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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단 5분간의 회담이 결렬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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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의 <오 분간>/1955년

"저걸 좀 내려다보아라. 과거는 잊어버리자. 저걸 수습해야 할 거 아니냐? 요컨대 너와 나의 싸움이니 적절히 타협하잔 말이다. "
"그게 역사죠. 역사는 당신과 나의 투쟁의 기록이니까."
"그러나 이건 진전이 아니라 말세다."
"당신의 종말이 가까웠으니까……"
"내 종말은 즉 세상의 종말이 아니야?"
"흥, 그거 또 괴상한 얘기로군."
- <오 분간> 중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신이 구름 위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며 단 5분간의 짧은 회담을 하고 있다. 그 사이 인간세상에서는 프로메테우스와 신을 대리하는 자들이 열변을 토해내고 있다. 그러나 회담의 아름다운 결정체가 타협이거늘 프로메테우스와 신 사이에는 접점이 보이지않는 평행선만 존재할 뿐이다.

"지나치게 자기 재주를 믿는 것도 사고야. 이제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알아야지."
"막다른 골목에도 빠질 구멍은 있답니다."
"강철에도 구멍이 있다더냐?"
"뚫으면 있죠."
"자신도 도를 넘으면 오만이야."
- <오 분간> 중에서-

김성한의 소설 <오 분간>은 제목만큼이나 짧은 소설이다. 한국전쟁의 참상이 낳은 부조리한 현실을 신화적 요소를 가미해 그만의 독특한 글쓰기가 돋보이는 고발 소설이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신들의 세계에서 5분은 인간세상에서 수천년의 물리적 시간에 해당된다. 이 소설에서도 프로메테우스와 신이 회담하는 5분 동안 인간세상에서는 각각의 대리인들이 수천년 동안 있어왔던 투쟁의 기록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프로메테우스와 신의 회담 주제는 무엇이었으며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둘 사이의 회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로메테우스가 상징하는 바를 알 필요가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으로 이름 그대로 해석하면 '미리 아는 자'를 의미한다. 참고로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은 '나중에 아는 자'라는 의미의 에피메테우스다. 이들의 이름이 프롤로그(Prologue, 머릿말)와 에필로그(Epilogue, 맺은말)의 어원이 됐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저주를 받아 코카서스산의 큰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형벌을 받게 된다. 프로메테우스가 이런 엄청난 고통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인간에게 지혜를 주기 위해 제우스의 불을 훔친 죄였다. 제우스는 이를 벌하기 위해 인류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를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 '미리 아는 자' 프로메테우스는 이 일로 인간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하고 말았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또 하나는 '미리 아는 자'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미래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프로메테우스는 윤동주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에게 고난의 상징이자 '자유의지'의 상징으로 표현되곤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프로메테우스와 신 사이의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인간세상에서는 각종 부조리와 부패, 비리, 불륜 등 혼돈의 시대가 수천년간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전쟁 후 종로 뒷골목의 풍경도 등장한다. 이정민이라는 어느 인텔리를 통해 전후 방황하는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저자가 프로메테우스를 전면에 등장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혼란이 무질서해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최소한 신의 질서에 저항한 '자유의지'는 충분한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결구 프로메테우스는 다시 신의 질서로 편입할 것을 주장하는 신의 제안에 너털웃음으로 화답한다.

"허허……허허……. 영감님, 프로메테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닙니다요."

신이 바라보는 인간세상의 혼돈은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지혜의 오용에 있다는 것이다. 덕(德)이 빠진 지(智)는 결국 교지(狡智, 교활한 재주와 꾀)로 폭력과 간악이 활개를 치게 해 결국 혼돈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신의 주장은 어느 대학생들의 대화를 통해 신랄하게 풍자된다.

"얘 정다산(丁茶山)이 어딨는 산이니?"
"전라도쯤 있겠지 그까짓 건 그렇구, 엘라스무스란 게 무슨 뜻이니?"
"엘라는 에로에 통하구, 스무스는 정확하게 발음하면 스무-쓰니까 결국 연애가 잘 돼간다는 뜻이지 뭐야!"

평행선을 달리던 프로메테우스와 신의 회담은 결국 결렬되고 만다. 그러나 여기서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보여주려던 저자의 주제의식에 의문을 품게 된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신은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아! 이 혼돈의 허무 속에서 제3존재의 출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 시비를 내 어찌 책임질소냐."

저자는 이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신의 질서에의 편입과 인간의 자유의지 외에도 제3의 가능성 또는 해답이 있지 않을까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전후 소설에서 보이는 허무주의의 표현일까 아니면 저자 스스로 제3의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이 있는 것일까. 소설은 여기에서 끝나고 마니 그 해답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 된 셈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여타 정치 제도에 비해 우월성을 가지는 이유는 다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집단의 다양성이 주는 활력넘치는 생동감의 어울림에 또 다른 질서를 창조해내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힘으로도 감당키 어려운 카오스가 도래한다면 당신의 선택은?....신의 질서로의 편입, 자유의지에의 믿음. 이도 아니라면 제3의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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