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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동북아 생명평화, 그리고 영성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한라에서 백두 넘어 시베리아까지 대장정을 담다
18.09.14 23:1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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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바이칼호수 순례기도회 바이칼호수 알혼섬에서 한 순례기도회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홍천과 안산에서 출발해, 제주, 부산, 광주, 천안, 태백을 지나 중국·러시아에 다다랐다. 핵무기와 모든 전쟁무기를 폐기하고 한라에서 백두 넘어 비무장지대가 확장되길 염원하는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가 8~9월에는 연길과 룡정, 도문, 훈춘,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를 거쳐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까지 이어졌다. 고구려발해 역사, 항일독립운동, 고려인 강제이주 등 우리 겨레의 역사 유적을 따라 순례하고,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한민족의 시원이라 불리는 바이칼호수와 알혼섬을 찾는 대장정이었다.
 
"한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깃치신 이 터에
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 명동학교 교가
 
8월 23일 연길에 도착해 룡정으로 향했다. 1899년 저물어가던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바꿔갈 뜻을 모은 함경도 유학자 넷은, 과감히 땅과 집을 팔아 식솔 142명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갔다. 근대화 이전 국명도, 국경과 영토도 지금과 같지 않았던 시절,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은 그저 간도였다. 이미 오래 전엔 고구려와 발해 땅이었기에, 우리 겨레에게 백두산자락 그곳은 아주 낯선 남의 땅이 아니었다. 탐관오리들 학정과 지주들 착취에 더해 덮쳐오는 일제 수탈을 피해 그 어떤 지배도 허락하지 않는, 동녘땅(한반도)을 밝히는(明東) 마을 터로 삼았다. 집 짓고, 저마다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 공동 재산인 '학전(學田)'을 모아 명동학교를 세우고, 부지런히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 남녀노소 누구나 우리 얼을 일깨우도록 했다. 
 
룡정 명동학교 앞에서 명동마을은 암울한 나라의 운명을 바꿔내고자, 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지도력을 길러냈다. 밝은누리움터가 그 당시에 세워졌다면, 명동학교와 비슷했으리라는 이야기 나누며, 룡정 명동학교 앞에서 삼일학림 학생들. ⓒ 생명평화고운울림기도순례
  우리는 룡정에서 명동마을의 흔적을 더듬었다. 윤동주 생가 앞에는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라는 팻말이 서있었다. 대륙의 중심을 자처하는 나라 기준에서 보면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에 윤동주 생가가 있으니, 한국인 관광객들 앞에 그렇게 표현하고플 것이다. 그렇지만 윤동주는 명동마을에서 벗들과 자라온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식민지 젊은이의 깊은 고뇌를 담아 수많은 시를 썼다. 명동학교는 윤동주 뿐 아니라 우리 겨레의 앞날을 새롭게 열어갈 수많은 청년지도력을 길러냈고,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시대에 유학자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미래의 희망을 지금 여기 명동마을에서 일구어간 규암 김약연 선생의 정신마저 동북공정으로 흡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는 선생의 말씀대로, 역사 유적지가 어느 나라 소유권이냐를 따지기보다, 앞선 스승의 유지를 따라 삶으로 살아내는 이가 우리네 유적지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청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꿈도 많다."
 
연길에 있는 조선식당에서 조선인들이 불러준 노래 '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기상 악화를 우려한 당국의 입산 통제로 비록 이번에는 백두산 순례길이 막혔지만, 머지않아 남녘에서 하늘길이나 바닷길 통하지 않고도, 당당히 우리 겨레 땅 밟고서 '백두산'을 오를 날이 오리라 확신했다. 대륙과 반도를 가르는 두만강 건너 바라보이는 조선땅은 가깝고도 멀었다. 그렇지만 중국, 일본, 러시아, 중앙아시아에 흩어진 겨레가 하나 된 겨레로, 한라에서 백두 넘어 두만강을 건너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까지 막힘없이 오갈 수 있는 그 날은 꼭 오리라. 
 
크라스키노 핫산동산에서 크라스키노 핫산동산에서, 조선땅을 바라보며 섰다. 우리 겨레가 연해주로 건너가 개척한 마을들은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동의단지동맹비 안중근과 동지 열한 명은, 1909년 이곳에서 제 손가락을 끊어 하늘과 땅 앞에 동의단지동맹을 맺고 흩어진다. 이듬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한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 사형을 선고받는다.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8월 25일 중국 훈춘세관을 통과해 러시아 크라스키노로 건너갔다. 이곳 또한 발해성터가 있는 곳이지만, 러시아로서는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길목이기에 군사적으로 민감한 요충지이다. 100여 년 전엔 조·중·러 세 나라가 마주한 접경지대로 분쟁도 잦고 항일독립운동도 계속된 곳이다. 안중근과 동지 열한 명은 동아시아 전체를 강점하려는 일제의 폭주를 온몸으로 막아내기로, 1909년 여기서 제 손가락을 끊어 하늘과 땅 앞에 동의단지동맹을 맺고 흩어진다. 이듬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한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 재판정에서 이토의 열다섯가지 죄목을 나열하고 동지들 이름을 실토하지 않았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까지 그가 써내려간 <동양평화론>에는 극동의 분쟁지역을 영세중립지대로 정하고, 한·중·일 세 나라가 동북아 공동안보체제를 구축할 것 등이 담겨 있다. 반도땅 작은 식민지 백성으로 사고하지 않는 그의 역사관이, 2차 세계대전 종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선조들이 연해주로 건너와서 개척정신으로 일군 자치마을은 독립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포시에트 지신허마을이 그러했고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이은 신한촌이 그러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학교를 세우고, 민족모임을 조직했다. 겨레 얼 서린 만주와 연해주를 누비며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과, 침략과 지배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나라를 마을로 일구는 삶은 하나였다. 나는 그동안 섬나라처럼 좁은 시야에 갇혀 백두산 저쪽, 아니 휴전선 반대편에 대해 무관심하고 선조들의 역사를 '해외 독립운동'쯤으로 사고해오지 않았던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습격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고, 연해주에서 높은 인구비율을 보였던 고려인들은 전부 스탈린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되었지만, 자랑스러움과 아픔이 뒤섞인 그 흔적을 더듬으며, 비로소 '우리 역사'로 받아 안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8월 28일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를 거쳐 하바롭스크로 향했다.  
 
신한촌 기념비 러시아땅에서 고려인들이 살아온 삶을 기리고자 세워진 신한촌 기념비에서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작은소리음악회 하바롭스크 아무르강변에서 작은소리음악회를 열었다. 지나가는 현지인, 고려인 청소년들도 함께 어울렸다.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러시아에서 큰 시내를 걸으며 혁명광장과 레닌동상을 꼭 마주치게 된다. 체제가 바뀌었어도, 러시아혁명은 러시아인들 마음에서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혁명은 제정러시아 차르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공산주의체제를 세운 세계적인 혁명이었다. 맑시즘으로 새로운 사상에 감복한 전세계 젊은이들은 러시아혁명에 온 몸과 마음으로 동참했다. 제국주의에 억눌린 우리 젊은이들도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인 인류해방을 위해 러시아혁명에 뛰어들면서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볼셰비키 혁명당원 김알렉산드라도 혁명에 반대하는 백위군에 붙잡혀서 하바롭스크 아무르강변 절벽에서 총살당하기까지 보편적인 인류 해방을 향한 자신의 선택에 추호의 회한도 남기지 않고 당당히 목숨을 바쳤다.
 
8월 28일 오전 11시 하바롭스크역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올랐다. 목적지인 이르쿠츠크역에 내릴 때까지 꼬박 사흘 밤낮을 열차에서 지낸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톡을 잇는 동서 횡단철도로 그 길이가 9288km에 달하며, 지구 둘레의 약 1/3에 해당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이다. 언제가 서울, 부산까지도 이어져 부산에서 열차 타고 평양, 도문, 시베리아까지 막힘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 기대하며, 이번 순례가 그 첫걸음이 될 수 있을까? 그보다 먼저 시베리아횡단열차의 기나긴 여정 곳곳에 흩뿌려진 고려인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되짚어보며 민족의 해원과 치유, 화해와 신명을 더욱 간절히 노래로 담았다.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꼬박 사흘 밤낮 동안 횡단열차를 탔다. 오며가며 만나는 현지인에게도 이 순례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미리 준비해간 부채를 선물하기도 했다.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시베리아횡단열차 정차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가다 간혹 20분 이상 정차했을 때는, 미리 준비해놨다가, 흥겨운 공연 한 판을 벌이기도 한다.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1937년 스탈린정권은 고려인 지도자급 인사 2500명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숙청하고 고려인 18만여 명을 9~12월까지 석 달에 걸쳐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태워 보낸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열차 화물칸에 실려 한 달 동안 6천500km를 달리는 이동과정에서 11000~16000명이 굶주림과 추위 등으로 숨졌다고 한다. 돌아오지 못할 고향땅 뒤로 하고 곁에서 죽어가는 연약한 피붙이들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강제이주를 떠나야 했던 고려인선조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절로 먹먹해졌다. 당시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달려서 한 달 만에 도착한 곳은 바로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지에서 가난과 추위를 견디며 겨레의 삶을 이어온 고려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위대하기 그지없다. 고려인 선조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그동안 순례 여정에서 만났던 무수한 생명들 떠올리며 생명평화를 구하는 기도노래가 열차에서도 끊이지 않고 울려퍼졌다.
 
횡단열차에서 지내는 사흘 동안 함께 순례하는 길벗들과는 함께 이야기꽃 피우고, 함께 밥상 나누고, 함께 뒷정리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잠들며, 이 정도 고생스러움 쯤이야 너끈히 감내하게 해주는 힘을 주고받았다. 사람이 한 번도 닿지 않았을 것 같은 원시림, 끝없이 펼쳐진 들판, 숲속 오두막이 간간이 차창으로 지나갈 때도, 대자연 앞에 홀로 선 인간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어느덧 바이칼호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처음 본 바이칼은 바다같이 넓디넓게 펼쳐진 자연호수였다. 바이칼이 호수인지, 바다인지, 그 구분의 기준은 무엇이며, 구분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온 생명이 시작되는 지구의 어머니같은 맑은샘으로 고요히 존재해온 바이칼. 하늘은 바이칼과 맞닿아 빛을 쏟아내렸고 바이칼은 밝은 하늘을 다 받아안고 있었다.
  
바이칼호수 알혼섬에서 바이칼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 곳곳을 걸어다니며 순례를 이어갔다.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바이칼호수 순례기도회 하늘과 자연의 거대한 풍광 앞에 압도되는 이곳에서 하늘 아래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일부로 그 옛날부터 사람들은 하늘을 공경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바이칼호수 생명평화를 구하는 기도노래가 들리고 현지어로 번역한 천수마을 둘러싸고 자, 지나는 현지인들도 동참했다.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바람 몰고서 오실 이 놀랍고 크신 팔 일으켜 굽은 것 곧게 펴실 이
맨 발로 어둠 속을 더듬어 끝내 오시고야 말 이
불꽃 헤집고 오실 이 힘 있고 강한 팔 휘둘러 못된 것 바로 잡으실 이
온 땅을 가로질러 끝까지 그 빛 비추고야 말 이
하늘 쪼개고 오실 이 의롭고 미더운 손 내밀어 두려워하는 백성 구하실 이
온 세상 신명나게 뛰놀며 사랑노래 부르게 할 이"
 
바이칼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에 들어가서 밝은 하늘이란 뜻을 지닌 불한바위 앞에서 생명평화를 구하는 기도노래를 불렀다. 하늘과 자연의 거대한 풍광 앞에 압도되는 이곳에서 하늘 아래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일부로 그 옛날부터 사람들은 하늘을 공경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이를 소수민족의 종교로 가볍게 여기면 인류의 오래된 미래를 보기 어렵다. 한민족의 시원, 북방 영성의 고향이라 불리는 바이칼호수에서 동북아의 다음문명, 생명평화시대를 열어갈 실마리를 찾는다. 21세기 인류의 죄와 오만이 만들어낸 제국주의 침략과 분단, 전쟁과 생태계 파괴를 회복하고 동북아 생명평화를 열어가려면, 하늘과 땅, 사람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영성을 줏대있게 사유해야 한다. 영성은, 자기 몸과 내면의 평화를 성찰하고 일상에서 닦아가는 것이다. 미래문명을 이야기하는 우리사회 진보운동, 대안운동은 시민사회의 영성을 주목해야 한다. 일상에서 서로 살리는 관계로 만나가는 마을이 생명평화의 출발이자 종착지여야 한다. 농촌마을과 도시마을이 서로 살리는 그렇게 만나듯, 남과 북, 그리고 흩어진 겨레도 서로 살리는 관계로, 동북아 생명평화의 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리스트비양카에서 중국/러시아 순례를 마무리하며 저마다 순례의 의미를 곱씹고 성찰해볼 수 있던 자리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덧붙이는 글 | <밝은누리신문> 90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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