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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새까맣게 탄 예수만 있을 뿐 기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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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옥(1938~2010)의 <흑색 그리스도>/「현대문학」128호(1965.8)

작가 송상옥이 궁금했다. <흑색 그리스도>라는 파격적인 제목만큼이나 분열된 현대인의 심리묘사가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송상옥', '흑색 그리스도'를 몇번이고 조합해서 검색창에 입력해 봤지만 언론인 출신에 재미작가라는 이력 외엔 눈에 띌만한 작가 소개글을 찾기가 어려웠다. 작가 송상옥은 195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검은 이빨>로 입선한 후 <4악장>이 사상계의 추천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69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송상옥은 <바다와 술집>,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 <마의 계절>등 단편소설과 <어둠의 강>, <들소사냥>, <인터넷 전자책방>등의 장편소설을 집필했는데 그 중에서도 <흑색 그리스도>는 작가 송상옥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흑색 그리스도>는 종교색 짙은 제목과 달리 주제는 자신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일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자아를 상실한 채 극단적인 자기부정과 절망감에 빠져있는 주인공이 삶의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탁월한 심리묘사로 그려내고 있다. <흑색 그리스도>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몇 개의 큰 사건을 접한 주인공의 심리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자칫 흥미가 반감될 수도 있으나  반복 서술되는 사건들은 절묘하게 연결되어 실제 내용의 흐름은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다. 박태원이 한 문장으로 <방란장>을 쓴 것처럼 새로운 소설 형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소설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네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흑색 그리스도>의 주제이기도 하고 '흑색 그리스도'를 끄집어낸 동기이기도 하다. 나는 내 몸이 공중에 뜨는 기적을 꿈꾼다. 이 기적은 지친 일상에서의 탈출이고 구원이다. 이 기적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악의적 상상으로 연결된다. 얼마전 헤어진 애인 향순이가 죽어버리는, 성폭행으로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된 영희가 죽어버리는, 아침 저녁으로 무의미하게 마주치는 건너방 아가씨 경자가 죽어버리는 기적을 꿈꾼다. 한편 형의 죽음 앞에서, 김일병의 죽음 앞에서 어찌할 수 없었던 자신을 추억한다. 이 모든 것들은 나 더 나아가 현대인을 지치게 만드는 올가미를 상징한다. 주인공인 내가 겪고 있는 원형탈모증은 이런 현대인의 스트레스가 농축되어 나타나는 질병이다. 

결국 내가 꿈꾸는 기적은 다름아닌 구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예수다. 나는 예수가 병든 자를 낫게 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로 사천이 넘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에 차도록 남게 했다는 기적을 좋아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기 직전 하늘을 향해 부르짖은 말은 현대인의 처절한 외침과 동일시된다.

나는 버스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을 뻗대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흑색 그리스도> 중에서-

소설이 조금은 엉뚱하다. 소설적 개연성은 사라진 채 느닷없이 예수의 기적은 없다는 결론을 맺고 만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관념적 실체일 뿐 나를 구원해 줄 선지자는 오직 '나'라는 사실이다.

"기적은 없어. 기적을 행하는 그리스도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어. 공중에 떠 있는 새카만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야.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새카만 그리스도가····" -<흑색 그리스도> 중에서-

도입부에 있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네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이 말은 현대인의 지친 삶은 현대인 스스로가 부딪치고 투쟁해야만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자신이 바라던 기적, 건너방 아가씨 경자의 죽음이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의 기적을 포기한 결정적 사건이 되고 만다.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경자의 자살을 통해 보게 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을 죽은 것으로 해달라는 말은 삶에 대한 희망과 열정의 역설이 아니었을까? 기적은 없다. 다만 내가 있을 뿐. 내 삶은 어느 선지자의 힘으로 방향이 설정되지 않는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서야 할 곳은 오직 내가 걸어왔고 내가 개척해 나가야 한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고 나로 인해 세상은 진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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