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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세 남자가 사냥으로 깨달은 철학적 의문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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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김연수/2001년

 

1980년대와 1990년대 대학가 풍경은 누가 봐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에 대한 성취감과 치열했던 민주화 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지 못했던 좌절감이 혼재된 시대였고 새로운 신세대 문화가 태동하는 시기였기에 1990년대 대학가는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가 서서히 싹트는 시기였다. 한편 1980년대와 달라진 1990년대 대학가 풍경은 필자가 새내기였던 1992년을 기점으로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는 게 좀 더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1991년에 발생했던 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민주진영의 분열로 6월 항쟁 이후 다시 정권을 잡게 된 노태우 군사 정권이 집권 4년차로 접어들면서 공안통치의 칼날을 더욱 매섭게 휘두르던 때가 바로 1991년이었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중 진압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면서 시국집회는 대학가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시위와 집회가 확산되었다. 그 와중에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면서 많은 대학생들이 분신과 투신으로 숨지는 사건이 줄을 이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노태우 정권은 엄청난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려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민주진영에 엄청난 도덕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다시 불붙은 민주화 열기는 급격히 냉각될 수밖에 없었다. 소위 92학번부터 대학가는 정치투쟁 대신 학내문제를 이슈로 투쟁하는 새로운 집회문화로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연수의 소설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인간탐구에 관한 철학적 의문을 던져주고 해답을 모색하고 있다. 소설은 1987년 겨울, 입대를 앞둔 한 대학생이 화자로 등장해 인간탐구에 관한 세 가지 의문을 품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 의문은 주인공 '나'가 그해 5월 학교에서 열린 집회 도중 자살을 용서받지 못할 죄로 여기는 카톨릭 신자였던 한 학생이 분신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충격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원입대를 신청하는 원인이 된 것으로 '왜 어떤 인간은 자기 영혼마저 지옥에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이다. 

 

두 번째 의문은 실연이 아픔을 겪고 지금은 사냥에 빠져있는 삼촌에게서 비롯된다. 치과의사였던 삼촌은 카페 '물망초' 주인이었던 여자를 사랑했는데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헤어지게 되고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한 삼촌은 수면제를 과다복용해 자살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주변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이런 삼촌을 보면서 '나'는 '왜 어떤 인간은 그게 죽는 길인 줄 알면서도 철부지처럼 터무니없는 오기를 부려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세 번째는 덕유산 인근에서는 이름난 몰이꾼이었던 도라꾸(트럭) 아저씨를 알게 되면서 품게 된 의문이다. 삼촌에게서 들은 도라꾸 아저씨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다. 도라꾸 아저씨가 살던 곳은 유명한 멧돼지 사냥터로 어려서부터 낫 대신에 엽총을 잡았다고 한다. 그런 도라꾸 아저씨가 삼촌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날 총을 꺾어버렸다'고 한다. '무슨 마음을 먹어야지 아침에 이 닦고 세수하듯이 평생 해오던 일을 하루아침에 딱 그만둔단 말인가?' 는 소설 화자 '나'가 도라꾸 아저씨에게 품게 되는 세 번째 의문이다. 

 

소설은 이처럼 무거운 철학적 의문을 던지면서도 그 해답에 접근해가는 과정은 등장인물간 만담이라는 다소 가벼운 방식을 선택한다. 인생이란 그렇게 완고하면서도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저자의 의도적 설정은 아니었을까. 저자는 화자인 '나'가 던진 세 가지 의문에 대해 동지가 지날 무렵 리기다소나무 숲으로 떠났던 멧돼지 사냥을 통해 대답해 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남자는 공격해 오는 멧돼지에게 총 한 번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놓치고 만다.  

 

 

삼촌이 총을 쏘지 못한 이유는 공격해 오는 멧돼지를 보면서 옛 애인이었던 물망초 여주인의 살려달라는 눈동자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감을 느낀 삼촌은 칼을 들고 애인을 찾아가 같이 죽고자 했지만 수면제 약병을 꺼내면서 자신도 죽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죽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던 여자를 떠나보내고 자신만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삼촌의 죽는 줄 알면서 부렸던 오기는 애인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깨달았지만 애인과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에서 오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소설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대답은 도라꾸 아저씨의 변명(?)을 통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는 어미 멧돼지를 잡기 위해 새끼 멧돼지를 죽이는 암수(속임수)를 썼던 부끄러운 기억 때문에 총을 쏘지 못했다. 새끼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고 죽기 직전까지 몰이꾼에게 덤비려 했던 어미 멧돼지를 보면서 산다는 것,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저 봐라, 리기다소나무도 있고 직박구리도 있다. 저래 다 살아가고 있는 기라. 산 것들 저래 살아가게 하는 일이 을매나 용기 있는 일인가 나는 그때 다 깨달았던 기라. 내가 해수구제한다꼬 싸돌아다니면서 짐승들 쏴 죽인 것도 용기 있어서가 아이라 나하고 마누라하고 애새끼들하고 먹고살아 갈라고 그런 거라는 걸 그때야 알게 된 거다."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중에서-

 

삼촌도 도라꾸 아저씨도 과거 경험을 통해 인간에게 생명이란, 더 나아가 자연까지 확대한 우주적 의미의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경외감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급박한 상황에서도 어미 멧돼지에게 감히 총을 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 집회 도중 분신자살한 학생을 보며 품었던 의문은 어떻게 결론 지어졌을까. '나'가 멧돼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던 것은 순전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을 게 뻔한 길인 줄 알면서도 죽은 새끼를 찾아온 어미 멧돼지를 보면서 '나'의 의문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던 이타적 희생이라는 결론을 암시해 준다. 

 

저자가 말하고자 한 생명의 소중함과 경외감은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숲을 만드는 리기다소나무와 어디에도 먹이라고는 없어보이는 한겨울에 창공을 날고 있는 까치를 통해 형상화되기도 한다. 또 화자가 입대를 앞둔 학생이라는 설정에서도 우리가 생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이 용기다. 그렇게 생명은 그 자체로 가장 소중한 가치고,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생명마저 정권연장의 도구로 이용한 국가권력의 폭압성을 여지없이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다. 이런 국가권력의 폭압성은 민주주의가 절정에 달했다는 요즘에도 아무 꺼리낌없이 자행되고 있다. 용산참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명을 그저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시켜 버린 게 바로 민주주의 꽃이 만개하고 있다는 이 땅의 현실이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로 유서가 대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3년째 대법원은 재심개시 결정을 미뤄왔다. 다행히 며칠 전에 대법원이 재심개시를 결정했다고 하니 20년 넘게 자살 방조 아니 자살 공조라는 억울한 누명 속에 마음은 물론 몸까지 망가질대로 다 망가진 강기훈씨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이 비추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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