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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은 옛 전남도청과 민주광장 그리고 사적지 표지석. 옛 도청 앞 광장은 80년 5월 항쟁의 심장부였다. ⓒ 이돈삼
 
광주민주화운동 40주기를 맞아 개인적으로 5·18사적지, 그 중에서도 옛 광주적십자병원과 광주교도소, 505보안부대를 돌아봤다. 적십자병원에선 당시 피를 흘리며 치료를 받았던 시민군,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던 의료진, 헌혈을 하려고 줄을 섰던 학생과 시민들을 떠올렸다. 민주인사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을 통해 내란음모를 조작했던 505보안부대에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5·18사적지라고 하면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 부근, 5·18민주묘지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옛 도청이나 민주묘지는 언제라도 가볼 수 있다. 옛 광주교도소와 보안부대는 40주기를 맞아 한시적으로 개방되고 있다. 5월 24일이 지나면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려 해도 제약이 많이 따른다. 행사기간에는 5·18사적지 안내해설사들이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고 있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시민들이 의료진을 도와 협업했던 옛 광주적십자병원
 
옛 광주적십자병원을 찾은 대학생이 오월사적지 안내해설사로부터 80년 5월 당시의 상황 설명을 듣고 있다. 지난 5월 15일 오후다. ⓒ 이돈삼
   
5·18사적지 11호로 지정돼 있는 옛 광주적십자병원. 5월항쟁의 중심지였던 금남로에서 가까운 광주천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병원의 민간 매각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이돈삼
 
먼저 찾아간 곳은 5·18사적지 11호로 지정돼 있는 옛 광주적십자병원. 항쟁의 중심지였던 금남로에서 가까운, 광주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종합병원이었다. 80년 5월 18일 금남로에서 계엄군으로부터 무차별 폭력을 당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씨가 이 병원으로 옮겨졌다. 상태가 악화돼 국군광주병원으로 이송됐지만, 19일 새벽 사망한다. 김경철씨는 5·18당시 광주의 첫 희생자였다. 5·18민주묘지 1묘역의 첫 번째 자리에 모셔져 있다.
 
시민들이 의료진을 도와 협업을 했던 곳이 당시 적십자병원이었다. 시민들이 간호사를 대신해 부상자를 돌봤다. 의료진의 식사를 준비하고, 부족한 의료물품을 구하려고 다른 병원과 약국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원활한 부상자 이송을 위해 병원에서 시민들에게 의사 옷차림을 내주기도 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밀려들면서 피가 모자랐다. 이 소식을 들은 여고생과 노인, 유흥업소 여성들까지 헌혈에 참여하려고 달려왔다. 함께 사는 대동세상을 추구한 광주정신을 직·간접으로 실천한 곳 가운데 하나가 당시 적십자병원이었다.
 
적십자병원은 5월항쟁 이후에도 부상자들을 따뜻하게 돌봤다. 그러나 대형병원이 속속 생겨나면서 경영난을 피하지 못했다. 96년 서남학원 재단에 인수돼 대학병원으로 운영되다가 지난 2014년 완전히 문을 닫았다. 지금은 거의 방치돼 있다. 광주광역시가 사적지 보존 차원에서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5·18의 모든 시나리오를 만들고 시행한 옛 505보안부대
 
방치되고 있는 옛 505보안부대. 내부 천장과 계단이 무너지고, 나무와 유리조각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5·18사적지 26호로 지정돼 있다. ⓒ 이돈삼
   
옛 505보안부대의 별관. 보안부대는 신군부의 정권 찬탈과 안정적인 집권에 앞장섰다. 광주광역시는 앞으로 단장을 거쳐 청소년교육센터로 활용할 계획이다. ⓒ 이돈삼
 
옛 505보안부대는 서구 쌍촌동에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 광주지부와 국군통합병원 부근이다. 옛 505보안부대는 군 정보기관이다. 입구에 '무등공사'라는 간판을 붙여놓고, 철저하게 비밀리에 활동했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를 둘러 심어, 밖에서는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우리한테 생소하게 다가서는 이유다.
 
예나 지금이나 신분을 감추고 숨어서 하는 일치고 떳떳한 것은 없다. 당시 505보안부대는 5·18의 모든 시나리오를 만들고 시행한 곳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이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의 최고 핵심조직이 보안대였다. 보안부대는 5월 17일 자정 계엄포고령이 발령되기 이전에 이미 시나리오를 짜놓고 반정부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한 곳도 505보안부대였다. 여기 지하실에서 내란음모의 조직도가 만들어졌다. 처음에 보안부대는 광주폭동의 수괴를 홍남순 변호사로 그렸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송기숙 교수로, 또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으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몽둥이 폭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손목에 수갑을 채워 천장에 매달아 두기, 물고문,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기,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두 사람이 올라가서 짓이기기 등 갖가지 고문이 동원됐다. 결국 정동년으로부터 '김대중에게 자금을 받아서 시위에 쓰도록 전달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역할을 한 곳이 505보안부대였다.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처음 묻힌 광주 망월묘지. 80년 이후 한국민주화의 성지가 됐다. 지금은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 이돈삼
   
5·18 항쟁 희생자들이 처음 묻혔던 광주 망월묘역. 80년 이후 민주화의 성지가 됐다. 당시 희생자들은 새 묘역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 이돈삼
 
5월항쟁 이후 희생자들이 묻힌 망월묘지의 이장을 주도한 것도 505보안부대였다. 1983년에 추진된 '비둘기 시행계획'이 그것이다. 광주항쟁 이후 망월묘지로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망월동이 성지로 떠올랐다. 보안부대는 희생자 유가족을 회유해 묘지를 분산시키는, 이장을 획책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공작을 해 26구를 옮기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유족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죽인 것도 부족해서 묘까지 파헤쳤다.
 
5·18 이전에는 신군부의 정권 찬탈을 위해서, 이후에는 신군부의 집권 안정을 위해 앞장섰던 505보안부대였다. 보안부대는 2005년에 옮겨지고,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다. 천장과 계단이 무너지고, 나무와 유리조각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5·18사적지 26호로 지정돼 있다. 광주광역시는 앞으로 단장을 거쳐 청소년교육센터로 활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

당시 헬기 기총소사 처음 증언한 신부가 있던 광주가톨릭 평생교육원
  
봄물이 잔뜩 오른 광주가톨릭 평생교육원의 편백숲. 수목원에 버금가는 숲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505보안부대를 보면서 느꼈던 가슴 찢어지는 고통도 치유해준다. ⓒ 이돈삼
   
광주가톨릭 평생교육원 숲길. 평생교육원은 80년 당시 광주시민의 편에서 함께 하고, 헬기 기총소사를 처음 증언하기도 했던 조비오 신부가 초대 원장을 맡은 곳이다. ⓒ 이돈삼
 
505보안부대에 연계해 가볼만한 곳이 지척에 있는 광주가톨릭 평생교육원이다. 80년 당시 시민의 편에서 함께했고, 당시 헬기 기총소사를 처음 증언했던 조비오 신부가 초대 원장을 지낸 교육원이다. 광주가톨릭 평생교육원은 예전 광주가톨릭대학의 캠퍼스다. 62년 대건신학대학으로 설립됐고, 98년에 나주 남평으로 옮겨갔다.
 
평생교육원의 숲이 수목원에 버금간다. 목백합을 활짝 피우고 있다. 편백나무, 벚나무, 소나무도 우거져 있다. 숲에 찾아간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이다. 치유의 숲이다. 505보안부대를 보면서 느꼈던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여기 학교숲에서 위무받을 수 있다.
  
김남주 시인이 우유곽에 못으로 쓴 시 '학살2'
 
5·18사적지 22호로 지정돼 있는 옛 광주교도소. 당시 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고 김남주 시인이 광주의 상황을 전해 듣고 못으로 우유곽에 긁어 ‘학살2’라는 시를 쓴 곳이기도 하다. ⓒ 이돈삼
   
5·18사적지로 지정돼 있는 옛 광주교도소 내부.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구속자들이 수형 생활을 했던 방이다. ⓒ 이돈삼
 
사적지 22호로 지정돼 있는 옛 광주교도소는 담양과 곡성, 순천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고속도로와 국도를 낀 교통의 요충지다. 80년 5월 21일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 주변 경비에 투입됐다. 그날 담양 대덕으로 가던 차가 공수부대의 사격을 받았다. 2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증언으로 알려진 고영태의 아버지 고귀석씨도 이날 사망했다. 가마니에 둘러싸인 채 암매장됐다가 나중에 발굴됐다. 80년 5월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이끌었던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수감된 몸으로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사망한 곳도 광주교도소였다.
 
광주항쟁 이전인 79년 이른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고 김남주 시인이 광주의 상황을 전해 듣고 못으로 우유곽에 긁어 '학살2'라는 시를 쓴 곳도 당시 광주교도소였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이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5·18사적지로 지정돼 있는 옛 광주교도소 전경. 광주항생 관련 구속자들이 수감생활을 했고, 항쟁기간엔 무고한 양민들이 공수부대의 총칼에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2015년 삼각동으로 옮겨가기 1년 전의 모습이다. ⓒ 이돈삼
 
태그:#5·18사적지, #광주민주화운동, #광주적십자병원, #광주교도소, #505보안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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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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