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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온 민중이 하나 되어 피워낸 오월 광주...그 해 오월, 평범했던 우리 민중들의 이야기

19.05.14 18:15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은 올바른 뜻을 함께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죽음과 두려움 앞에서도 올바르지 않은 것에는 분연히 항쟁하였다.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고 단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시민정신과 드높은 자치정신을 발휘했다. 각자의 자리와 역할 속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헌혈을 하겠다는 이들이 병원 앞에 어느덧 모여들어 길게 줄을 섰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시민군들이 일어났으며, 행여 기운 잃을세라 시민들은 너나없이 모여들어 솥을 걸고 밥을 지어 먹였다. 광주의 시민들은 피를 나눠주고 먹을 것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건네준 주먹밥과 물 한 바가지에 담긴 마음을 함께 나누며 시민군들은 힘을 얻었고 결국 광주는 숭고한 '오월정신'을 끝끝내 지켜냈다. 그 누구 하나 없었더라면 이뤄질 수 없었던 민중항쟁이었다. 모두가 하나 되어 해방 광주를 위해 투쟁한 우리 민중들의 모습이 있었기에 오월 광주가 피어날 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채 느닷없이 다가왔고,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던 5·18. 평범한 삶을 살던 이들이 만들어 낸 빛나는 오월 광주.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투쟁에 나서게 되었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항쟁의 거점이자 5·18의 산실이었던 녹두서점>
  
녹두서점의 옛터 사진. 현재는 5·18 사적지 표시석만 남아있다. ⓒ 한겨레
 
1980년 5월, 광주 동구 장동에 위치해 있던 녹두서점은 철저하게 고립된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항쟁의 구심점이었다. 계엄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며 노동자들에게 사회의식을 일깨우던 운동가들은 녹두서점에 모여 궐기대회를 준비하고,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격문과 '민중언론' <투사회보> 등을 만들어 배포하며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1977년 문을 연 뒤 광주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사랑방' 구실을 했던 녹두서점은 지금은 문을 닫았고, 동구 장동 로터리 인근 옛 녹두서점 터 앞 엔 5·18사적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또한, 광주시 전역이 외부와 교신이 일체 두절된 상태에서 전투와 학살 소식은 이 서점을 중심으로 집결되었고 외부로 전파되었다. 광주시의 빈민 지역인 광천동에서 들불야학을 지도하던 김상윤 씨(당시 31세)와, 그의 갓 결혼한 부인 정현애 씨(당시 26세)가 이 서점을 경영했다. 서점은 매장이 10평 밖에 안됐으나 책에 굶주린 청년들에게 이론과 정망을 꾸준히 공급해 왔다.
 
책방 주인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전남대에서 제적된 김상윤 씨였다. 민주화운동을 위한 독서모임 활동을 하던 김 씨는 사회과학 금서를 보급하기 위해 76년 녹두서점을 열었다. 김 씨는 1974년 4월 '4·3 긴급조치 4호'로 수감되고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난 이후, 학습조를 만들어 의식화 작업 활동을 하였으나 행적이 정보기관에 노출될 위험이 생겼다. 또한 늘어난 학습조들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서점을 세워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녹두서점이었다.
 
"처음엔 주로 헌 책을 팔았다. 서울 청계천 시장 같은 곳에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헌 책을 구해다 공급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학생들과 유대가 생겼고, 운동권의 모든 정보가 이 서점을 중심으로 수집되고 교환되었다."
 
교사였던 정현애 씨가 '80년 오월'의 한복판에 뛰어들게 된 것은 바로 '녹두서점'이 시작이었다. 1978년 이화여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광주로 피신해 온 친구의 권유로 그는 계림동에 있던 녹두서점을 처음 찾았다. 정 씨에게 녹두서점은 '많은 분들이 모여 심각하게 사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임이 열렸던 공간'이었다. 녹두서점 문지기가 된 그는 79년 양심수 등 구속자의 부인을 비롯한 지역 여성들의 모임인 송백회 총무를 맡기도 했다. 이듬해 5월 17일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남편 김 씨는 예비검속으로 보안대에 붙잡혀 갔다.
 
"녹두서점에 모여서 화염병을 만들었다. 팜플렛 한 장만 뿌려도 잡혀갈 시대에 화염병이 처음 등장한 곳이다.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는 공수부대에 맞서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녹두서점의 진가는 5월 18일 새벽, 시위 참여자들의 가족들과 그 외 사람들이 들어서거나 전화를 하는 일종의 '상황실' 역할을 하면서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위 참가자들의 대피소가 되기도 하였고, 여러 방법들을 의논하기도 하였으며, 시위 참가자들을 보고 폭도라고 얘기하거나, '군인들의 희생이 많고 민간인 희생자는 단 두 명'이라는 등의 왜곡된 보도를 보고 많은 시민들과 함께 분노하면서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기도 하였다. 궐기대회에서 사용하기 위한 검은 리본을 만들기도 하였고, 어린 시민군에게는 양말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시위 참가자들과 총기를 든 시민군들에게 약, 식량, 치약, 샴푸, 초 등을 지원해줬던 곳이 바로 녹두서점이었다.
  
녹두서점에서 광주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제작, 배포되었던 투사회보. ⓒ 김수형
 
정 씨는 "5월 20일부터 서점 뒤 창고로 쓰던 구석진 방에 대학생들이 모여 본격적으로 항쟁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송백회 회원들과 함께 시너와 솜을 조달했다. 이어 그는 5월 24일 범시민궐기대회가 끝난 뒤 '항쟁파'가 구성될 때 대자보 작성 등의 홍보와 모금 취사 등을 맡아 여성들의 리더 노릇을 했다. "녹두서점과 들불야학, 광대, 송백회 등이 5·18 항쟁의 대중조직과 다른 결의 임무를 수행했다."
 
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의 시민군 거점이 '진압'된 뒤 그 역시 녹두서점에서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갔다. 상무대 영창에 갇혀있던 남편과 세 차례 대질신문을 하기도 했던 그에게 합동수사본부는 "사형감"이라고 겁을 줬다. "결국엔 포고령 위반으로 잡혀갔던 남편을 5·18 수괴의 한 명으로 조작하면서 사형을 구형하는 시나리오를 꾸미더라."
 
"조사실로 끌려가는 복도에서, 다른 방에서 고문받는 남편을 보았다. 포승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등에는 몽둥이 자국이 시퍼랬고 살이 터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어깨만 보고도 남편이라는 걸 알았다. 눈이 마주쳤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많은 학살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에 남편이 만신창이로 몸이 부서져 나갔어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이 미칠 듯이 행복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김상윤 씨와 정현애 씨는 둘 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서로 걱정 말라며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5일 정 씨가 석방되었고, 이후 전두환이 탄 차에 엎드리기까지 하면서 김상윤을 포함한 수감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81년 12월 25일 김 씨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고, 그 후에도 남은 수감자들을 위한 석방운동은 계속되었다. 이 운동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로 이어지게 되고, 이것이 바로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을 요구하는 '5월 운동'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고작 15평 남짓한 조그마한 책방은 고립된 광주 시민들에게 대자보와 전단을 만들어 정보를 전달한 상황실이었고 항쟁 시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간이식당이자, 지도부가 항쟁 방향에 대해 치열한 논의를 이어간 회의실이었다. 10일간 이어진 항쟁의 최후 거점인 전남도청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공간, 녹두서점은 헌책방에서 시작해 1981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기까지 4년 남짓 운영됐지만 5·18 광주민중항쟁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 날의 마지막 새벽방송, 모두의 가슴을 들끓게 하다>
 
사진은 당시 첫 번째로 가두방송을 진행했었던 차명숙 씨의 모습. ⓒ 한겨레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오고 있으니 도청으로 와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도청 광장에 울려 퍼졌다. 당시 전남여고의 가야금 교사였던 박영순 씨는 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 직전 이루어진 새벽 방송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37년이 지난 지금도 5월이 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아프다고 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고 교문을 통과해 걸어 나갔는데 얼마 안 가 학생 한 명이 다리 관통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너무 놀라서 학생 피가...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시민군을 도와 가두방송을 하게 된 데는 눈앞에서 목격한 참상이 크게 작용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안으며 집에 돌아가는 중에 만난 시민군에게 광주 상황을 알리는 걸 도와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았다. "내가 책을 들고 있으니까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방송을 해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냐고 묻더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박 씨는 시민군과 함께 있었다. 뜻을 같이 했기에 두렵지 않았다. 거리방송을 했던 그는 차량에 탑승해 확성기나 메가폰 등으로 가두방송을 하며 헌혈과 항쟁동참을 촉구했으며 도청 내 방송실에서도 사망자 소식 등 도청 상황실 접수 내용이나 도청 앞 궐기대회 현황 등을 방송하기도 했다.

그러던 5월 26일 오후 3시, 노약자나 여성, 어린 학생들은 집으로 귀가하라고 이야기가 되었다. 계엄군들이 오늘 저녁이나 새벽쯤에 들어온다는 얘기가 들려온 것이다. 그날따라 가두방송을 오랫동안 해서 도청에 늦게 들어왔던 박 씨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한 명 만나게 된다. 해가 다 저물 저녁 8시쯤, 그 중학생이 집에 데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밖으로 순찰을 돌기 위해 도청 내 모든 차량이 밖으로 나가있었던 나머지 학생을 돌려보내지 못하고 같이 있게 됐다. 그 학생이 너무 무서움에 벌벌 떨었던 나머지 박 씨는 이를 달래기 위해 이흥철 씨와 함께 방송실에 들어가게 된다.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얘기를 듣고, 사실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우리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과연 여기에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도 있는데 죽이지는 않겠지.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이후 같이 도청에 있었던 김종배 씨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더니 계엄군이 도청을 다 둘러쌌으니 방송을 해달라고 이야기 했다. 그 박 씨는 김 씨가 작성한 쪽지 형태의 원고를 건네받은 뒤 방송 마이크를 잡았다. 박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원고를 세 번 읽었다고 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박 씨의 목소리는 도청 옥상에 설치된 대형스피커를 통해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에 숨죽이고 있던 광주시내 곳곳에 파고 들었다. 그가 세 번 정도 힘주어 반복해서 얘기를 하는데, 더 이상 눈물이 나와서 방송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멈칫했다. 그 때, 도청 안에 있는 불들이 순식간에 나갔다. 계엄군이 전기를 차단 시켜버린 것이었다. 그 다음에 곧바로 총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총질을 하며 전남도청으로 들어온 계엄군들이 방송실에다 총을 쏘니까 박 씨는 학생과 주저앉아 있다가 "이 곳에 여학생이 있다"고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계엄군들은 그들에게 손을 들고 기어서 나오라고 명령을 했다. 기어서 나오는 순간 박 씨는 군 수사관들에게 개머리판과 군홧발로 온몸을 구타당하고 수차례 실신하고 말았다. 그가 잠깐 정신을 차린 때에 계엄군들이 총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떤 년이 새벽방송을 했냐", "옷을 벗겨서 갈갈이 찢어 죽여버리겠다"고 얘기를 하는 바람에 그는 그만 다시 기절해버렸다.
 
그렇게 박 씨와 함께 있던 이 씨, 신원미상의 여중생 등 3명은 방송실에서 바로 연행돼 상무대에 끌려갔고, 그는 상무대 보안실에서 두 달 넘게 조사를 받았다. 밤마다 고문을 받으면서 협박도 받았다.
 
"조사할 때마다 너는 새벽방송 했기 때문에 사형이다. 이렇게 말했다. 두 달 넘게 끌려다니면서 두들겨 맞으면서 협박을 받으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오늘 죽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든다."
  
마지막 새벽방송의 주인공 박영순 씨. ⓒ 유투브
 
그 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이감된 박 씨는 계엄군에게 붙잡혀온 여성들과 함께 고통스런 수감생활을 했다. 그 해 10월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후, 그는 광주를 떠났다. 항쟁 이후에도 '여학생이 되가지고 집에나 있지 밖에 나와서 나대다가 저런 고생을 한다'는 비뚤어진 시선이 많아 결혼 후 25년 정도 타지에서 생활을 한 것이다. 그가 살았던 경상도에선 5.18을 빨갱이가 일으킨 폭동으로 아는 이들이 많았다. "호남민들 다 쓸어버려도 우리나라 끄덕없다"는 말을 예사로 들어야 했다. 게다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고문후유증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심신을 갉아먹었다. 눈만 감으며 머릿속에서 불화살처럼 그 장면이 스치고 지나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불면증 때문에 빼빼 마른 박 씨를 보고,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다이어트를 그렇게 하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박영순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만원이나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이 5·18을 왜곡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절대 용서할 수가 없다고 얘기한다. "5·18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고 현실적으로 더 낫게 아픔 없이 살았을 우리 평범한 민중들이 39년이 된 지금도 그 상처를 안고 살고 있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국가유공자증도 제대로 내놓을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지만원은 아직도 내가 북에서 보낸 마지막 방송선봉자라고 한다. 좌파네 우파네 이용하는 정치인들도 여전히 있고. 우리나라가 분단국가가 아니라면 정치인들이 동서로 갈라서 빨갱이네 그렇게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다 분단국가여서 겪는 일이다. 정치인들이 이제 국민을 둘로 쪼개는 언행을 그만 했으면 좋겠다."
 
박영순 씨는 다시 같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또 참여하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 당시 마지막 도청에서의 투쟁에 있어 참여 하나 안하나 죽음은 단 한 가지였기 때문에 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 평범한 민중들의 삶을 짓밟으려한 부당한 국가폭력이었기에 더욱 더 포기할 수 없었고, 모든 민중이 다 같이 군부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죽음을 불사한 항쟁을 이어나갔다. 그 해 오월,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했던 이들은 서로를 위한 용기 속에서 끝까지 계엄군에 맞서 도청을 사수하였다.
 
<마스크 제작으로 시민군을 돕다>
영화 <택시 운전사>를 통해 많이 알려진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광주에서 직접 찍은 사진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마스크'를 쓴 시민군이다. 이들은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일부 극우 보수집단에서는 이 마스크 착용을 근거로 '북한군이 신분을 속이기 위해 마스크를 쓴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5·18 광주 민중항쟁이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주장은 아무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마스크는 단순히 얼굴을 가리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거즈로 손수 만들어 나눴던 마스크에는 그 해 오월 광주의 대동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5·18 당시 마스크를 도맡아 제작했던 송희성 씨. 그는 진보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나 대학 때는 최초로 대학생 계몽대(농활대)를 조직하는 등 학생운동에 열심이었으며, 대학 졸업 이후에도 "비서보다는 사회운동을 하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따라 YWCA 활동, 유신 반대 운동 등을 이어나갔다. 그는 길 가던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두들겨 맞고 하루아침에 부모, 형제자매, 친구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전두환 정권의 잔혹함에 대해 분노했다. 이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광주를 지키기 위해서 시민군이 되기로 결심한다.
 
당시 전남도청 앞 무덕관(옛 상무관)에는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된 시신들이 수십 구에 달했다. 많은 광주 시민과 시민군들은 이 시신들을 수습하는데 심한 냄새 등으로 힘들어했다. 송 씨는 자신의 집에 있던 병원용 거즈를 이어 붙여 마스크를 만들어 쓰면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100여개의 간이 마스크를 직접 만들어 도청 항쟁 지도부에 전해주었다. 일부 시민군들은 계엄군에 자신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마스크를 착용하기도 했다. 같이 살던 성하맨션의 부녀회원들과 이웃 주민들을 모아 함께 재봉틀을 가지고 합심하여 시신 수습에 필요한 간이 마스크와 장갑을 직접 만들어 공급했다.
 
"5·18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 마스크하고 장갑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제가 저희 집에 가서 우리 아파트 주민들과 함께 마스크 100개, 또 장갑 100개를 구해가지고 상무관에 보냈고 같이 일을 했고, 또 시민군 기동타격대에게 줬다."
 
당시 기동타격대3조로 활동했던 염동유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약 30구 정도의 시체가 있었는데 거의 가슴, 목, 다리에 총을 맞은 남자들의 시체가 많았다. 시체는 얇은 베니어판으로 만든 관에 뚜껑만 열어두었다. 시체의 가족들이 나타나지 않아 염은 하지 않은 채 향을 피웠으나 시체에서 나는 냄새가 매우 고약했다. 그래서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했다.
 
한편 이러한 이유들 외에도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대해 송희성 씨는 "사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얼굴이 노출되면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시민군들이 얼굴을 안 나타내기 위해서 내가 만든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며 북한군이 마스크를 쓴 것이라는 지만원 씨의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나는 도청으로 몰려드는 시민들의 헌혈 행렬을 정리하고 여성계 인력을 동원해 도청에 집결한 청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희생자들을 위해 마스크와 장갑을 제작했다. 항쟁의 한복판에 겁 없이 서있었다".
 
이렇듯 마스크는 광주 시민들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빚어낸 물건이었다. 비록 거즈로 만든 간이 마스크였지만, 서로를 위한 마음을 알았기에 그 가치는 빛났다.
 
송희성 씨는 인력이 부족했던 병원에서 일손을 돕고, 시신을 수습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광주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사회보와 대자보를 제작했으며, 수습위원회에 들어가 광주를 끝까지 지켜내자고 이야기했다. 이로 인해 그는 505 보안대 지하실에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송 씨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광주의 여성이자 시민군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
 
그는 "많은 시민들이 나서서 김밥, 빵, 음료수 등을 시민군들에 나눠줬다. 그때는 서로 떨어지면 쌀도 주고 뭣도 주고 내 아들 내 새끼 지킨다고 서로 도와주면서 자기 것이 없어도 나눠먹었다"며 5·18 당시를 추억했다. 다함께 서로를 돕고 나누며 광주를 지켜냈던 것이다. 뜨거웠던 그 해 오월, 광주는 부당한 것에 함께 분노하고 없더라도 나누려고 했던,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 '대동세상'이었다.
 
<대동정신과 공동체의 상징, 주먹밥>

 
부녀자들이 시민들에게 주먹밥을 제공하는 모습. 그 당시 광주의 주먹밥은 '대동정신'의 상징이었다. ⓒ 나경택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광주의 오월 정신은 바로 대동정신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다 함께 행동하지 안 했으면 어떻게 지금의 5·18이 있었을까. 그 당시 광주시민은 모두가 하나로 단결되어 똘똘 뭉쳐 끝까지 싸웠다. 5·18 민중항쟁으로부터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항쟁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18 민중항쟁 관련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7일부터 27일까지 약 10일 간의 투쟁 중에 단 한 건에 사건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그 당시 광주의 대동정신을 보여준다. 모두 질서 정연하게 행동했고 서로를 서로가 의지하며 광주를 끝까지 지켜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하나가 되었던 5·18의 대동정신. 앞서 얘기한 마스크도 이를 잘 나타낼 수 있는 물건이지만, '주먹밥'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당시의 주먹밥은 단순한 식사대용의 의미를 넘어서 '시민 공동체 정신의 상징'의 가치를 지녔다. 대인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한지 3년 째 5·18을 맞이했던 하문순 씨는 당시의 광주를 이렇게 말했다. "전경들이 최루탄 띵기고, 학생들은 도망가고 쫓기고, 또 시위하고 글잖아요. 전경들은 다 갖다 먹이잖아요. 그때 엄청나게 더웠어요. 5월 달이어도 그때같이 더울 때가 없었어요." 이후 그는"야야 학생들이 굶고 있단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어르신들의 말을 듣고서, 장사하는 엄마들에게 돈을 걷히고, 주먹밥들이 만들어 박스에 담아서 시민군에 실어 보냈다. 당시 최고 많을 때는 세 가마니가 쪄졌다는 점에서 얼마나 많은 주먹밥들이 만들어졌는지 추측할 수 있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은 수시로 마트에서 음료수를 사서 챙겨주고 집에서 직접 주먹밥을 해서 가져오기도 했다. 박영순 씨는 가두방송을 하면서 수시로 아주머니들이 달걀을 쪄서 차에서 먹으라고 가져왔던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얘기한다. 그 많은 광주 시민들이 차도 없이 다 걸어서 거의 매일 같이 전남도청까지 나와서 서로가 가져온 음식과 물을 나눴던 모습은 그 당시 얼마나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와 투쟁의 열의가 불타올랐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또한 광주 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이 주먹밥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했고, 많은 광주시민들이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다함께 팔을 걷어 부치고 헌혈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사건을 알리는 유인물들이 배포되고 모두의 자유로운 발언이 이어졌다.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라고 전했지만, 사실 당시의 광주는 진정한 대동 사회를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투쟁하고, 연대했기에 단 한 건의 좀도둑이나 사재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군은 시민군대로, 부녀자는 부녀자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모두 자신의 자리에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시민군 송희성 씨는 "보급도, 장사도 안 되고, 교역이 안 되니까 집집마다 쌀이 떨어질 거 아닌가. '쌀 없어' 그러면 '응 내 거 같이 먹어' (그러고), '김치 없어' 그러면 김치 갖다주고. 대동정신이 살아난 것이었다. 정말 나는 그런 세상 한 번 다시 살고 싶다"면서 당시 공동체 사회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렇듯 주먹밥에는 민주주의와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 올바른 일에는 함께 하겠다는 시민정신, 누구나 함께 나누는 평등의 정신과 좋은 세상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공동체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이런 따뜻한 정신들이 5월 광주에서 빛을 발했고 '5.18 민중항쟁'을 역사 속에 새기게 되었다.
 
<뜨거웠던 광주의 오월 정신을 기억하며>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일이었다. 이 시기동안 광주는 외부와 단절된 채 시민들끼리 자급자족하며 공동체 내 안정을 유지하였다. 이때만큼은 부랑자들, 건달들, 술집 종업원들과 같이 사회에서 외면 받는다고도 할 수 있는 이들까지 전부 다 한마음이 된, 말 그대로 '대동세상'이었다. 모든 시민들이 모여 시민궐기대회를 통해 본인들의 주장을 연이어 자유롭게 펼쳤고 화합을 이루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한 시민군들부터 이들의 투쟁을 돕기 위해 나서서 주먹밥을 해 먹이고, 마스크를 제작했던 부녀자들, 앞 다투어 헌혈을 지원했던 이들까지. 모두가 있었기에 해방 광주가 탄생할 수 있었다. 비록 많은 피를 흘렸고 평범했던 일상을 잃어버린 그들이었지만, 이들은 불행에 주저앉기보다 일어서서 항거하는 것을 택했다.
 
평범했던 이들을 변화시켰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말이 있다.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그들은 결코 능력이 매우 출중하거나 영웅이여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내 주변 가족·친지들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었기에 당연히 분노할 수 있었고, 모두가 주체적으로 함께 나섰기에 용기 내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39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열사들이 품고 행동했던 그 뜨거운 광주의 오월 정신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1980년 5월의 광주에 그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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