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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의 축대 위에 기둥을 세운 임경당과 다리 위에 누각을 얹은 우화각 풍경. 송광사를 대표하는 사진 구도이다. ⓒ 이돈삼

계절이 겨울의 복판으로 접어들고 있다. 호젓한 산사로 간다. 한번쯤은 가봤을, 널리 알려진 절집이다. 순천 조계산 송광사다. 예부터 여기에 가서 '계율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던 절집이다.
 
'송광사에 가서 계율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불가에서 전해지고 있다. 산 너머 선암사에 가선 문장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대흥사에서는 염불을, 백양사에선 인물을, 화엄사에선 주먹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도 전해진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진각국사 등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절집이다. 효봉스님과 구산스님에서 법정스님까지 훌륭한 선승들이 여기에 머물면서 한국불교를 일으켰다. 계율자랑을 하지 말라는 이유다.
 
선암사에서는 빼어난 학승이 많이 배출됐다. 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도 선암사 스님(시조작가 조종현)의 아들이다. 문장 자랑을 하지 말라는 이유다. 화엄사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임진왜란 때 맹위를 떨친 승병에서 비롯됐다.
 
송광사 대웅보전 전경.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탑이 없다. ⓒ 이돈삼
 
송광사 부도밭.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는 종갓집답게 부도밭도 남다르다. ⓒ 이돈삼

송광사는 우리나라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인 승보(僧寶)사찰이다.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불교의 종갓집이다. 신라 말기에 길상사로 창건됐다. 수선사, 정혜사라는 이름을 거쳐 16국사가 배출되면서 송광사가 됐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의 도량으로 삼았다. 정혜결사는 불교공동체를 일컫는다. 기존의 귀족불교를 비판하며 불자들의 각성을 촉구한 불교혁신 운동이다. 지눌은 기득권을 쥐고 체제수호를 외치는 교종(敎宗)에 맞서,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한 선종(禪宗)을 이끌었다.
 
송광사는 정혜결사를 거치면서 대가람이 됐다. 보조국사의 법통을 진각국사가 이어받으면서 16국사로 이어졌다.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건히 지켰다. 경내에 16명 국사의 진영을 봉안한 국사전(國師殿)이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송광사는 수준 높은 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보물창고다. 16국사의 진영을 봉안한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감 등 4점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대나무 조각을 엮어 불경을 적은 경질(經帙), 대장경 목판을 보관하는 나무상자 경패(經牌), 금동요령(金銅搖鈴) 등 18점의 보물도 있다.
 
금나라에서 들여온 놋쇠로 만든 발우 능견난사(能見難思)와 비사리구시도 볼거리다. 능견난사는 접시와 흡사하다. 이리저리 포개도 빈틈없이 꼭 겹쳐지는 명물이다. 어찌나 가공기술이 빼어나든지, 똑같은 그릇을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하여, 눈으로 볼 수는 있어도 속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름 붙었다.
 
비사리구시도 명물이다. 구시는 스님들의 밥을 퍼 놓았던 큰 밥통이다.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비사리구시다. 송광사의 구시는 느티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것이다. 한번에 4000명 분의 밥을 담았다, 쌀 7가마 분의 밥이 들어갔다는 말이 전해진다. 송광사에서 수행하는 승려가 많았다는 얘기다.
    
송광사의 구시. 한번에 4000명 분의 밥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수행하는 승려가 많았다는 얘기다. ⓒ 이돈삼
 
송광사를 대표하는 풍광은 계곡과 어우러진 전각이다. 사진작가들, 아니 송광사를 찾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라도 사진을 찍고 지나는 풍경이다. 계곡의 축대 위에 기둥을 세운 임경당과 다리 위에 누각을 얹은 우화각, 그리고 우화각 아래 홍예교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대웅보전과 성보박물관의 외관도 아름답다. 전각 30여 동으로 이뤄진 송광사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자암과 불일암, 감로암 등 암자도 많이 거느리고 있다. 말사로 광주증심사 등 50∼60곳을 두고 있다.
 
송광사와 불일암을 잇는 숲길.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고즈넉한 멋을 선사한다. ⓒ 이돈삼

송광사에 딸린 암자 불일암도 애틋하다. '무소유'의 산실이다. 스님답게 살다가 스님답게 간 법정스님이 오래 머물렀던 집이다. 지금도 암자의 향목련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다. 스님은 이 나무를 보고, '후박나무'라 했다.
 
1932년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난 법정스님(박재철)은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에 다니다가 출가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를 사회운동으로 승화시킨 스님이다. 스님은 불일암에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17년 동안 머물렀다.
 
법정스님을 상징하는 법문이 '무소유'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라는 법문이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고도 했다.
 
대숲터널 끄트머리에서 만나는 불일암. 생전의 법정스님이 살았던 집으로, 무소유의 산실이다. ⓒ 이돈삼
 
불일암 전경. 법정스님의 영정사진과 함께 스님이 생전에 앉았던 나무의자가 놓여 있다. ⓒ 이돈삼

송광사 매표소에서 불일암으로 가는 숲길이 '무소유 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계곡을 따라 참나무와 삼나무, 편백과 대나무 숲길을 지나서 만난다. 생전에 스님이 자주 오가던 길이기에, 스님의 마음가짐과 걸음걸이로 사부작사부작 걸으면 더 좋다.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소리 하나까지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불일암도 내집처럼 편안하다. 법정스님의 손때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330만 부가 팔린 〈무소유〉를 비롯 〈산방한담〉 〈물소리 바람소리〉 〈텅 빈 충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버리고 떠나기〉 등 많은 책을 여기서 썼다. 무소유로 살다가, 무소유로 간 법정스님을 그리기에 더 없이 좋은 암자이고, 계절이다.
 
법정스님이 수목장으로 잠들어있는 향목련과 불일암. 법정스님이 생전에 후박나무라 불렀던 그 나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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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