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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난 아이의 손가락에는 항상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반창고가 감싸고 있다.
어떤 날에는 엄지에, 어떤 날에는 검지에 꼭 하나씩 붙어있다. 처음 봤을 땐 뾰족하거나 날카로운 물체에 손가락이 베었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지만, 실상 알고 보니 '아이는 역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잘 놀다가 갑자기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 현미경으로 봐야 할 정도로 손톱 위로 살짝 솟아오른 얇디얇은 살 점 한 가닥 그리고 아빠의 턱수염처럼 까칠한 그 무엇이 자신의 손을 아프게 했다고 느꼈을 때, 대형사고라도 난 듯 아이는 어김없이 '엄마'부터 외친다. 그리고 처방까지 내린다. 반창고 어디 있냐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이 정도는 괜찮아"하고 말했지만, 아이의 표정은 벌써 중환자다. 아내는 예견이라도 한 듯 뽀로로가 윙크를 날리고 있는 반창고 하나를 가져와 아이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싼다.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아이들한테 반창고는 만병통치약이래. 마음까지 달래준다나.."   

기어이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인 아이는 해맑은 표정까지 지으며 자랑까지 하기 시작했다. 뽀로로 반창고는 자기만 붙일 수 있다나 뭐라나..

그런데 방금 전 울상이었던 그 표정은 아픔을 가장한 포커페이스? 단 한 번의 훌쩍임도 없는 급격한 표정 변화는 조커도 울고 갈 명연기였다. 아무튼 다시 밝아진 표정을 보니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다 문득,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은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언제 내 몸에 반창고를 붙였었지?' 

질문 자체로만 보면 영양가 1도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아이처럼 항상 붙이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한 때 크고 작은 사고로 몸에 반창고가 떨어질 날이 없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내 앞에 떠올랐다 다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이젠 빳빳한 새 구두를 신을 때마다 피눈물 흘리는 발뒤꿈치의 외침과 종횡무진 종이를 잘라본 현란한 칼솜씨에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갈 때 빼곤 딱히 반창고에게 내 몸을 맡길 일은 거의 없다.

더구나 어른이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생명에 지장 없는 사소한 상처 정도는 그냥 무시해도 괜찮다는 의식이 이미 내 뇌리에 깔려있었다.

'야~ 그 정도는 괜찮아, 안 죽어'라는 자존심 팍팍 깎아내리는 말투와 남자 망신 다 시킨다며 경멸하듯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당당히 반창고를 붙일 수 있는 남자? 눈 씻고 봐도 못 봤다. 실은 나도 그랬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남자라고 다 같은 남자가 아니며 자신을 사나이 중에 사나이라고 자부한다면 그깟 반창고? 안 붙여도 된다. 사실 안 붙인다고 바로 죽는 것도 아니다. 그럴 가능성은 소수점 이하다. 그건 인정한다.

그런데 만약 그 작은 상처가 몸이 아닌 마음에 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눈으로 확인조차 어려우니 당연히 몸에 난 작은 상처처럼 무시해버리는 게 당연한 것일까? 그러자 저 깊숙한 곳에서 가냘프고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지금 좀 아파. 반창고 하나 붙여줄 수 있어?"

가슴에 난 털까지는 어떻게 헤집고 붙여 볼 수 있지만, 그 안으로는 절대 붙일 수 없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반창고의 한계. 죽고 싶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모스 신호처럼 가냘프게 띄엄띄엄 보내는 마음의 신호를 우리는 얼마나 민감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살면서 우리는 타인이 자신의 촉수를 미세하게 건드리는 말을 가끔 듣곤 한다. 특히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어떤 의도로 말을 했는지 진위를 알 수 없는 모호한 표현들. 듣기에 따라 생각하기에 따라,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런 말들. 삼킨 지 오래지만 역류하듯 올라온 그 말을 우린 몇 번이고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아직까지 소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그들의 말들. 그들이 문제가 있는 걸까?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하지만 이런 고민도 잠시, 우리 대부분은 마음의 기대를 저버리는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만다.

'나쁜 의도로 말하진 않았을 거야'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나도 그 사람을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상처 받았을지도 모를 내 마음을 먼저 살피기는커녕, 가장 쉽고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인 '난 괜찮아'라는 생각을 내 마음에 강요한다.   

타인과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까탈스럽고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내가 괜찮다고 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목에 걸린 생선가시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비록 외과의사는 아니지만 과거 제법 큰 사고를 경험했었고, 주변에 꽤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본 결과, 깨달은 사실이 있다. 큰 병은 처음부터 크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아주 사소하고 흔한 증상으로 다가온다. 알고 보니 이 신호는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던 것이다. 병을 좀 앓아본 사람이라면 지금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을 것이다.

마음의 병 또한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하나둘씩 생기는 마음의 상처를 숨길 때마다 자신은 꽤 배려심 있고 마음이 넓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 걸 이해하고 포용하는 바다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에게는 배려나 이해라는 말은 얼토당토 한 말이다. 마음은 생각보다 솔직하고 타인의 아픔보다 자신의 아픔에 먼저 반응한다.    

물론 시간이 주는 세월의 연고를 바르면 저절로 아물 수도 있다. 하지만 완치된 상처에도 미세한 아픔의 흔적이 남아있듯, 마음의 상처 또한 그 아픔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몰라주는 그 아픔의 크기가 눈덩이처럼 커질수록 점차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병으로 우리 앞에 당당히 나타날지도 모른다. 빌린 돈 차일피일 미루다 안방까지 쳐들어온 빚쟁이처럼 말이다.



내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쫓아가 따지거나 책임을 물음으로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회복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사실 그것도 유효기간이 있다. 죄가 있어도 죄를 물을 수 있는 기간이 법으로 정해진 것처럼 말이다.

시간이 너무 흘러 타인이 내게 한 말의 진위를 물어볼 수 없다면, 잘잘못을 따질 수 없다면 그땐 내가 마음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저 깊은 곳까지 내려가 마음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리고 차분히 들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 때문에 상처를 입었는지, 상처가 어느 정도 인지 차근차근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나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았는지도.

그런 다음 마음에게 약속해야 한다. 앞으로 너의 목소리에 자주 귀를 기울이겠다고. 그러니 너의 목소리를 자주 들려달라고. 그것이 내 몸만큼이나 소중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마음의 반창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