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컴백 기자회견이 5일 오후 서울 청담동 청담CGV에서 수많은 취재진의 취재경쟁과 함께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다.

신화 컴백 기자회견이 5일 오후 서울 청담동 청담CGV에서 수많은 취재진의 취재경쟁과 함께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다. ⓒ 이정민


'그 날'은 허공을 보고도 1분에 300자를 칠 수 있다는 기자의 속기 신공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근 10년 만에 과거 우상들과 실물을 마주했는데, 모니터 화면 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데뷔 14년차 그룹 신화의 컴백 기자회견이 있었던 지난 5일, 나는 공과 사의 욕망이 부딪히는 기로에 앉아 있었다. 팬과 기자의 정체성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일단 사적인 궁금증을 공적인 질문 형식 안에 담기로 마음속에서 합의를 봤다. 세 가지 질문을 하고 답변을 기다리는데 에릭의 첫 마디가 애써 친 공적인 '결계'를 뚫고 들어왔다.

"오마이뉴스 오마이스타 기획기사 잘 봤습니다."

최근 신화의 컴백에 맞춰 <오마이스타>에서 기획한 기사 이야기다. 결계와 함께 얼굴 근육이 이완되며 헤벌쭉해진 표정은 '쿨'하지 못했다. 쿨할 수 없었다. 그가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한 명의 연예부 기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기자는 14년 전 팬으로 돌아갔고 신화컴퍼니 에릭 대표님은 오빠가 됐다.
 

 5일 오후 서울 청담동 청담CGV에서 열린 신화 컴백 기자회견에서 전진이 익살스런 대답을 하자 이민우, 에릭, 신혜성(왼쪽부터)이 박장대소를 하고 있다.

5일 오후 서울 청담동 청담CGV에서 열린 신화 컴백 기자회견에서 전진이 익살스런 대답을 하자 이민우, 에릭, 신혜성(왼쪽부터)이 박장대소를 하고 있다. ⓒ 이정민


그래, 나 팬이었다. "네가 플래카드 한 장만 덜 만들었어도..."

고백컨대, 내 청소년기의 팔 할은 '오빠'들이 키웠다. 솔직히 복수의 그룹, 다수의 오빠들을 탐닉했다. 이것이 사춘기를 지나 겪었던 '아이돌기'다. 마지막으로 신화를 좀 오래 앓았고, 아이돌기에서 졸업했다.

엄마는 그때 내가 플래카드 한 장만 덜 만들었어도 더 좋은 대학교에 갔을 것이라고 한탄하곤 한다. LED 야광봉을 흔드는 지금 팬들에게는 아날로그한 방식이겠지만, 우리 때는 대개 검은 바탕에 형광색 글자를 새겨 넣은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여러 장을 작업하다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간판디자이너와 견줄 수 있는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한 번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친구들과 함께 장인정신으로 작업 중이었다. '내가 오빠 때문에 못 살아'라는 신세한탄형 문장 중에 나는 '살'을 담당했다. 난이도 높은 리을(ㄹ)의 굴곡짐에 투덜대며 칼질을 하고 있는 중에 담임선생님에게 걸린 나는 '살'과 함께 복도로 소환됐다.

"너, 또 가수 애들 따라 다니냐!"는 불호령에 나는 일단 "교회에서 하는 거예요"라고 둘러댔다. 때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중순. "이게 무슨 글자인데?"라는 날카로운 질문이 파고들었다. '오빠 때문에 못 살아'라고 어떻게 말하나.

"살...살아 계신 주님이요."

나는 '살'과 함께 교실로 살아 돌아왔다. 앞으로도 그 날과 같은 임기응변은 내 생애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무교였던 나는 당시 발휘된 기지가 주님이 아니라, 오빠들을 향한 팬심 덕분이었다고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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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1집 수록곡 '천일유혼'으로 활동할 당시 신화의 풋풋한 모습

1998년 1집 수록곡 '천일유혼'으로 활동할 당시 신화의 풋풋한 모습 ⓒ SM엔터테인먼트


커밍아웃(?)을 하는 이유

그렇게 스무 살이 되고 오빠를 쫓아다니느니 눈앞에 손으로 만져지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 낫다는 현실과 타협하면서 아이돌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TV에 신화가 나와도 과거의 유물을 보듯이 보게 됐다. 심지어 팬심의 절정 단계라는 팬픽(팬+픽션)을 쓴 적도 있지만, PC통신 시대의 종료와 함께 파란 화면 안에 묻었다. ('절친'은 이 사실을 나를 놀리기 위한 흑역사로 사용하곤 한다) 

그러던 2004년, 7집 <브랜드 뉴(Brand New)>로 돌아왔던 신화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오빠가 아니라 남자였다. '지금부터 셋까지 셀게'라는 박력과 바로 '원 모어 타임'이라며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여지를 담은 가사는 흩어졌던 팬심을 모으기 충분했다. 물론, 아이돌기 때처럼 '활동'하지 않았지만, 전처럼 신화를 응원했다.

어쩌면 이것은 '커밍아웃'이다. 팬이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기사를 쓴 것은 14년 전의 설렘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이 최장수 그룹의 힘 덕분이다. 신화로 인해, 팬과 스타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는 관계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됐다.

기자라는 직업을 객관성 안에 잠시 가둬 두고 한때 팬으로서 말하자면, 오빠들은 여전히 우리를 '앓게'할 수 있다. 누군가는 남자 인생, 삼십부터라고 하지 않았나. '브랜드 뉴' 때의 감동을 다시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하앍'.  

그리고 다시 기자로 돌아와 다짐하건대, 과거의 팬심 때문에 기자 윤리강령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약속은 추측성 스캔들 기사를 쓰거나 대포 망원렌즈를 끼고 잠복하는 일 역시 없을 것이라는 거다.

 5일 오후 서울 청담동 청담CGV에서 열린 신화 컴백 기자회견에서 한자리에 다시 뭉친 멤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5일 오후 서울 청담동 청담CGV에서 열린 신화 컴백 기자회견에서 한자리에 다시 뭉친 멤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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