함께 붕괴한다. 기생충들이 끊임없이 거주하는 동익의 집 지하실은 기생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기생의 본질은 사실 숙주의 본질과 동일하다. 숙주의 본질이 한 개체인 인간이 아니라 그 개체가 '소유'하고 있는 자본인 것처럼 기생의 본질은 그 자본을 지탱하는 '노동'이다. 집을 가꾸고, 관리하고, 숙주들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맑스주의에서는 결국 노동이 집을 지탱하고 있으니, 노동이 멈추거나 노동이 반란을 일으키면 집으로 표상되는 자본의 사회도 무너지고 다른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 믿었다. 물론, 이렇게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은 노동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그렇게 때문에 노동은 근원적이고 나아가서는 신성한 것으로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노동 역시 자본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으며, 이들은 더 이상 반란하거나 멈추는 저항적인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그리 도덕적이지도 않고, 서로를 속이며 죽이는 치킨게임을 한다. 전직 집사 가족과 현직 집사 가족의 싸움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단결하거나 자본가에게 대항하여 연대하지 않는다. 서로 생존하기 위한 궁리만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다른 노동을 치워버리기 까지한다. 이 속에서 노동은 신성하지 않으며 오히려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다. 자본은 자본가의 손을 떠나서도 존재하지만 노동은 노동자의 몸에서 떨어질 수 없다. 노동은 노동자의 신체적인 능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세상에 1명씩만 존재할 때의 이야기이지 넘쳐나는 것이 자본이고 쉴세 없이 양산되는 것이 노동자인 세상에서는 노동은 노동자의 몸에서 떨어져서 존재한다. 언제든지 누구든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집의 지하실은 실상 노동자의 공간, 노동하는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공간은 바뀌었고, 아마 앞으로도 바뀔 것이다. 결국 영원한 것은 자본인 이 집자체이고 그 속에 존재하는 노동은 영원하지 않다. 노동은 신성하거나 온전하지 않다. 충분히 대체 가능하고 어떤 지점에서는 노동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가 시스템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은 냉소적이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집' 뿐이며 그 속에 있는 자본가와 노동자는 교체당한다. 그들은 교체 당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없다.

하지만 노동이 자본에 기생한다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는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노동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본만이 노동에 기생한다. 그들은 가치를 만들지 않고 축적하기만 하며 노동이 만들어낸 가치를 착취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영화를 보면 당연히 가난한 기택의 가족이 동익의 가족에게 기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택의 가족은 한번도 기생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노동을 통해서 임금을 통해서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오히려 동익의 가족이야말로 기택의 가족의 노동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은 기택의 가족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택 가족의 노동에 기생하는 동익의 가족에 해당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동익의 아들 ⓒ 네이버 영화
 
기택의 칼은 왜 동익에게 향했나

칼 부림이 일어나는 동익의 집 정원에서 피를 흘리는 자신의 딸과 그 와중에 자신의 아들을 살리겠다며 차키를 내놓으라고 이야기하는 동익을 번갈아보던 기택은 무표정하게 일어서서 동익 가슴 팍에 칼을 꼽는다. 기택의 딸은 칼에 피해를 입었고, 그의 아내는 칼부림을 한 남자에게 복수를 했다. 기택은 왜 그 순간에 동익에게 칼을 찔렀다. 영화내내 기택은 동익에게 감사했다. 동익 덕분에 온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동익의 정원에서 기택의 발언에 동익이 정색을 하면서 '선을 지키세요'라고 하자 기택의 표정은 무표정으로 변한다. 무표정이지만 역설적으로 영화내에서 가장 분노한 표정이었다. 그 뒤에 그는 무표정으로 동익에게 칼을 찔렀다.

기택의 행동은 '선을 넘는다'는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 동익은 계속해서 '선을 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 선만 넘지 말라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기택은 동익의 생각에 선을 넘는 말을 2번정도 했다. 그 문장은 "그래도 사모님을 사랑하시지 않습니까"였다. 달리는 차안에서 한번 마지막 정원에서 한 번 기택은 저 문장을 동익에게 2번말했다. 그 때마다 동익은 표정과 말로 '선을 넘지 마라'는 경고를 한다. 동익이 냄새를 싫어하는 이유도 이 '선'과 관련있다. 냄새는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계속 선을 넘어서 자신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그는 유독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영화에서 냄새를 맡거나, 행동을 하는 것은 주체는 주로 동익이다. 기택의 가족은 그에 따라 반응하고 움직인다. 근데 영화에서 기택이 유일하게 주체로서 행동하고 움직였던 순간이 칼을 들고 동익을 찔렀던 장면이다. '선을 긋는 것'은 오로지 동익만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선은 기택 역시 긋고 있었다. 동익은 기택이 그어놓는 선(기택 자신의 가족, 인간적 모멸감 등등)을 넘었다. 그 결과 기택 역시 동익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 반응했다. 자신만을 주체로 생각했던 동익에게 기택의 행동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기택은 마지막에 이르러서 자신이 그어놓은 선이 있음을 동익을 살해함으로서 증명했다. 이 선은 흔히 인간의 존엄이라 말하기도 하고, 인간의 모멸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