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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축구장의 난봉꾼 훌리건은 불량배들의 멘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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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베멀먼즈 마르시아노의 <샌드위치가 된 샌드위치 백작>/권혁 옮김/2011년

자칭 단어광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존 베멀먼즈 마르시아노(John Bemelmans Marciano 의 <샌드위치가 된 샌드위치 백작>의 원제는 <ANONYPONYMOUS>이다. 이 생소한 원제만 보고 이 책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면 당신도 단어에 대해서 저자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anonyponymous'(어노니포니머스)는
'anonymous'(어노니머스, 익명)와 'eponymous'(이포니머스, 시조)의 합성어로 신조어라고 할 수 있다. '익명의 시조'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은 단어의 기원이 된 사람 혹은 단어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이름에서 비롯된 재미있는 단어 이야기'라는 이 책의 부제가 바로 'anonyponymous'(어노니포니머스)인 것이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가령, 보이콧(boycott), 가디건(cardigan), 쇼비니즘(chauvinism), 훌리건(hooligan), 멘토(mentor), 파파라치(paparazzi),
피그말리온(pygmalion), 튜즈데이(tuesday), 실루엣(silhuette),...외래어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도 있고, 우리말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는 단어도 있다. 이 단어들 말고도 많은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역사 속 인물의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책 표지에 웃고 있는 샌드위치 백작도 마찬가지다. 얇게 썬 두 조각의 빵 사이에 버터나 마요네즈 소스 등을 바르고 고기,달걀, 치즈, 야채 따위를 끼워넣는 음식으로 바쁜 현대인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
샌드위치(
sandwich)도 사실은 영국 샌드위치가의 존 몬테규 백작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밤새워 노름을 즐기던 그는 잠시도 도박판을 벗어날 수 없어서 고안해낸 음식이 샌드위치란다. 물론 샌드위치 백작은 자신의 이름이 후세에 그가 즐겨먹던 음식의 이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부끄러운 자신의 행동이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요긴한 한 끼 식사가 되었으니 웃음이 절로 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어려운 용어로 시작해서 지래 겁먹을 필요는 없다. 부제대로 <샌드위치가 된 샌드위치 백작>은 재미있는 단어 이야기일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사전'이라니 이제 그 재미있는 단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훌리건, 불량배들의 멘토가 되다

통신의 발달은 지구촌 반대 편에서 일어난 일도 안방에서 시시각각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축구팬들에게는 축구 종주국이자 선진국인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를 안방에서 생중계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일상의 작은 행복이 되었다. 최근에는 박지성처럼 유럽 축구에 진출하는 국내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새벽잠을 반납하면서까지 TV 앞을 지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만큼 영국이나 스페인 등 유럽 축구와 관련된 뉴스들에도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축구 말고 종종 듣게 되는 뉴스 중에 축구장 안팎을 점령하고 과격한 행동을 하는 축구팬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바로 축구장의 난봉꾼, 훌리건(hooligan)들이다. 

사실 훌리건은 19세기 런던에 있던 아일랜드 빈민촌인 사우스워크의 토박이로 선술집 경비원으로 일했던 사람이란다. 하지만 그는 어린 불량배들에게 도둑질과 폭행 기술을 가르쳐주는 멘토였다고 한다. 어느날 경찰과 말다툼을 하게 된 그는 경찰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쓰레기 마차에 처박아버렸는데 곧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를 되살린 사람들이 바로 영국의 광적인 축구팬들이라는 것이다. 훌리건은 인물의 부정적인 특성이 그대로 후대로 부정적 단어로 쓰이게 된 경우다. 그러나 칼라 없이 앞자락을 터서 단추로 채우게 된 털로 짠 스웨터를 의미하는 가디건(cardigan)이라는 단어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가디건의 어원은 영국 가디건가 제7대 백작인 제임스 토마스 브루데넬이라고 한다. 가디건 백작은 그렇게 훌륭한 지휘관은 아니었나 보다. 그는 자신의 제11기병대를 가장 멋진 부대로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1만 파운드 가량의 개인 재산을 쏟아부어 부하들을 치장시켰다고 한다. 그 옷 중에는 자신이 발명한 단추가 달린 니트 조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병사들은 크림 지방의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전투복 밑에 그것을 입었다고 한다. 군 지휘관이 전투력보다는 패션에 신경썼다니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믿거나 말거나 가디건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즐겨입는 패션 아이템이 되었다. 

한편 유명인사들을 몰래 쫓아다니며 사생활 폭로에 열을 올리고 있는 파파라치(paparazi)도 사실은 여행객들에게 자기 업소의 식당을 이용해 줄 것을 편지로 간곡하게 부탁한 코리올라노 파파라초(coriolano paparazzo)라는 숙박업소 주인이었다니 딱딱한 영어사전이니 국어사전 따위만 봐온 독자들에게는 흥미진진한 단어 사전이 아닐 수 없다.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라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 말이 단순히 교육적 차원의 속담만은 아니었구나 느끼게 될 것이다. 아마 다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현 정부 초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규탄하는 촛불 집회가 한창이었을 때 광화문 광장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차벽이 설치되었다. 대통령에게 직접 항의하기 위해 청와대로 진출하려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이 설치한 일종의 바리케이트였다. 사람들은 이 콘크리트 차벽을 '명박산성'이라 불렀다. 또 '명박스럽다'라는 말까지 유행했다.

대통령의 이름을 딴 이 말들은 국민들과 소통을 거부하고 독선적인 국정운영을 하는 통치 스타일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일종의 'anonyponymous'(어노니포니머스)가 된 것이다. 다만 어느 특정 인물이 특정한 의미의 단어가 되기까지 시간적 갭이 짧다는 것 뿐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 단어가 계속 쓰이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내 이름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설레임과 고민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아직 뱃속에 있을 때는 태명이라는 이름으로 장차 세상에 나오게 될 나를 축하해 주는 부모가 있다. 더욱이 나의 또다른 나인 이름은 부모의 기쁨과 함께 장차 이름대로 살아주길 바라는 부모의 꿈과 희망이 깃들어 있다. 먼 훗날 내 이름도 샌드위치나 훌리건처럼 '익명의 시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단어가 긍정적이 될지 아니면 부정적 단어로 탄생할지는 지금의 행동에 달려 있다. 최소한 부모의 설레임과 희망이 담긴 내 이름에 걸맞게 사는 것만이 답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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