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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죽헌 성상문 및 사육신 추모제향
3일 충남 홍북 노은리 충문사 및 노은단에서 거행
최철 (leadtime)
  
▲ 성상문 선생 추계제향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충문사에서 거행된 성상문 선생 추계제향에 위촉된 헌관(좌로부터 이완수 홍성군수권한대행 부군수, 홍성교육청 이동의 교육장, 성상문 후손 성기문
ⓒ 최철
성삼문추모제향

매죽헌 성상문과 사육신에 대한 추모제향이 지난 3일 11시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충문사와 노은단에서 거행됐다.

 

홍주향교(전교 방학수)에서 주관한 이날 제향은 창녕 성씨 종진회 회원들을 비롯하여 각 기관단체장 및 마을주민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초헌관에 홍성군수 권한대행 이완수  부군수, 종헌관에 홍성교육청 이동의 교육장, 종헌관에는 창녕성씨 문중 대표로 성기문씨가 위촉되어 거행되었으며, 이어 노은단에서는 1456년 단종을 몰아낸 수양대군을 처지하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다 발간되어 처형을 당한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에 대한 합동 추모 제향이 거행되었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과 사육신

창녕인 성삼문의 자는 근보이고, 호는 매죽헌이다.

1418년(태종 18년) 아버지 도총관 성승과 어머니 박씨의 장자로 홍북면 노은리 적동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해산할 때에 공중으로부터 "낳았느냐"라고 묻는 소리가 세번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삼문"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천자가 단정하고 총명하며 성품이 강직하더니 세종 무오년에 문과에 합격하고, 정묘년에는 중시에 장원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가 되어 신숙주등과 함께 어학과 음운을 연구하였고 사성을 연구함으로써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하였다.

  
▲ 사육신 추모제향 홍복면 노은리 노은단에서 거행된 사육신 추모제향 모습
ⓒ 최철
사육신

경오년 2월 18일 세종이 승하하고 대위(代位)에 오른 문종(文宗)은 선왕의 뜻을 이어 집현 전 학사들에게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입직(入直)하는 학사들에게는 때때로 주효(酒肴)를 하사할 뿐 아니라, 내시에게 명하여 금구(襟具)를 하사하여 학사들로 하여금 감읍(感泣)케 하였다. 그러나 문종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겨우 2년 되는 임인년 5월14일 승하하고 12세 밖에 안 되는 단종이 보위를 계승케 되었다. 고명(顧命)을 받은 신하중의 한 사람인 우사간(右司諫) 성삼문은 어린 왕이라 할지라도 군신의 도리는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한 달에 두 번 씩 백의로 근정전(勤政殿)에 나와 군신들의 조하를 받을 것을 상주하고, 문종 재세시(在世時)에 때때로 탁고(託孤) 하던 선왕(先王)의 은총에 보답하기에 충성을 다하였다.

단종이 즉위한 후 신숙주(申叔舟), 정 인지(鄭麟趾),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을 모사(謀士)로 하고 역사인 홍윤성, 양순정으로 하여금 고명대신(顧命大臣)인 김종서, 황보인, 정본을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아우인 안평대군 용(瑢)을 유배시켰다가 죽였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되어 국정은 물론이요, 병권(兵權)까지도 한 손에 장악하고 단종이 재위한 지 3년이 되는 올해 년에 왕위를 찬탈하였다.

그리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이란 이름으로 영월(寧越)로 추방한 다음 그 해 윤 6월 16일 선위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예조승지(禮曹承旨)로 국보를 보관한 성삼문은 통곡을 금 치 못하고 여러 차례 자결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결하는 용기로 단종의 복위(復位)를 위하여 사력을 다할 것을 결심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당시 조정에는 세종에게 충성을 다하던 신하 중에 신명(身命)을 보전하기 위하여 본의에 없는 복종을 하는 일파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비밀리에 세조와 그 일당을 숙청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등 세칭 사육신이 있고,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한명회, 신숙주 등의 무리가 있었다.

병자년에 명나라의 사절을 초청하여 대연(大宴)을 베푸는 자리에서 거사할 것을 결심한 복위파 성승, 유응부, 박정 등은 운금(칼무장하고 왕을 시위하는 관직)을 시켜 일을 치르려고 하였으나 연회 장소가 협착하다는 이유로 운금의 입장이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다음의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는데 김찬이란 자가 그만 이 사실을 밀고하여 사실 전모가 탄로 되었다.

세조는 대경실색하여 즉시 성삼문을 친국(親鞠)하기 시작하였다. 세조의 힐문(詰問)에 삼문은 태연히 웃으며 "그대의 말이 모두가 옳다." 하고 시인하였다. 세조가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느냐" 라고 꾸짖자 삼문이 "고성으로 고주(故主)를 복위(復位)하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도리인데 배반이란 무슨 말이오. 내 일찍 죽고자 하였으 나 죽는 것보다는 거사를 하는 것이 합당하여 거사를 도모하였는데 거사 전에 발각된 것이 오" 라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너는 내가 주는 녹(祿)을 먹고 나를 따르지 아니 하니 그것이 배반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꾸짖자 삼문은 "나는 진사(進士)가 주는 녹을 먹지 아니하 였으니 내 집을 적몰(籍沒)하여 보면 알것이오" 라 하였다. 세조가 대로하여 작형(灼刑)을 명하고 불에 달군 쇠로 전신을 단근질 하나 추호도 안색의 변함이 없이 태연하였다. 세조는 옆에 시립한 신숙주를 바라보며 "전일에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대왕께서 원손(단종을 말함)을 친히 안으시고 유신들을 돌아보시며, 과인이 백세후에 경등(卿等) 은 이 아해를 잘 보호하여 달라고 하던 옥음(玉音)이 지금도 귓가에서 쟁쟁하거늘 너는 홀로 잊었느냐" 고 하니 신숙주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고 한다.

세조가 삼문의 인품과 재질을 아까워하여 여러 사람을 옥중에 보내어 전향하도록 설득하였으나 끝끝내 거부하였다. 그러나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태연할 뿐 아니라 "너희는 현주(賢主)를 만나 태평하게 살아라. 나는 지하에 가서 선대왕을 뵈오리라" 하고 형장에 도착하여 감형관인 김명동의 입회하에 처형되었다.

그 당시 아우되는 삼빙, 삼고, 삼성, 그리고 아들 맹첨, 맹평, 맹종, 헌택과 어린 손자들도 다같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그 후 그 집을 적몰(籍沒)하니 창고에는 녹미(祿米)만이 쌓여 있는데 녹미를 받은 날짜가 기록되어 있고 방에는 짚자리가 깔려 있을 뿐 아무런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자료 : 홍성군청>

 

2009.11.04 11:04 ⓒ 2009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