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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낙동강을 울게 하는 자 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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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의 <낙동강>/1927년

졸고 있는 이 땅, 아니 움츠러들고 있는 이 땅, 그는 피칠함이 생기고 말았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마을 앞 낙동강 기슭에 여러 만 평 되는 갈밭이 하나 있었다. 이 갈밭이란 것도 낙동강이 흐르고 이 마을이 생긴 뒤로부터, 그 갈을 베어 자리를 치고 그 갈을 털어 삿갓을 만들고 그 갈을 팔아 옷을 구하고, 밥을 구하였다. -『낙동강』 중에서-

 

낙동강을 삶의 터전으로 의지하고 살던 촌민들은 노래 불렀다.

 

기러기 떴다. 낙동강 우에
가을바람 부누나 갈꽃이 나부낀다.

 -『낙동강』 중에서-

 

이런 낙동강의 갈밭이 어느 날 남의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촌민의 무지 때문이었다. 십 년 전에 국유지로 편입이 되었다가 일본사람 가등이란 자에게 국유 미간처리라는 명목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가을부터는 갈도 벨 수가 없었다. 박성운은 자신이 낙동강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이었기에 이런 촌민들의 무지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대중 속으로라는 구호 아래 고향에 내려와 소작조합을 만들어 지주의 횡포와 착취에 대하여 대항운동을 일으켰다. 그 지주 위에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대지주가 있었다. 민족주의자였던 박성운은 이미 철저한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조명희의 단편소설 『낙동강』은 박성운이라는 젊은 사회주의자의 최후를 그린 작품이다. 단편소설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서사시를 읽는 듯 장엄함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카프 회원이었던 포석 조명희는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간부를 지내기도 했으나 스탈린의 탄압정책 와중에 일본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1938년 총살당했다고 한다. 저자 조명희의 죽음만큼이나 소설 속 주인공 박성운의 최후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그 무언가가 용솟음침을 느끼게 한다. 소설 『낙동강』은 당시 경향작가 작품들로는 특이하게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게 배어있는 소설이다. 당시 좌파 작가들이 겪었을 이중의 고민을 짐작케 해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조명희는 왜 낙동강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을까? 소설 속 낙동강은 주인공 박성운의 사상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군청 농업조수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던 박성운에게 낙동강은 빼앗긴 조국의 상징이었다. 열렬한 투사가 되었고 철창생활까지 했던 박성운에게 남은 건 삶과의 처절한 전쟁이었다. 어머니마저 잃은 그는 삶의 터전이었던 낙동강을 등질 수 밖에 없었다. 서북간도로의 이주 붐을 타고 아버지와 함께 서간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으나 그곳에서의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마저 타국땅에서 잃게 되고 그사이 박성운은 사회주의자로 사상전환을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가 되어 돌아온 박성운에게 낙동강은 고향 사람들, 촌민들의 무지함이 서린 땅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한바퀴 굴렀었다. 놀고먹는 계급이 생기고, 일하여 먹여주는 계급이 생겼다. 다스리는 계급이 생기고, 다스려지는 계급이 생겼다. 그럼으로부터 임자 없던 벌판에 임자가 생기고 주림을 모르던 백성이 굶주려가기 시작하였다. 하늘의 햇빛도 고운 줄을 몰라가게 되고 낙동강의 맑은 물도 맑은 줄을 몰라가게 되었다. 천 년이다. 오천 년이다. 이 기나긴 세월을 불평의 평화 속에서 아무 소리 없이 내려왔었다. 그네는 이 불평을 불평으로 생각지 아니하게까지 되었다. -『낙동강』 중에서-

 

그에게는 평생을 같이 했던 동지가 있다. 애인 로사다. 박성운이 폴란드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사 룩셈부르크를 본 따 지어준 이름이다. 남편의 처음처럼 그녀도 평범한 아니 당시로서는 고등교육까지 받은 신여성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사랑의 힘, 사상의 힘으로 사회주의자로 변신시켰다. 딸의 사회운동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눈물 흘리는 그녀에게 박성운은 이런 말로 위로하곤 했다. 

 

당신은 또 당신 자신에 대하여서도 반항하여야 되오. 당신의 그 눈물, 약한 것을 일부러 자랑하는 여성들의 그 흔한 눈물도 걷어치워야 되오우리는 다 같이 굳센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낙동강』 중에서-

 

그런 그가 지금은 병인이 되어 낙동강을 건너고 있다. XX감옥 미결수로 있다가 병이 위중해 보석으로 출옥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박성운 곁을 지키고 있는 애인 로사는 정운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낙동강을 노래하고 있다.

 

봄마다 봄마다

불어 내리는 낙동강물

구포벌에 이르러

넘쳐 넘쳐 흐르네

흐르네---

…………

천 년을 산 만 년을 산

낙동강! 낙동강!

하늘가에 간들

꿈에나 잊을쏘냐

잊힐쏘냐---

-『낙동강』 중에서-

 

병든 성운은 낙동강을 건넌 며칠 후 꿈에도 잊을 수 없다던 낙동강을 뒤로 하고 하늘로 갔다. 무수한 만장 중에 로사의 만장이 나부낀다.

 

그대는 죽을 때에도 날더러 너는 참으로 폭발탄이 되라 하였나이다. 옳소이다. 나는 폭발탄이 되겠나이다.

 

그리고 로사는 며칠 후 구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떠났다. 애인의 밟던 길을 자기도 한번 밟아보려는 뜻에서다.

 

낙동강이 또다시 울고 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낙동강은 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시뻘건 알몸을 드러낸 채 신음하고 있다. 어찌 낙동강만 울고 있으랴! 낙동강을 삶의 터전으로 일구고 살아온 민초들도 낙동강과 더불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일제와 일제를 등에 업은 지주 대신 살아있는 권력이 낙동강을, 민초들을 눈물 흘리게 하고 있다. 이 역사의 악순환을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할까?

 

낙동강은 알고 있다. 강은 굽이굽이 흘러야 한다는 것을...강의 흐름을 막는 자 누구인지...낙동강을 눈물 흘리게 하는 자 또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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