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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베르디 수도원의 포도밭 조지아의 정교 수도원은 크베브리 와인 양조법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는데 알라베르디, 네크레시 등이 대표적이다. ⓒ 변영숙
 
보르도나 브로고뉴가 프랑스와인을 대표하듯이, 카헤티는 조지아 와인을 상징한다. 조지아 와인 생산량의 60% 이상이 생산되는 최대 와인 산지임은 차치하고서라도, 조지아 와인의 맛과 양조방식의 전통을 지켜온 곳이 바로 카헤티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보르도가 지롱드강, 도르도누강, 가론강을 끼고 발달했다면 조지아 카헤티는 '알라자니'라는 강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강이 흐르는 곳에 포도밭이 있다'라는 보르도 지방의 옛 속담은 카헤티에서도 유효하게 맞아 떨어진다.

카헤티 포도밭의 젖줄기인 알라자니는 코카서스 산에서 발원하여 카스피해로 흘러드는데, 해마다 봄이 되면 미네랄이 풍부한 코카서스의 빙하수로 수량이 불어나 범람하는 덕에 영양분과 수분이 풍부하면서도 배수가 잘 되는 토양이 만들어져 포도재배를 위한 최적의 '테루아'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흑해의 따스한 바람과 시리아 고원의 햇빛이 더해져 조지아 고유 품종 사페라비와 르카치텔리가 조지아 와인만의 특별한 맛을 내는 것이다.
 
알라자니 대평원 조지아 최대 와인 산지인 카헤티 알라자니 밸리 ⓒ 변영숙
 
조지아의 18개 PDO(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생산지 보호정책) 중 14개가 알라자니 연안에 밀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도인 텔라비를 비롯해 시그나기, 크바렐리, 라고데키 등의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킨즈마라울리, 쯔난달리, 나파레울리, 텔라비 등 조지아의 유명 와이너리들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와이너리들이 포진해 있다.
 
조지아인들도 카헤티 와인을 최고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때문에 과거에는 북부나 서부에서 생산되는 와인에도 '카헤티 와인' 라벨을 붙여 파는가 하면 '카헤티와인 판매'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때문에 조지아 여행객들이 와인투어를 위해 카헤티로 모여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다.
 
카헤티의 가을 들판의 소소한 풍경
 
카헤티 하베스트 풍경 텔라비 와이너리 앞에서 수확한 포도를 한 가득 싣고 차례를 기다리는 트럭 행렬. ⓒ 변영숙
 
카헤티 들판에서 만난 농부 텔라니 와인셀러로 포도를 실어나르는 농부가 덥석 포도송이를 덥석 안겨 주었다. 그 농부의 인정이 뭉클해졌다. ⓒ 변영숙
 
카헤티의 가을 들판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으로 빛난다. 이른 봄부터 농부들이 흘린 땀방울은 바이올렛빛과 초록빛으로 들판을 물들이며 넘실댄다.

해질녘 산꼭대기,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수도원에 올라 붉은 빛 속으로 잠겨드는 대지의 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는 듯하다. 아마도 농부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수고로움을 치하하는 신의 손길이리라.
 
"우와 저것 봐. 저거 트럭에 실린 게 뭐야?"
"어머 저거 포도 아니니?"
"어 진짜, 저거 다 포도야…"

 
텔라비에서 시그나기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텔라비 와인셀러'로 포도를 실어나르는 트럭 행렬과 맞닥뜨린 우리는 온갖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우리는 차를 세우고 트럭 쪽으로 달려갔다. 그저 포도 수확철의 흔한 광경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9월이니까, 조지아니까, 카헤티니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풍경이었다. 그때 멀찍이 서 있던 포도의 주인인 듯한 농부가 다가오더니 먹어보라며 포도송이를 나눠 주었다.
 
"스빠씨바, 스빠씨바~"
 
조지아어는 모르겠고 러시아어로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우와! 완전 달아!"
"너무 맛있다~."
"진짜 어쩜 이렇게 달지…?"

 
우리는 걸신 들린 사람들처럼 포도 한 송이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렇게 당도가 높은 포도는 처음 먹어 보았다. 와인을 담그려면 포도의 당도가 높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포도의 당도는 99.9999%는 되는 듯했다.

우리가 먹은 포도는 르카치텔리라는 품종으로 카헤티 지역의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말로만 듣던 르카치텔리를 직접 먹어보다니... 조지아 와인을 정복하기라도 한 듯 뿌듯했다. 이런 우연과 행운이 여행의 묘미고 기쁨일 것이다.
 
농부는 가면서 먹으라며 비닐 봉지 가득 포도를 싸 주기까지 했다. 생각지도 않은 조지아 농부가 베푼 인정에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무릎 위에 올려 놓은 검정 봉지는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가슴에 훈훈한 온기를 전해 주었다.
 
사실 조지아 가을 여행을 계획하면서 카헤티 지역의 하베스트 축제를 꼭 보고 싶었다. 또 포도밭에서 직접 포도도 따고, 와인을 담그는 체험 프로그램에도 참가할 수 있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와인담그기 체험은커녕 농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 실망감을 농부와의 짧은 만남이 한방에 날려준 것이다.

혹시라도 '리얼 와인 체험'을 원한다면 미리 입장이나 체험이 가능한 와이너리를 수배해 두는 것이 좋다. 농장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는 곳은 아무 데도 없으니까.
 
크베브리 양조법

조지아의 전통 크베브리 와인 양조기술은 4세기 기독교 전래 이후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수도원에서는 대규모로 와인을 만들었는데 네크레시 수도원에는 200평방미터 규모의 마라니(크베브리 와인저장고)와 한 번에 10톤의 포도를 압착할 수 있는 압착기가 5대나 있었다고 한다. 크바렐리의 이칼토 수도원과 알라베르디 수도원, 쿠타이시의 겔라티 수도원, 바르지아 수도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네크레시 수도원과 이칼토 수도원에는 마라니(크베브리 와인저장고)가 남아 있고, 그레미성 뽀그립(와인셀러)에는 사각 모양의 돌로 만든 대형 '사츠나헬리'(압착기)를 볼 수 있다. 'Since 1011'이라는 라벨처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알라베르디 수도원은 무너진 와이너리를 복구해 제2의 전성기를 구가중이다.

크베브리 와인양조법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카헤티 지방에서는 사츠니헬리(압착기)에서 압착한 포도즙과 차차(포도껍질, 포도줄기, 씨앗)의 혼합물을 크베브리의 85% 정도 채운 후 목 부분만 남기고 땅 속에 묻고 밀봉한 후 5~6개월 동안 발효시킨다. 반면 서부 이메레티에서는 압착기로 짠 포도즙을 차차 2.6%와 함께 크베브리에 넣은 뒤 1~2개월 발효시킨 후 11월에 차차를 제거하고 크베브리를 밀봉한 후 봄까지 숙성시킨다. 흑해 및 라차-레치후미 지역에서는 으깬 포도를 프레스에 넣은 채 4~5일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발효 중인 포도즙을 크베브리에 부어 계속 발효시키고 봄까지 숙성시킨다.
 
이때 크베브리를 땅 속에 묻어 14도 정도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크베브리 와인의 가장 큰 특징은 차차와 함께 발효시킨다는 점이다. 크베브리 안에서 혼합물들은 서로 부딪히면서 떫은 맛을 내기 시작하고 포도줄기에 함유된 다양한 성분과 어우러지면서 크베브리 특유의 맛과 색을 내기 시작한다.
 
조지아의 크베브리 와인 전통크베브리 양조기법으로 만든 조지아 크베브리 와인은 호박색을 띠며, 씨와 포도줄기에서 나온 성분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과 향을 낸다. 크베브리와인은 모두 화이트와인이다. ⓒ 변영숙
  
크베브리 와인은 호박색(Amber)을 띠게 되며 독특한 향과 깊은 맛을 낸다. 유럽에서는 흔히 오렌지 와인이라고도 부른다. 조지아 사람들은 결혼식과 같은 가족 행사나 귀한 손님이 오면 새로 크베브리를 개봉하여 와인을 대접하였다. 잘 만들어진 크베브리 와인은 100년까지도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늘날 조지아에서 전통적인 크베브리 제작기법이 사라져 가듯이 전통 크베브리 와인 양조법 역시 많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카헤티, 이메레티, 라차-레치후미, 구리아, 아브하제티, 사메그렐로, 삼츠헤-자하헤티, 아차라, 츠힌발리 등에 크베브리 양조의 전통이 남아 있기는 하나 언제까지 그 전통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크베브리 와인이 조지아의 대명사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 와인 시장에서 크베브리 와인의 점유율은 5% 남짓에 불과하다. 세계 와인 시장에서 조지아의 크베브리 와인이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만하다.
태그:#조지아와인, #크베브리 양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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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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