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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권번(券番)을 품었던 동네 용동, 지우려 해도 사라지지 않을 시간을 김재열 화백이 그렸다.[기자말]
용동 권번 돌계단 골목(2022, 종이에 수채, 56×36cm) 오늘, 숨죽인 햇살만이 비추는 용동 권번 계단. 시멘트로 뒤덮인 채 옛 돌계단 일부만 드러난 모습이 애처롭다. ⓒ 김재열 작가
 
'연지와 분을 발러 다듬는 얼굴 위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 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 …중략… 밤늦은 인력거에 취하는 몸을 실어/ 손수건 적신 적이 몇 번인고/ 이름조차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 - 이화자의 <화류춘몽>(花流春夢) 중에서
 
용동 '권번(券番)' 골목 깊숙이 그림자가 스며든다. 하얗게 분칠을 하고 붉은 연지를 찍어 발라 수척한 민낯을 감춘다. 비틀비틀 인력거를 타고 밤길을 나선다. '겁나는 세력'의 부름에 '빛나는 금강석'을 좇아... 이화자(1916?~1950?)는 두 생을 살았다. '민요의 여왕' 그리고 '기생'의 삶. '섬시악시', '어머님전상백', '화류춘몽'... 1930년대 그의 목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기 전까지 용동 권번에 적을 두고 노래했다.

권번은 일제강점기 기생의 조합이다. 이영태 인하대 교수의 저서 <권번>에 의하면, 인천 권번은 1906년 용동기가(龍洞妓家)로 시작해, 1912년 용동기생조합소(龍洞妓生組合所), 1925년 용동권번(龍洞券番), 1937년 인화권번(仁和券番)으로 불렸다.

기생이라 하여 술 따르고 웃음 팔며 살지만은 않았다.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는 '예인'이자 주체적으로 사회를 움직이는 '신여성'이기도 했다. 1897년 인천 상봉루(相鳳樓)의 기생들은 치마폭에 숨겨둔 돈을 독립 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인천 기생들은 1923년 물산장려운동에 힘을 보태고, 1925년 여름 폭우가 쏟아졌을 때도 나서서 이재민을 도왔다. 개항은 조용하던 바닷가 마을 풍경만 송두리째 바꿔 놓지 않았다. 뜨겁고 강하게, 이 땅의 여성들을 일깨웠다.

힘으로 밀어붙인 개항, 권번의 역사는 더 뼈아팠다. 그 시간이 슬프지만 아름다운 선율로 이 시대를 파고든다. 시 문화예술과 공모 사업을 통해 인천 악사(樂士) 이승묵(37)씨가 이끄는 인천 콘서트 챔버가 제작한 앨범 '인천 용동 권번 예인 이화자 다시 부르기'가 세상에 빛을 보았다.

"음악은 한 시대를 대변합니다. 이화자는 시대의 풍류를 주도하면서도 존재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음악이,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억압받던 시대에 맞선, 근대 여성 예술인들에게 이 음반을 바칩니다."
         
인천 콘서트 챔버의 이승묵 ⓒ 임학현 포토디렉터
 
‘龍洞券番(용동권번), 昭和 四年 六月 修築(소화 4년 6월 수축)’. 돌계단에 새겨진 용동 권번의 흔적 ⓒ 임학현 포토디렉터
 
'龍洞券番(용동권번), 昭和 四年 六月 修築(소화 4년 6월 수축)'

오늘 용동 권번의 흔적은 차디찬 돌계단에 새겨진 글 한 줄이 전부다. 하나 도시의 얼굴 뒤에 감춰진 뒷골목에 쌓인 시간일지라도, 우리의 역사다. 지우려 해도 감추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칼국수 끓는 냄새는 사라져가고

 
뜨끈한 국수 한 그릇에도 역사는 녹아 있다. 권번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옛 칼국수 거리가 나온다. 1970~1980년대 이 골목은 국수 끓는 냄새로 진동했다. '칼국수 거리'라고 쓰인 이정표는 사라진 지 오래, 단 두 집만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큰 우물 칼국시' 텅 빈 가게엔 당분간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만 덩그러니 붙어 있다. 맞은편 김이 모락모락 새어나는 '새집 손칼국수'의 문을 살며시 연다. 주인 어르신은 낯선 이들의 방문이 마뜩잖다. 전에는 TV 방송이고 신문이고 얼굴을 비쳤지만, 나이 들고 장사도 안 되니 영 귀찮다. 그래도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자리에는 앉으라 한다. "뭐, 들을 게 있다고." 하지만 이내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보따리가 하나씩 풀린다.
 
오늘, '초가집'이 있던 자리 ⓒ 임학현 포토디렉터
 
"오기 싫은 걸 억지로 끌려왔어." 이순희(78) 할머니는 스물다섯에 서울에서 인천으로 시집왔다. 시어머니가 이 골목에서 여관을 했다. 술집 동네였다. 해가 땅 밑으로 떨어지기 전부터 취기 오른 사람과 한복 입은 색시들로 북적였다. 몇 년 동안은 어머니가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다 1975년, 서른 줄에 이 집을 짓고 덜컥 음식 장사를 시작했다. 술 마신 다음 날 속을 달래는 데 시원한 칼국수 국물 만 한 게 있으랴. 연탄불에 칼국수를 끓여 내기가 무섭게 손님이 밀려들었다. 1980년대 한창때는 하루에 밀가루 한 포대를 다 썼다.

지금은 열흘이 지나도록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 얼마 전엔 한집처럼 장사하던 '초가집'이 문을 닫았다. 국숫집이 사라진 자리엔 번듯한 카페가 들어섰다. 주인은 3개월 전 저세상으로 마지막 길을 떠났다.

"남 일 같지가 않아.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어. 자식들에게 미안하고 창피해." 큰아들은 시장상까지 받은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로, 작은아들은 연구원으로 남부럽지 않게 키워냈다. 그런데도 허리 굽도록 일하는 삶이 행여 자식에 누가 될까, 마음 쓰인다. 어머니는 어머니다.

"아이고, '하얀 할머니' 오셨네." "아줌마 보려고 일부러 왔어." 최상유(92) 할머니는 이 집의 오랜 단골이다. 따뜻한 밥 한 끼 드시라고 딸, 사위가 모처럼 단골집에 모시고 왔다. 그렇지 않아도 이 집 콩국을 좋아하던 할머니가 여름 한철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터였다. "내, 맛있게 푹~ 끓여드릴게."

고른 한낮이 지나자, 식당 빈자리가 손님으로 드문드문 채워진다. 대부분 같이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살 깊어 가는 노인들이다. 가족 같은 그네들 따뜻한 한 끼를 위해 할머니가 분주히 움직인다. 작은 그의 뒷모습이, 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할머니의 굽은 등 위로 창 너머 햇살이 나지막이 드리운다.
 
용동 칼국수 거리의 명맥을 잇고 있는 이순희 할머니. 이제, 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 임학현 포토디렉터
 
용동큰우물(2022, 종이에 수채, 51×36cm) 자그마치 140여 년 시간이 고인 '용동큰우물'. 가까이에 우리나라 최초의 미학자 우현 고유섭의 생가터가 있다. ⓒ 김재열 작가
 
큰 우물가 '구수한 큰 맛'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에 마음까지 든든히 채우고 옛 우물가에 선다. '용동큰우물'엔 140여 년 긴긴 시간이 고여 있다. 조선 후기부터 물을 퍼 올리던 자연 우물로, 1883년 개항 무렵에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1967년에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지붕을 얹은 육각형 정자를 세웠다. 이때 인천 출신 서예가 동정(東庭) 박세림 선생이 쓴 '용동(龍洞)큰우물' 현판을 걸었다.

예부터 큰우물 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어도 걱정이 없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좋은 물은 좋은 술로 이어진다. 우물 주변으로 인천, 창영, 대화 등의 양조장이 들어서 있어 골목마다 술이 향기롭게 익어갔다.
 
고유섭 선생의 생가터에 있는 기념석 ⓒ 임학현 포토디렉터
 
큰우물 가까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학자 우현(又玄) 고유섭(1905~1944) 선생의 생가터가 있다. '구수한 큰 맛',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성의 계획'으로, 그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규정했다. 그러고는 39세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길 위에 '우현문(又玄門)갤러리'가 있다.

김선학(58) 관장은 2년 전 이 자리에 문화예술의 꽃을 피운 건 우연이자 필연이라고 했다. 그림을 좇아 서울로 학교를 다니고, 중국에 17년 머물면서도 평생 미술 안에서 살아온 그다. 다시 찾은 인천에서 고유섭이 남긴 자취를 따르는 일에, 어찌 가슴이 뛰지 않으랴.

오늘 고유섭 선생이 태어난 자리에 서면 옛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물동이를 이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빨래하는 아낙들, 덜컹거리는 우마차, 그 시끌 벅적한 풍경 속에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조숙한 한 아이가 서 있다. "운명처럼 시작했으니 끝까지 선생을 기리도록 해라.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우현문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연 원로 화가 홍용선의 격려는 고유섭을 향한 그의 마음을 굳건하게 했다.
 
우현문갤러리의 김선학 관장. 그가 고유섭 선생의 자취를 따르는 건, 우연이자 필연이다. ⓒ 임학현 포토디렉터
 
원도심 골목, 갤러리의 꿈
 
누군가는 잊힌 원도심 골목에 5층짜리 갤러리를 연 그가 무모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곳은 여전히 중심지다. 1970~1980년대 호프집 '마음과 마음', '로젠켈라', '하이델베르그'가 불 밝히던 젊음의 거리, 그 역시 생에 빛나던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예술이라면 빛바래가는 이 거리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 그는 믿는다.

"이미 잘 가꿔진 숲보다 황량한 땅에서 나무를 키우는 일이 더 보람되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떠나고 텅 빈 건물을 보는 순간, 내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우현문갤러리가 개항로와 배다리로 이어지는 문화예술의 다리가 되길 바랍니다."

변화는 이미 골목골목에 스며들었다. 주변 상인들이 가끔 불쑥 찾아와 "그림 구경하고 가도 되느냐"고 물으면, 참 반갑다. 열심히 일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 삶에 작은 위로가 된다면,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에게 향할 수 있다면, 원도심 한복판에 갤러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그 옛날 분 향기 짙게 흘러나오던 골목엔, 오늘 바람만 고요히 인다. 문 닫은 여인숙, 텅 빈 폐허엔 공허가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칼국수 끓는 냄새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봄은 다시 온다. 지난 추억은 붙잡아 가슴 한편에 묻고, 오늘과는 또 다를 내일을 기다린다.

취재영상 보기 (https://youtu.be/3kaWd4VdpqU)
 
그림 김재열. 인천예총 회장,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교수 등을 역임한 인천의 원로 작가다. 인천 구석구석의 풍경과 건물에 내재한 가치를 캔버스에 담는다. 18회에 걸쳐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NIB남인천방송 ‘인천 여행 스케치 기행’, 인천일보 ‘풍경 드로잉’을 연재하며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현재 인천미술협회와 한국미술협회 고문, 대한민국 수채화 작가 원로회 의장을 맡고 있다. ⓒ 김재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2년 3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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