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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왜 징후를 예감하는 사람은 외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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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부풀어오르다)/천정완/2011년

 

런던 올림픽이 끝난지 2주가 되어가지만 그 날의 감동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한 켠을 메우고 있다. 이번 올림픽은 오심이 유독 많았고 그 대상이 우리 선수들인 경우가 많았던지라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메달을 목에 거는 장면들은 두배 세배의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체조 도마 부분에서 자신의 이름이기도 한 '양학선'이라는 독보적인 기술로 세계를 제패한 양학선 선수의 활약은 올림픽이 주는 감동의 절정이었다. 게다가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 형식의 방송 프로그램들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감동의 실체를 애국심으로 단순화하기에는 선수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예술도, 문학도, 소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의 감동이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읽는 이의 수없이 많은 삶의 파편들이 소설 속 장면들에 투영되어 있다. 천정완의 소설 <팽>은 작년 겨울에 처음 읽었다. 2011년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이기도 한 <팽>을 처음 읽었을 때 감상은 먹먹했다. 소설 제목처럼 가슴이 터질 듯 그렇게 먹먹했다. 단순히 먹먹하다는 감상만으로 포스팅을 할 수 없어 미루다 런던 올림픽 체조 도마에서 금메달을 딴 양학선 선수를 보면서 문득 다시 떠올린 소설이 <팽>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소설 속 중심 인물의 직업이 유망한 체조선수였기 때문이다. 

 

 

소설 <팽>은 창비신인소설상 선정 이유에서도 보듯 현실을 이루는 수많은 결 가운데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미묘한 틈 하나를 포착해내는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하나의 세계로 완성해낸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체조선수였던 형의 갑작스런 죽음과 형이 죽고나서야 비로소 떠올린 형의 죽음을 예감했던 말들과 주인공 내가 형과의 일상을 통해 순간순간 느꼈던 불행의 징후들을 조심스레 포착해 간다. 누구나 일상에서 행운과 불행의 징후들을 경험한다. 과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징조, 징후(Omen). 저자가 형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실체도 불분명한 징조를 말했던 형과의 일상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속신적 믿음의 예찬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나를 중심으로 흩어진 삶의 파편들을 모아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팽膨'은 부풀어 오른다는 뜻이다. 소설에서 팽은 우선 감정의 상태를 나타낸다. 슬픔이나 눈물을 참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횡경막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또 하나는 형의 갑작스런 죽음의 원인이다. 즉 병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팽'은 삶과 죽음을 연결시켜 주는 추상적 의미로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끄집어내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형수의 한숨 섞인 말이 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이든 골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형은 오랜 시간 동안 하루도 운동을 거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상태를 완벽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형의 말대로라면 그의 몸은 복부부터 지방이 덮여 팽창하기 시작해 가슴과 얼굴로 번지고 있었다. -<팽> 중에서-

 

철봉 선수였던 형은 시합을 앞두고 고난이도의 기술을 연습했지만 결국 갑작스럽게 뚱뚱해진 몸 때문에 선수생활을 접고 생활체육 강사로 일한다. 형은 늘 벽 귀퉁이에 선 채로 천장을 주시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천장에서는 물이 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물이 뚝뚝 떨어진다. 형은 건물의 단순한 누수현상을 어떤 징조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형은 그 물을 받을 무엇도 준비하지 않는다. 형을 애써 안심시키지만 나 또한 그런 형을 보고 어떤 징후를 예감한다. 형의 동생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포착하지 못할 그 어떤 것을 나는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형은 나쁜 징조임을 예감하면서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는다. 서로가 그렇게 형에게 일어날 어떤 징조들을 담아두고 있을 뿐이다.

 

징후는 보통 사실과는 다른 근육을 가지고 있다. 햇살이 맑은 날 굳이 우산을 챙기고 싶은 마음, 혹 적중하지 않더라도 그 당시에는 분명 무엇인가를 예감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징후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는 것, 타인에게 이해를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징후를 예감하는 사람은 외롭다. -<팽> 중에서-

 

형의 장례식장 풍경들은 지극히 상투적이고 사무적이다. 주검을 두고 비용문제로 실랑이 하고 연락을 받고 온 형의 동료들은 조문의 형식과 절차에 우왕좌왕하고 의례적으로 통곡을 한다. 유리창 너머로 분골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한숨을 쉬며 되새김질 하듯 껌만 씹는다. 죽은 이의 치열했던 삶은 이미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징후를 예감하는 사람이 외로운 이유는 타인과 단절됐기 때문이다. 비단 징후가 타인에게 이해를 요구할 수 없는 비과학적 현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허황된 속신적 믿음 같지만 징후를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고독한 군중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고독을 참지 못한다. 자꾸 군중 속으로 뛰어들고자 한다. 그러나 군중의 실체는 무한경쟁과 생존경쟁만이 존재하는 이기적인 개인의 기계적 결합일 뿐이다. 권력과 자본은 이런 기계적 결합을 부추긴다. 자본주의가 연명해가는 방식이다. 생존경쟁에서 도태된 다수의 비루한 현실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방치되기 일쑤다.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은 공멸을 피하기 위한 아름다운 인간의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징후를 예감하는 사람이 외로운 것은 어쩌면 소통 뒤에 오는 주변의 불행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포장마차에서 은퇴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낡은 구두를 벗었다. 자고 싶다는 말과 함께.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문을 닫지도 않은 채로 뚜벅뚜벅 거실로 걸어들어갔다. -<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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