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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권의 복지 논쟁에 숨어 있는 것



이건희 회장의 손자에게도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을 제공해야 하냐며, 선택적 복지로 돌아가자는 집권세력의 논리에는 한 가지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부에 따른 반인륜적 차별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수 세대에서 수십 세대를 먹여 살릴 만큼 부를 축적한 극소수의 후손들에게 돌아갈 쥐꼬리만도 못한 복지예산을 빌미로, 그들의 엄청난 부를 인정해주는 것이 선택적 복지의 핵심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부가 급속도로 늘어났고, 식품과 제품이 넘쳐나는 세상이 됐지만 여전히 하루 1~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30억 명에 이르며, 하루에도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소수에게 독점되는 한계가 없는 부의 불평등과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하는 정치철학의 부재 때문입니다. 





인류는 보편적 복지를 하고자 하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단지 한 사람과 한 가족, 한 가문의 수중에 수십조에서 수백 조에 이르는 부가 집중돼 있어서 그렇지, 이들의 부에 제대로 된 세금을 물리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보편적 복지가 가능합니다. 



구태여 다른 행성에서 도저히 경제성이 나오지 않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구축하느니, 생명체에 특화된 유일한 행성인 지구에서 다 같이 잘사는 법을 찾기만 하면 보편적 복지는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인류 전체의 부란 70억 명이 아니라 700억 명이라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넘쳐납니다. 



선택적 복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거대한 관료제와 시장경제에 기반하는 국가(정부)의 우선순위에 조금만 수정을 가하면 전 국민에게 보편적 복지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정책적 의지만 있으면 가능한, 이런 미세조정이 전 세계 국가로 퍼지면 인류는 보편적 복지를 통해 공존이 가능합니다.





선택적 복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차별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도 부의 축적에 어떠한 제한도 없는 무한대의 차별을 전제로 합니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미세조정을 위해 사회적 합의만 이루어내면 얼마든지 보편적 복지가 가능한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차별을 줄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 사이에는 차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극대화된 차별을 1980년대 이전으로 줄이고자 하면, 성장과 개발이란 명목 하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부채ㅡ이자를 통해 슈퍼리치의 금고를 늘려준다ㅡ를 정치적 합의를 통해 탕감하고자 하면,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의무이자 인간의 권리가 됩니다. 



우리가 차별을 얼마까지 인정할 것이냐, 성장이란 명목 하에 소수에게만 부와 권력과 기회가 집중되는 세습자본주의를 언제까지 인정할 것이냐, 불평등을 공고히 하는 역할에 사로잡힌 국가의 탈선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이냐에 따라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를 둘러싼 논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즉 보편적 복지는 의지의 문제인지 재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층민과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지혜택을 집중하자는 선택적 복지는 소수에게 집중되는 부의 불평등을 전제로 하며, 동시에 기회를 독점하는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국가 단위의 최초의 복지가 통치의 수월성을 위해 도입됐듯이, 경제규모가 세계 14위인 나라에서 선택적 복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복지 수혜자들을 정치경제적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가난하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가능합니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공약을 지키려는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P.S. 글만 올리고 댓글에 답하지 못하는 것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건강해지면 늦게라도 일일이 답글을 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