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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0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청년이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앳띤 모습으로 기억되지만 전태일은 사실 저희 아버지와 동갑입니다. 살아있다면 환갑을 두해나 넘긴 어르신의 모습일테죠. 
이렇듯 어느새 세월은 흘렀고 그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고 산화해가던 1970년 11월13일은 사람들의 기억이 아니라 책속의 이야기로, 영화의 한 장면으로, 역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얼마전 또다시 구미의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다행이 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자신의 몸을 던지던 과정이 40년전 전태일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40년전 전태일은 노동자를 보호해야할 노동청이 노동자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열악하다 못해 끔찍한 노동현실을 외면하자 동료들과 근로기준법 화형식 시위를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청과 경찰은 이마저도 저지했고 결국 전태일은 자신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고 외쳤고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2010년 10월30일, 장기간에 걸친 파업과 직장폐쇄로 난항을 겪고 있던 구미 KEC 노동조합 간부들이 회사측과 교섭을 하기위해 예정된 장소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현장을 경찰이 덮쳤고 노동자들에 대한 연행을 시도합니다. 이과정에서 금속노조 구미지부장인 김준일은 이에 항의하며 분신을 시도합니다. 

전태일이 떠난후 그렇게 지난 40년간 수백명의 전태일이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법에 보장된 권리를 가진 국민으로서 대접해달라며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입맛 열면 법치를 외치는 정권과 공안기관, 경찰, 사측을 향해 사람대접해달라며 싸우고 싸우다 끝내 목숨까지 버려야 했습니다.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위해서...

몇해전 세상을 떠난 한 선배의 기일이 찾아오는 봄이면 매년 마석 모란공원을 찾아갑니다. 그때마다 전태일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22살, 애띤 모습의 청년은 여전히 그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누가 묶었는지 모를 비정규직 철폐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른 그의 모습은 40년째 같은 모습입니다. 40년째 어쩌면 변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아는 것 처럼. 

그가 떠난 11월13일은 사랑하는 제 딸아이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10년쯤 흘러 전태일이 떠난지 50년이 되고 딸아이가 중학생이 될때쯤엔 좀더 마음 편하게 전태일이라는 사람, 할아버지와 동갑내기인 사람, 진정 사람을 사랑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만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전태일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64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시장 피복 공장 미싱사보조로 취직한 전태일은 1969년 재단사들의 친목모임 '바보회'에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조사하여 개선방안을 노동청에 제출하였다가 해고된다. 
이듬해인 1970년 9월 다시 재단사로 취직한 전태일은 '삼동친목회'를 결성하여 노동자들을 상대로 설문한 결과를 분석해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하여 그 해 11월 7일까지 시정을 약속받지만, 시정되지 않자 11월 13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기로 하고 시위를 준비한다.
그러나 피켓시위를 벌이기도 전에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라고 절규하며 분신, 끝내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 위키백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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