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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을 견뎌온 후두들 ⓒ 이만섭

미국 유타에 '그랜드 스테어케이스-에스칼랑테 국가기념물(Grand Staircase-Escalante National Monument)'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공원이 있다.

지금은 지정 당시보다 규모가 절반으로 줄기는 했지만, 이 공원은 국가기념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우며 지질학적,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몇 년 전에 이 공원 내에서 대규모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랜드 스테어케이스-에스칼랑테 국가기념물 안에는 험한 산세 때문에 이렇다 할 도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도로가 있어도 대부분 포장되지 않았으며, 좁고 험하다. 그러므로 공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방문자 센터를 먼저 방문하여 공원 지도를 확보하자. 그 다음 가려고 하는 곳을 미리 숙지하고, 특별히 날씨에 주의하여 충분한 물과 음식, 차량 연료를 챙겨 들어가는 것이 좋다.

이런 조건 때문에 특이하게도 이 공원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아니라 국토관리부(Breau of Land Management; BLM)에서 관리한다.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방문자 센터도 지역별로 4개가 개설되어 있다.
 
공원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있는 허름한 출입구 ⓒ 이만섭
 
공원 구역 가운데 접근이 쉬운 '토드스툴 후두스(Toadstool Hoods)'가 있다. 이곳은 이름에서 보듯이 버섯 모양 바위들이 있는 지역이다. 유타의 89번 도로 선상  카납(Kanab)과 페이지(Page)의 가운데쯤 있으며, 이정표를 보고 들어가 작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약 1.5마일 정도 걸어 들어가면 후두들이 있는 곳이 나온다.

밖에서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이곳은 안으로 들어가 보면 겉보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절경이 숨어있다. 토드스툴 후두스는 접근이 어려운 이 공원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곳이다.    

2월인데도 조금 덥다 싶을 만큼 햇볕이 강한 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유난히도 파랗고, 바람까지 거세 걷기에 좋은 날은 아니었다. 처음엔 발에 밟히는 황톳빛 모래(사암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부서지면서 만들어진 모래로, 매우 곱고 부드럽다.)때문에 발걸음이 가벼운가 했는데, 잠잠해진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줘 걷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이럴 때 파랗기만 한 하늘에 작은 구름이라도 한 조각 떠가면 좋겠다.
 
앞서서 걷는 노부부를 발견했다 ⓒ 이만섭

허름한 차림을 하고 앞장서서 걷고 있는 노부부를 발견했다. 할아버지 손엔 시장바구니가 들려있고, 할머니는 작은 체구로 할아버지 곁에 바짝 붙어 걷고 있었다. 귀여운 강아지 두 마리가 그 주변을 맴돌며 신이 났다. 뒷모습만 봐도 금슬이 좋다는 것을 눈치챌 만큼 노부부는 다정하게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한참을 뒤에서 따라가다 기어이 앞장을 설 수밖에 없게 됐다. 짧은 인사를 나누며 노부부를 뒤로하고 앞장서 걸어가자니, 산세가 조금씩 가팔라지고 주변 경치가 달라지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바위가 조금씩 자라고, 태양은 곧바로 골짜기 바닥으로 떨어져 온갖 것들을 차별 없이 골고루 어루만지고 있었다.
 
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후두 ⓒ 이만섭
 
버섯모양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타의 다른 지역에서 만날 수 있는 모자를 쓴 황톳빛 후두들이 들쭉날쭉 여기저기 서 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붉은 빛깔 후두와 주변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커다란 바위의 흰 빛깔이 대비를 이뤄 첫눈에 강렬한 인상을 준다.

사실, 그동안 여러 지역에서 후두를 봐왔고 아직 가보지 않은 유타의 다른 지역들에도 후두가 많이 있다. 후두는 그만큼 흔한 대상이라는 말이지만, 그렇게 흔한 수많은 후두들도 똑같이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다. 따져보면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아무리 기계로 찍어내는 공산품도 미시의 세계로 들어가면 완연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조만 그런가! 같은 물건을 대하면서도 기분과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경우는 허다하다. 하물며 생명이 있는 것들은 말해 무얼 하랴. 따라서 너무 흔하기 때문에 아무리 새로운 경치를 봐도 별 감동 없이 그저 심드렁하게 사진 한 장 찍고 물러선다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오늘만의 기분이 있고, 날씨도 어제와는 다르고 결정적으로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그러므로 너무 흔하고 비슷하게 생겨 구분조차 힘든 대상을 보더라도 느낌은 어제와 같을 리가 없다. 세상은 매일매일 변한다. 유구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것들은 이 땅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변하지 않을 무엇인가가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제는 오늘이 될 수 없고, 내일은 아직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지금을 즐겁고 재미있게 살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흔하게 볼 수 있는 후두라고 해도 이곳에 있는 것들은 이들만의 모양과 빛깔이 있고, 결정적으로 지금의 기분과 느낌과 생각이 다르므로 가는 곳마다 제각기 다른 느낌과 감동을 받기 마련이지 싶다.
 
ⓒ 이만섭

후두 순례를 어느 만큼 마치고 어슬렁 거리는데, 올라올 때 만났던 노부부를 다시 만났다. 아까 만났던 것을 기억하는지 노부부 주위를 맴돌던 강아지들이 반갑게 꼬리를 치며 아는 척을 한다. 덩달아 노부부와 반갑게 해후할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 바로 위쪽 오래곤주의 포틀랜드 지방, 캐나다 접경지역에 사셨단다. 부인은 화가로 남편은 사업을 하며 지내다 은퇴하고 살던 집을 정리해서 이곳 유타로 이주한 지 몇 년 됐다는 말을 하며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유타의 자연과 기후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좋아 여행을 자주 왔었는데, 은퇴하고 나서는 아예 이곳으로 이주를 하셨단다. 이주하기를 잘했다고, 이렇게 도시락 싸들고 나들이하며 지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유타를 좋아하며 은퇴하면 유타로 이주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더니, 꼭 꿈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 이만섭

짧은 만남이었지만 두 분의 행복한 모습은 오랫동안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두 분이 다정하게 도시락을 먹고, 그 주변을 빨빨거리고 뛰어다니던 강아지 두 마리를 먼발치에서 보고 있자니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고,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희미한 바람도 생겨났다.

그동안 사는 것이 뭐 별거 없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왔는데, 저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현실에 얽매여 스스로 발을 묶고 사는 삶은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어렵기는 하지만 조금 느슨하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남는 것은 없는지 살피면서 느릿하게 걸어가는 것도 좋겠다.
 
느릿하게 걸으며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 ⓒ 이만섭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다음 브런치(https://brunch.co.kr/@leemansup/178)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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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노동자, 한 달에 한 번은 주말을 이용해서라도 여행을 하려고 애쓰며, 여행에서 얻은 생각을 사진과 글로 정리하고 있다. 빛에 홀려 떠나는 여행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