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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문학동네

당신의 시집은 다섯 살이나 됨직한 아이 하나가 아버지의 등을 고사리 손으로 꼭 잡고 타는 낡은 자전거 같아. 농토길 주변으로 보리가 추수되고, 아직 모판에 심어 놓은 볍씨가 싹을 틔우기 전인 날, 아버지의 목덜미에 약간의 땀이 흐르고, 아이는 이제 막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듯 책가방을 메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낮은 담벼락이 이어진 동네의 모퉁이를 돌면서 아버지는 자전거 벨을 울리기도 했을 거야. 그 벨소리에 응답이라도 하듯 동네에 백구와 황구가 컹컹 짖기도 하겠지. 어쨌든 동네 어디에 세워도 이상할 것 없는 낡은 자전거. 누가 타도 괜찮을 것 같은 낡은 자전거. 바퀴살의 색은 흙길에 닳고 닳아 있고, 안장의 가죽은 살짝 들떠 있는 낡은 자전거.

이제는 아무도 타지 않는 낡은 자전거. 낡음과 늙음을 합성한 단어 일 것 같은 자전거. 잊어버린 그 자전거를 애써 기억할 필요는 없어. 성인이 된 아이의 기억에는 자전거는 지금의 늙은 아버지의 피부처럼 고단했으므로, 그것은 구동이 된다는 느낌보다는 영원히 멈춰만 있는 유년시절 사물의 풍경이므로. 외로움이 늘킨 낱말로, 문장으로, 시(詩)로, 거미줄이 쳐져 있다고 해도, 아무렴 괜찮아.

김언이라는 시인의 시집을 처음 접한 것은, 2009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소설을 쓰자>라는 꽤 두꺼운 시집이었다. 그해 김언 시인은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모두가 움직인다>,<한 문장> 이후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 출간됐다.

올해 1월 시와 에세이가 묶인 <한 문장>으로 독자를 만났다. 숨 쉴 틈도 없이, 3월에 그의 풍성한 언필은 그의 시 애독자들에게 연이어 설렘을 줬다. 49편의 시가 실린 그의 여섯 번째 시집에 수록된 예민한 문장의 사유는 코스 요리이므로 급하게 먹으면 후식은 배가 불러 먹을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분명하게 보이거나 희미하게 보이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 경우에도 모든 시의 문장에는 그래서 종종 혈흔이 묻어 있다. 혈흔이 숨어 있다. 혈흔이 녹아서 흐르는 피의 냄새가 어떤 문장에서 난다면 그 문장은 이미 시의 문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리 격리시켜야 할 문장. 미리 격리시키거나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놓아야 하는 문장. 아니면 아예 이 세상의 문장이 아닌 것으로 조치를 취해야 하는 문장. 가장 확실한 방식은 펄펄 끓는 문장들의 용광로 속에 집어넣고 형체도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품이 들어가니까 애써 외면하는 방식으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따돌리는 방식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한번 문제를 일으킨 녀석은 언젠가 꼭 한 번은 더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또 일으킨다. 그러니까 문제아겠지. 마찬가지로 한 번이라도 혈흔을 묻힌 문장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소외시키더라도 반드시 그 혈흔을 다시 묻힌다." -<문장 감식반> 중에, (92~93쪽)

  
'혈흔'이 묻은 문장이란 무엇일까. 수도 없이 탄생했을 문장들. 그 문장은 어느 독지가의 선한 기부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밟히고 으깨진 풀이 다시 돋는 것처럼 끈질기게 삶을 버틴 문장이었다.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의 거름이 됐다. 다음 문장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마치 나무의 나이테 같은 시간의 결이 필요했다. 

아름답다던 4월이 지나갔다. 푸른 잎이 돋고, 강남 갔던 제비가 처마 밑으로 돌아와 둥지를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낭만적인 풍경도 가까이서 보면 저마다 까진 살갗을 베인 험난함이 보였다. '마치 천생연분인 것처럼 각자의 집을 허물고 한집에 붙어살았다. 칼집이 아니면 살집인 그 집에서.'<칼맛과 살맛>중에(12쪽)

시인의 명제대로 간다면, 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문장이란 혈흔이 묻어 있어야 한다. 혈흔은 상처가 발생한 결과였다. 통각을 느끼게 만드는 시어는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혈흔을 숨긴 시어는 동극끼리 밀리는 자석처럼 다른 아픔과 동화되지 않았다. 시인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아픔을 동어 반복이 아니라 개별적이며 추상적으로 사유한 것일까.

신만이 잊을 수 있는 아픔의 무한한 경지에 대해 세속의 인간은 꼿꼿하게 버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남을 더욱더 힐난하고, 혐오하고, 결국에는 칼끝을 자신에게 향한다. 무한한 오류로서,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돌을 계속 굴려야 하는 것처럼, 평범한 삶은 아픔을 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아픔에 대해 정당한 한계를 분명히 그어 놓은 이론이란 없다. 그래서 통증이 있는 문장은 격리가 필요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한번 문제를 일으킨 문제아는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고, 시인의 시구처럼 혈흔을 묻혀 돌아왔으므로.

"당신이 왜 저렇게 되었을까요? 브라운관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그걸 알았다면 저러고 있지 않겠죠. 브라운관을 보면서 당신이 말했다. 부끄러운가요? 많이 부끄럽지요. 알았다면 이제 끕시다. 저 화면 속의 당신도 그걸 원하지 않을까요? 그냥 두세요. 더 부끄러워지게. 저 사람은 지금 부끄러운 걸 모릅니다." -<한창때>전문,(83쪽)


시를 읽다 독자는 추방되고 버림받은 부끄러운 자아를 조우하게 됐다. 그것이 시인의 의도든, 그렇지 않든간에. 나는 시집을 덮었다. 아직 아픔을 생생히 들여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된 아픔은 삶에 무뎌지기 마련이니까.

가장 손쉬운 바보상자에 눈이 돌아갔다. 수많은 사건 사고를 알리는 뉴스에서 혈흔으로 뒤범벅된 벤데타 가면을 쓴 사람들을 봤다. 통증을 불러 일으켰던 지난날의 아픔이 개별적이고 추상적이었다면 지금은 집단화하고 구체화된 움직임으로 바뀐 듯 했다.

'내게도 있던 것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구나'하는 자각이 동력이 됐을까.  매스컴에 보인 가면들은 가해자의 그릇된 권리에 과감히 선을 치고 "이건, 아니야"하고 저항했다.

총수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 재벌의 은닉 재산을 추적하겠다는 정부의 방침. 아픔의 강도는 같을 수는 없겠지만, 기꺼이 사회적 분노에 마음을 내어 놓은 사람들도 보였다. 부끄러움의 주소를 제대로 찾아가기 위한 발들이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더 부끄러워지게, 저 사람들이 모르는 부끄러움을 알려주기 위해.

"따라서 시간도 실상은 언어의 산물이다. 문장이 분절에 토대를 둔다는 것은 문장이 시간을 잡아먹으면서 발화의 영역에 진입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분절이 제거된 말을 구사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러니까 미래를 앞당겨볼 능력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언어의 두 가지 분절, 즉 음운 차원에서 행해지는 분절과 의미 차원에서 진행되는 분절의 산물이다. 김언은 음운이나 음절이 서로 짝으로 묶여 대립하고 긴장 상태에 접어들 때 발생하는 변별적 가치에 주목하며, 이러한 사실을 시에서 펼쳐낼 때, 문장의 다양한 속성 중 하나가 비로소 설명될 것이라는 사실에 무게를 두고서 제 시집을 연다." (112쪽)


문학평론가 조재룡의 해설 일부이다. 말의 뜻을 구별해 주는 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인 음운과 말소리의 단위인 음절 사이의 부딪침에서 시인은 소통의 근본을 물었다. "소통이 뭔가요?"라고.

어린이가 말을 배울 때 더듬더듬 했던 것, 뜻을 조합했던 과정, 문법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학습하며 이루어졌던 언어적 사유의 과정 등이 총합되는 과정이 소통은 아닐까. 너와 나의 다른 총합으로 이루어진 문장은 번번히 발화자와 발화자 사이에서 혹은 자신들끼리의 문장 안에서 빈번한 갈등을 일으켰다. 소화되지 않는 말들이 나부끼고 그것이 상대의 귀에 들리면서 또 다른 오해를 낳았다.

발화 되어 발음이 끝마쳐지는 순간 단어는 과거가 된다. 결코 새것일 수 없는 단어의 태생적 한계를 시인은 주목했다.  

"단어가 말한다. 어디로든 데려가는 문장을 찾아달라고. 내가 말한다. 혼자서는 안 되겠니? 얼굴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는 눈, 코, 입의 합창으로 나는 가장 강력한 불만을 표시했다. 화가 나면 단어는 말이 없다. 얼굴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생각은 여러 번 얽히고설켜서 소리친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그건 욕이 아니야. 그건 한숨 소리도 아니야. 그건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나무는 숲을 이루고 숲은 나무 한 그루쯤 간단히 무시하는 전략을 치밀하게 짠다."-<먼지 행성의 주민들을 위한 무관심한 노트> 중에, (95~96쪽)


단어가 문장으로 밀고나간 힘의 확장성이란 결국 하나의 나무에 국한하는 것이다. 그 나무들이 이루어진 숲은 나무의 개별적 속성을 간단히 무시한다. 어쩌면 지금껏 우리 사회가 '소통'이라는 큰 말을 함부로 사용했던 것은 아닐까.

불통이라는 2음절 속에, 우리의 사고는 어디에 머리를 눕혔던가. 피라미드 같은 서열 속에서 개인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욕망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에 두터운 우정이 아닌 이기심으로 경쟁만을 했던 것은 아닐까. 숲은 그러한 의미에서 집단의 욕망이 발화한 하나의 자연 현상이었으며, 그것의 절정으로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에, 온갖 특권과 특혜를 둘러싼 숲의 치밀한 전략에 '그깟 거 베어버리면 그만'인 나무가 됐다. 자신은 아니라고 굳게 믿으면서. 외로이.

이제 누구를 위한 소통인지를 생각한다. 단어를 데려갈 문장 속에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염두에 둔 의미를 내포해야 한다. 그것은 계속해서 발화할 것이며, 그 발화가 멈추지 않는 이상, 말의 태생적이자 물리적 한계인 '과거'를 벗어날 수 있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않고, 속까지 내실 있는 소통의 격을 시집은 '문장'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아닐까.

"서울에서 분노한 사람이 부산에 왔다. 숙소에 짐을 내려 놓고 곧바로 서울로 갔다. 더 많은 짐을 싸가지고 오기 위해서 그는 분노할 것이다. 왜 서울에서 분노하는가? 부산에서는 분노할 것이 없는가? 그는 짐을 내려놓고 말했다. 분노가 쌓이면 또 싸가지고 갈 짐을 한가득 내려놓고 말했다. 여기도 사람이 많습니까? 충분히 많지요. 그러니까 떠났겠지요.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부산> 전문.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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