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까칠한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는 방법

어제는 21세기교육연구원 주최 "즐거운 교육세상 포럼'에 다녀왔습니다. 교육에 대한 관심 보다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어 기꺼이 모임에 참가하였죠. 저는 '교육'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고 관심 분야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느끼고 공감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기업인, 교사, 학생, 음악인, 지역 운동가. 방송 PD, 마술사 등 다양한 직업군이 참석하여 교육에 대한 자기 시각과 경험 등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물론 저야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에 단지 듣기만 하였습니다. 








▲ 대학생이 생각하는 두려움과 공포

다들 좋은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참석한 대학생의 속 깊은 이야기가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회에 만연한 두려움을 교육적 측면에서 다루어주고 해결해 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한참 발랄하고 꿈 많을 나이에 벌써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 인식하고 그것이 극복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젊은 친구에게 나이보다 성숙하다고 칭찬을 해주어야 할지 두려움일랑 잊어버리고 젊은이의 패기와 용기를 가지라 권유해야 할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인간 본질적 측면에서의 것과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것, 두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본연의 공포는 종교와 철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섣부른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공허한 덕담 밖에는 안되고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면서 풀어가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려움은 한 인간에게 바람과 같이 왔다가 소리소문 없이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인생 전체에 어두움을 드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수 없듯이 인간 본연의 두려움과 공포는 절대 본질의 영역입니다. 


예민한 예술가는 이 두려움을 벗 삼아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지만 잘못되었을 경우 극심한 우울증 또는 조울증에 빠져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인간 본연의 두려움과 공포는 불행하지만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스스로'가 겪고 이겨내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 존재의 두려움마저도 '정신'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라 바라보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종교와 철학은 '사치'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에게는 인간 본연의 근원적 두려움과 공포는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마저 사회적 관계 개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 두려움의 두가지 , 인간 본연의 것과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것 

그렇다면 두번째 사회적 관계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취업'을 들 수 있습니다. 아마도 대학생들을 가장 두렵고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좁은 취업문'일 것입니다. 그 이전에 너무나 올라버린 '등록금' 부담도 현실적이 두려움일 수 있구요. 


돈 많은 부모 만나서 별 탈 없이 학교 다니다 부모가 물려준 회사에서 과장 부장 달고 또는 빌딩 물려받아 임대료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의 종류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회적 관계의 두려움과 공포라고 따로 분류한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공포가 될 수 없는 두려움의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사회적 관계의 두려움은 해결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사회적 관계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 토익과 상식 공부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비정규직, 대기업의 횡포, 정리해고의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사를 반영시키고 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을 인간 본연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오류

그런데 현재 젊은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회적 관계의 두려움을 본연적 공포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든다는 것입니다. 취업이 안되고 높은 등록금에 팔다리가 휘는 문제를 술집에 들어앉아 술로 풀고, 또는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함으써 풀려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참여로 해결해야할 문제를 종교적 철학적 접근으로 풀려한다는 것입니다. 술을 먹는 것이 어떻게 철학적 접근이냐구요? 술을 먹으면서 오가는 온갖 푸념 중에 상당수는 철학적 사변에 의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학과라고 하면 의례 술을 잘 먹을 것이다라는 선입관을 갖는 것이구요,


그리고 기도의 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오직 자기만 취업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의 취업문이 넓어지게 해달가고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나라의 취업 문제가 사회적 문제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기도이지요.










▲ 취업을 잘하려면 '취업의 질'을 높여라 

탐욕스러운 재벌은 직원을 부속품으로 바라보고, 부패한 정치는 그것을 용인하여 더 많이 해고하고 더 적은 급여에 대한 사회적 약속을 완성시켜줍니다. 타락한 언론은 그것이 나라를 살리기 위한 궁여지책이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옮기며 취업 제도가 잘못된 것을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취업을 하고자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못된 사회 구조에 의한 희생자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무능하고 잘못하여 사회적 낙오자가 된 것이라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의 젊은이들이 이러한 사고 구조를 갖게 되면 취업에 대해 피해의식을 느끼고 두려움과 공포에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혼자 열심히 공부한다고, 성경, 불경, 코오란을 옆에 끼고 지극정성 기도를 드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혼자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하여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취업문이 높다는 것은 취업의 질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중년 이후 정년 또한 보장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

취업 하나만을 놓고 바라보았을 때도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결국 사회를 개선시키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취업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합쳐야 자신이 원하는 곳에 취직할 수 있고 취업이 되고서도 안심하고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살면서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에 빠져 찬란한 생명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손실입니다. 인간 본연의 두려움과 공포는 스스로 잘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회적 관계에서의 두려움과 공포는 어서 빨리 실체를 파악하여 적절히 대처해야 합니다. 


가장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은 올바른 선거를 하는 것입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양산이 국가 경쟁력의 기초라고 떠드는 자들을 뽑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가 거짓말장이고 사기꾼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자들이 정치인이 되어 취업과 노동의 질을 극도로 저하시켜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노동관련 집회나 모임에 적극 참여하거나 후원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자기 밥그릇 때문에 거리를 헤맨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얄팍한 지식입니다. 그런 분들이 주장하는 바가 사회에 관철되지 못하고 좌절될 때마다 우리 자신의 노동의 질도 함께 꺽이고 저하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미디어를 갖자

그리고 이러한 올바른 사실을 진실되게 알리는 자기만의 '언론'을 하나씩을 가져야 합니다. 시절이 매우 혼탁합니다. 사이비 언론이 도리어 진실을 가리고 왜곡하며 너무나 많은 정보를 제공함으로 무엇이 옥석인지 헛갈리게 만듭니다. 


현재는 '뉴스타파'와 같은 독립 대안언론이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기업의 광고 없이 100% 시민 후원에 의해서 어디에 치우침 없이 진실을 찾아 다니는 제대로된 언론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이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위장되고 과장된 공포와 두려움인지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언론에 식상했다면 왠만한 기자보다 더 언론인스러운 '아이엠피터' 또는 '오주르디' 같은 블로거의 글을 탐독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들은 개인의 시각에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제대로된 1인 미디어 입니다. 




▲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화입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희망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 사회는 매우 행복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공포에 젊음이 먹혀버린다면 그 사회의 앞날은 매우 절망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