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는 모두 강철이고 오연주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서평
16.09.23 11:27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드라마 'W'의 한장면 ⓒ MBC

"너는 인간이 되고, 나는 만화 캐릭터로 남고. 너는 내가 만든 설정 값을 벗어나고, 난 내가 만든 설정 값에 갇혀 죽고. 인생이 참 재미있지 않냐."

지난 14일 종영한 드라마 'W'에서 극중 만화가 오성무(김의성扮)가 남긴 대사다. 송재정 작가가 쓴 웹툰 공간과 현실을 넘나드는 기발한 대본은 최고시청률 13.8%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송작가의 대본뿐 아니라, 주연인 이종석, 한효주의 연기와 1인 2역으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 준 김의성도 드라마의 인기에 한 몫을 했다.
'W'의 인기비결은 '웹툰-현실'이라는 공간적인 부분 외에도 '창조주-피조물'간의 관계설정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있었다. 주인공 강철(이종석扮)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실은 오성무가 만들어낸 곳임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 의지'를 가진 채 자신을 만들어낸 창조주에게 대항한다. 인생은 아이러니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성무의 말처럼 피조물 강철은 현실 속 인간이 됐고, 창조주 오성무는 그가 만든 웹툰 세계에서 죽고 만다.
사실, 우리가 있어 왔고 심지어 접근할 수 있는 곳 그 너머의 시공간을 유추할 수 있는 관점의 무한한 가능성이 바로 상상력이다. 송재정 작가는 전작 '인현왕후의 남자',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에서 '타임 워프'에 대한 상상력을 마음껏 보여줬다. 그 상상력 덕분에 우리는 제한된 기존의 관점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시각이나 접근 불가능한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관점을 바꾸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송재정은 아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수한 선택의 가능성과 자유,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허약한 상상력에 시달리면서 개인의 창의성만을 강요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형식과 제도에 얽혀, 특히 이성과 과학이라는 문명의 틀에 매여 인간 본연의 모습과 상상력을 잃어가고 있다. 단조로움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우리는 개별성과 비판 능력을 상실한 채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언제든 대체 가능한,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는 일차원적 인간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고정된 시각과 빈약한 상상력, 일차원적 삶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출간된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의 저자 닉 수재니스는 늘 오가는 출퇴근길에도 변화를 줘보라고 주문한다.

관점의 시각화 ⓒ 책세상

"나의 아내가 매번 다른 길로 출퇴근한다고 해보자. 이는 그녀의 인식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새로운 길에서 그녀는 시시각각 색다른 풍경을 경험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갈 것이다. 즉 통근길이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 가는 여정이 아닌 놀이하듯 이동하는 여행이 된다."

또한 저자는 우스꽝스런 걸음을 걸어보는 매우 단순한 시도만으로 그렇지 않다면 보지 못했을 다른 차원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일상적인 것 너머의 낯선 차원으로 몸을 던지려면 우리의 시야는 열려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상상력으로 가득한 춤사위는 활발하고 생생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주변의 따가운 눈총은 어쩌라고).
쿠바 출신의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도 수재니스와 비슷한 말을 했다.

"인간성이 위협받는 것 같을 때마다 나는 늘 신화 속 페르세우스처럼 다른 공간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이성적 세계나 꿈속으로 도망치자는 말이 아니라 접근 방식을 달리 하자는 뜻이다. 과거와 다른 시각, 다른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과 검증에 나서는 것이다."

닉 수재니스와 이탈로 칼비노의 말대로 관점을 달리하는 훈련을 했다면 이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현실 속의 최태민 목사는 '친일파'라는 창작집단이 그린 <박씨부녀기>라는 웹툰의 세계로 들어와 딸을 꼬여낸다. 아버지의 걱정과 만류에도 딸은 최목사의 꼭두각시가 된다. 아버지가 죽고 34년 뒤, 딸은 절치부심 끝에 최고 국가권력이 된다. 그녀가 이 위치에 오기까지는 정윤회와 최순실의 역할이 컸다. 웹툰 속의 국가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죽고, 전염병도 창궐하는 등 엉망이 되어간다.
너무 섬뜩한 거 아니냐고?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차라리 만화였으면 하는 바람에 상상해 본 것 뿐이다. 안타깝게도 <박씨부녀기>의 연재는 1년도 넘게 남았다. 1년 뒤 이 웹툰이 딸에게 해피엔딩이 될지, 비극적인 결말이 될지는 4천만 강철, 오연주의 손에 달렸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책세상

"우리는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심원한 내면의 깊이를 지니고 있고,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웅크린 수많은 차원을 만날 수 있다. 평면적이고 협소한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변화무쌍한, 다양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 닉 수재니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