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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강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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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의 사진은 모두 네거티브 필름(Pro400H)을 이용해 촬영 후 직접 스캔했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기자말]
국립공원에 대설주의보가 발령되면 많은 탐방로가 통제된다. 하지만 태백산은 대설경보가 발령되지 않는 한 통제에서 자유롭다. 오대산의 선재길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탐방로가 짧고 정상이 포함돼 있지 않아 조금 싱겁다. 태백산은 주요 탐방로가 열려 있기 때문에 눈꽃산행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가장 좋은 날은 눈이 한껏 내린 다음날 날씨가 맑을 때다. 2월 1일 토요일. 대설주의보가 이틀 전에 있었고 바로 전날까지도 눈발이 조금씩 날리다가 매우 맑은 날씨가 예보된 날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전주에서 태백까지 가는 제법 긴 여정을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결정하게 됐다.

새벽 5시. 태백산 유일사 탐방안내소 주차장은 만차에 가까웠다. 주말이기도 했거니와 이틀 전까지 대설주의보로 많은 눈이 내린 뒤여서인지 평소 블로그 등으로 확인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렸다. 날씨가 맑아서 일출경이 보장된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은 오전 7시 40분쯤 태백산 정상에서 해가 떠오를 것이라고 알렸다. 유일사 매표소에서 정상(천제단)까지는 대략 4km. 보통 걸음으로도 약 2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주차장에서 동행인들과 함께 배낭을 점검하고 스틱을 조였다. 오전 5시 30분쯤 주차장을 나섰다. 산 중턱에서나 끼울 것 같아 배낭에 넣어두었던 아이젠을 매표소에서부터 꺼낼 수밖에 없었다. 등산로 초입부터 눈이 가득이었다.

국립공원은 스튜디오가 아닙니다
 
새벽 미명 일출 30분 전 쯤의 하늘 ⓒ 안사을
 
카메라는 호스만(Horseman) SW612를 챙겼다. 1995년에 만들어진 매우 오래된 필름카메라다. 배터리가 전혀 필요 없는 기계식 카메라이기 때문에 추위에도 걱정 없이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노출계산은 직접 해서 다이얼을 돌려줘야 한다. 56mm*116mm 규격의 중형필름을 쓴다. 파노라마 포맷이다.
 
유일사 방면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짧지만 경사가 꽤 있는 편이다. 해발 900미터에서 출발하니 그리 힘든 산행은 아니지만 등산로가 편하다는 평만 믿고 장비 없이 따라나섰다가는 큰코 다칠 수 있다. 어느 계절이든 기본적으로 등산화와 등산복은 기본이다. 

유일사를 지나면 경사가 조금은 완만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동행인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했다.

"죄송한데요. 저 먼저 가도 돼요? 사진 때문에..."
"그래, 어서 가. 우린 신경쓰지 마. 천천히 갈게."


일출시각보다 30분은 일찍 가서 미명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군데군데 산악회의 무리로 보이는 사람들로 길이 정체됐다. 한 줄로 가면 적절히 정리가 될 터인데 좌우로 나란히 걸으니 천천히 걷는 이들 뒤로 길이 막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가쁜 숨소리를 듣고 우측으로 길을 터주어서 다행히 큰 불편이나 마찰 없이 계획한 시각에 능선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나 또한 힘이 들어 걸음이 조금 느려지면 여지없이 우측으로 꼭 붙어 걸으면서 사람들을 지나가게 했다. 

산에서는 두 사람이 동시에 갈 수 있는 길이라도 꼭 한 줄로 우측통행을 하는 것이 좋다. 길이 정체되면 안전사고의 위험도 높고, 험하고 긴 코스에서 페이스가 틀어지면 더욱 빨리 지칠 수 있다. 한 명만 지나갈 수 있는 길에서는 되도록 내려오는 이가 올라오는 이에게 양보하는 것이 좋다. 
   
천제단을 바라보고 장군봉(정상)과 천제단기점의 중간 지점. 점점 하늘이 밝아온다. ⓒ 안사을
 
몇 개의 촬영 포인트 중 주목 군락지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서리와 눈발이 두껍게 맺힌 주목과 함께 푸른 어둠과 붉은 빛의 그라데이션을 담을 수 있는 곳이다. 함께 삼각대를 놓을 자리는 있었지만 미련없이 그곳을 지나쳤다.

HDR 촬영이 되지 않는 필름카메라의 특성상 어차피 역광의 피사체와 하늘의 빛을 동시에 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경쟁적이고 짜증어린 무리의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앞에서 지나가던 어떤 이의 랜턴 불빛이 주목에 잠깐 스쳤을 때였다. 

"아. 불 좀 끄자고요. 좀."
"아, 네. 죄송합니다."


누군가 짜증을 냈고, 누군가 반사적으로 사과를 했다. 아마 사진가는 장노출로 사진을 담고 있었을 것이고 나무에 밝은 빛이 스치니, 계산한 그림이 아니라 하얗게 떠버린 나무가 찍혔을 것이다. 하지만 짜증을 낼 권리가 그에게 있었을까.

일반 등산객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 미명에 랜턴을 끄고 걸어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어떤 이가 주목에 랜턴을 일부러 비추어 나무를 감상했던들 누군가의 짜증을 들어야 했던 상황이었을까. 국립공원이 특정인들의 스튜디오는 아니지 않은가.

해가 떠오를 때 서쪽을 바라보는 이유

작은 한숨을 폭 쉬고 좀더 걸어서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남색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산과 하늘 사이로 빛의 동심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산의 서편에는 발 아래로 구름이 끝도 없이 깔려 있었다. 누군가는 '운해가 동쪽으로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표현했지만 해를 등지고 있는 운해 또한 빛깔이 매우 고왔다. 이윽고 붉은 해가 떠올랐다.
 
태백산에서 만난 일출 먼지도, 수증기도 없는 깔끔한 하늘이었다. ⓒ 안사을
 
중첩된 수많은 산들이 아득히 보이는 풍경은 아니다. 문수봉과 두리봉 등이 빙 둘러서 동편 앞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 서 있는 곳이 더 높으니 지평선에서 올라오는 해를 가리지 않는다. 문수봉까지는 조금 후 걸어야 하는 코스라 담담한 마음으로 눈에 담아 보았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정상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른 새벽 산 위에서 본 인파들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계속해서 탄성을 이어갔다. 그럴 만한 경치였다. 산 아래는 눈이 없는 겨울이기에 더욱 그랬다.
 
천제단을 바라보며 장군봉을 넘어 천제단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서 담은 사진 ⓒ 안사을
 
해가 떠오를 때 동편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서편이다. 맑은 날이어야만 가능하고 서편 또한 지평선이 보일 만큼 터져 있어야 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산 정상이야말로 그런 조건에 안성맞춤이다. 
 
서쪽편의 운해 구름의 끝이 태양빛을 반사하여 분홍색을 띤다. ⓒ 안사을
 
해가 뜬 뒤 사진을 10장 정도 찍은 후에야 동행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장군봉(정상)에서 해를 만났다고 했다. 너무 춥다며 언제 내려가냐고 묻는 그들에게, 오늘은 매우 따뜻한 편이라고 말했다. 기온은 영하 10도 가까이 되었으나 바람이 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설경을 놓고 가기가 너무 아쉬워 천제단에서 조금 더 머물렀다. 위 사진들은 하늘과 산의 노출차가 너무 커서 다소 어둡게 찍은 것인데, 실제로 보면 정말 눈부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눈은 하늘도, 구름도, 나무와 눈꽃도 동시에 밝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눈으로는 달과 구름을 동시에 보지만 사진으로는 그렇게 담을 수 없는 원리와 같다.
 
천제단에서 장군봉 쪽으로 햇빛을 받은 쪽의 구름은 눈이 부시기까지 했다. ⓒ 안사을
 
정상에서 오전 8시 반쯤 하산을 시작했다. 온 방향으로 내려가면 코스도 짧고 주차장에 차도 있어서 편하겠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산을 한바퀴 돌아 내려가고 싶었다. 천제단 기점에서 남동쪽으로 향하면 문수봉을 돌아 당골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6.1km의 경로 중 문수봉까지 가는 길은 평탄한 능선길이다. 나무들로 바람이 가려지고 등산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지점을 골라 전날 사놓은 빵으로 아침을 때웠다. 배낭 귀퉁이에 넣어두었던 우유가 얼어서 천연 아이스크림이 되어 있었다.

문수봉에 도착하자 시야가 다시 한번 탁 트였다. 지나온 길이 보였고 천제단과 장군봉, 그리고 망경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더욱 멀리 보면 함백산과 만항재도 볼 수 있다. 하늘과 공기가 모두 적절해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내 속을 좀더 비울 수 있기를
 
문수봉 정상에서 사진 왼쪽 3분의 1 지점에 망경사가 보인다. 제단 뒤로 멀리 만항재길과 함백산 정상이 보인다. ⓒ 안사을
 
소문수봉은 들르지 않기로 했다. 문수봉에서 100미터를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소문수봉 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당골광장으로 좌회전하면 된다. 거리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이쯤 오니 반대편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 

이 갈림길부터는 계속해서 제법 경사진 내리막이다. 올라오시는 분들에게 길을 양보하며서 쉬엄쉬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사진기에 담은 나무 한 그루가 아직도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다.

그 나무는 큰 키와 굵은 몸통을 가졌는데 속이 비어 있었다. 많은 등산객들이 조심스럽게 그 안에 들어가 나무의 속을 보기도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 나무와 함께 사진을 남기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생각했다. 내 속을 좀 더 비워, 쉬었다 갈 만한 품을 만들어 보겠노라고.
 
어떤 나무 속이 빈 커다란 나무에 눈꽃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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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사.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