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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ote/한국소설

불친절하지만 끌리게 되는 소설 -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주의 : 본 포스팅에는 소설의 결말을 암시하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소설의 주된 정서를 이루는 충격적인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책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부디 책을 먼저 접하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서점을 지나가다가, 혹은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충동적으로 구매해서 막 받아본 당신이라면...

저는 책의 날개부분을 먼저 보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작가의 작은 사진 한 컷과

황정은 1976년 서울 출생


단 한줄....


의아할 수도 있고, 뭐지 이 작가는... 도대체 편집자는 어떤 생각으로...? 라는 의문을 가지고... 이 소설의 첫인상은 그렇게 시작될 것이고... 소설이 끝날때에야 이 또한 의도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어떤 작품을 써왔는지, 어떤 성격을 가진 작가인지, 아무런 정보 없이 접하게 된 제 인생의 첫 '황정은' 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너무도 불친절하고 기존 작가 소개에 대한 반항일지도 모르는 형식으로 책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장편소설이라는 분류를 붙여놓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경장편이라고 해야할까요?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한 이 책을 처음 꺼내보고 손에 쥐었을 때의 두께감으로 저는 제일 먼저 마지막 페이지의 숫자를 찾아보게 되었고 160쪽 남짓한 짧은 분량은 "책을 펴자마자 1시간이면 후루룩 읽겠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죠.


하지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는 반나절은 걸렸던 것 같습니다. 책을 중간에 내려 놓은 적도 잠깐 화장실을 간다거나 물을 먹으러 간 정도지... 긴 끊김도 없었습니다.

또한 전혀 지루하다거나, 주제의 무거움에 질렸다거나, 또한 작가의 거침없는(분명 의도된) 화법에 깜짝놀랐다거나 하는 바 없이 작품에 몰입해서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보며 책을 읽어내려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 소설에서 현실로 빠져나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소설에는 큰따옴표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대사는 인용부호 없이 나타나고 줄바꿈 만으로 이게 어떤 캐릭터의 대사인지 짐작해야 합니다. 때문에 작가의 표현들이나 주인공이 동생에게 밤마다 해주는 이야기들은 한편의 짧은 시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소설의 어둡고 무거운 주제와 대비되는 신비롭고 몽환적이며 우습기도 한... 그러면서도 욕설 사이사이 행간에서 느껴지는 동생에 대한 형의 깊은 사랑을 훔쳐볼 수 있는 대사들이 여기저기 새겨져있습니다.



또한 이 소설은 문학시간에 배웠던 수미상관(=ㅁ=!!)의 구성이라고나 할까요...

책의 서두에 나온 구성이 뒤에서도 반복되고, 중간중간 의미 없이 나온듯한 문장과 문단들이 극의 클라이막스에 다시 등장하면서 극의 진행을 놓친 독자들에게는 당혹감을... 그리고 잘 따라오던 독자들이라도 앞의 내용이 이렇게 사용된 점에 대한 반전의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책을 보기전 책날개에 있던 작은 사진으로 봐서는 전혀 이런 욕을 하지 못할 것 같은 황정은 작가의 모습을 보고 생긴 선입견과는 달리... (제목을 더 눈여겨 봤어야 했다...)


'씨발','씨발됨', '씨발년'이 난무하는 거친 텍스트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매우 친숙하지만, 공적인 소설... 특히 순수문학이라는 고고하고 도도할 듯한 영역 안에서 이런 욕이 이렇게 자주... 격하게 등장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가정폭력이라는 어두운 주제.

누구나 사회로부터, 혹은 또래로부터 폭력과 고통을 겪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이들에게 유일한 피난처가 될 수 있는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겪어보지 못한 자들이라도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짐작이 가는 폭력입니다.

이유없는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점점 망가져가는 아이들... 또한 이 폭력을 가하게 되는 '씨발년'인 주인공의 어머니도 사실은 어린 시절 겪은 가정폭력에 기인한 소설의 표현을 빌자면 '포스트 씨발년'이라는 부분은... 가정폭력이 단순한 육체적 고통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멈출 수 없이 번져가는 유전병에 가까운 존재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씨발' 이라는 단순한 욕설은 어머니로부터 폭력을 당한 뒤 잠자리에서 잠못이루는 동생의 칭얼댐에 못이겨서 해주는 주인공의 신비로운 이야기와 섞여들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아직도 떨어지고, 여태 떨어지고 있는 거다. 상당히 어둡고 긴 굴속을 떨어지면서 앨리스 소년이 생각하기를,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상당히 오래 전에 토끼 한 마리를 쫓다가 굴속으로 떨어졌는데… 아무리 떨어져도 바닥에 닿지를 않고 있네… 나는 다만, 떨어지고 있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계속, 계속… 더는 토끼도 보이지 않는데 줄곧… 하고 생각하며 떨어지고 있었던 거다. 언제고 바닥에 닿겠지, 이제 끝나겠지, 생각하는데도 끝나지 않아서, 이게 안 끝나네, 골똘하게 생각하며 떨어지고 있었던 거다. 

… 
… 
그래서 어떻게 되냐. 
뭐? 
앨리스 새끼는 어떻게 되냐." - 책속에서


이 소설을 음식으로 표현하자면....

김밥집에서 김밥을 시켰는데 김, 어묵, 햄, 당근, 시금치, 달걀지단, 쌀밥 을 전부 따로따로 내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진정 소설의 맛을 보기 위해서는 늘 김밥천국 아주머니가 싸주던 김밥만 먹어봤지 한번도 내 손으로 싸본 적 없던 김밥을 손수 싸야 하기에 불편하기도 하고...

편하게 김밥이나 먹고 식사를 때우러 왔는데 귀찮게 이게 뭐하는 짓인지 주인장에게 대한 분노가 들 수도 있지만..


막상 싸서 먹어보면 숨겨져 있던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요... 새로운 매력이 넘치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이 소설을 한 번 읽고는 아직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 같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분량도 짧았고 소설이 전달하는 화법도 명확하지만... 소설이 전하는 메세지는 제대로 읽었는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와닿지 않았던 소설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고 몇년이 지난 뒤 우연히 펼쳐봤을 때 술술 읽히면서 가슴을 저미던 적이 몇번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도 눈에 띄는 책장에 꽂아두었다가 언젠가 다시 한 번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 - 10점
황정은 지음/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