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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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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삶에 은유하는 이가 많다. 낯선 곳으로 떠나, 익숙하지 않은 일들과 부딪치고, 다시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닮아서일까. 흔히 배우자도 '여행의 동반자'로 비유한다. '결혼하기 전에 꼭 장기 여행을 다녀와라'는 충고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어떻게 여행하느냐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힌트를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떻게 여행하느냐'를 결정하는 첫 번째 질문은 '어디를 여행하느냐'이다. 멕시코를 여행하고 싶은 사람과 파리로 떠나고 싶은 사람, 짐바브웨를 걷고 싶은 사람과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싶은 사람의 욕구는 다르다. 남들이 다 싫다는데도 굳이 오지로 가서 고생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 도시에 빠져 몇 번이고 같은 곳으로 향하는 이도 있다. 
 
홍콩 밤거리ⓒ 박초롱
 
여행하고 싶은 도시를 묻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더듬어볼 수 있는 한 가지 힌트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홍콩'이야말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행지라 답했을 것 같다. 

쇼핑과 미식의 도시. 주말을 이용한 짧은 도깨비 여행. 신상 명품백과 A급 짝퉁을 동시에 구할 수 있는 곳. 없는 브랜드가 없다는 대형 쇼핑몰의 천국. 이곳에서 재배하는 것은 없어도, 못 구하는 것은 없다는 무역의 허브. 높이 솟아오른 빌딩 사이를 택시와 사람이 파도치듯 흐르는 곳. 
      
사람 많은 곳에 한 시간만 있어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거리는 내게 홍콩은 매력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백화점에서 한 시간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맛집 앞에 두 시간 줄을 서서 먹느니 종일 굶는 걸 택하는 사람이 과연 나뿐일까. 
 
고작 3박 4일이었지만, 볕 좋은 봄에 다녀온 홍콩은 그런 편견을 깨기에 충분했다. 한국에 김치와 '강남스타일'만 있는 게 아니듯, 홍콩에도 쇼핑몰과 맛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쇼핑도 미식도 관심 없는 여행객에게 홍콩을 즐기는 다른 방법을 소개한다. 당신이 몰랐던, 홍콩을 즐기는 색다른 방법.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이 노래를
 
영화 <중경삼림>의 배경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박초롱
 
1980년과 1990년대. 홍콩 영화가 한국의 스크린을 휩쓸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 영화들을 기억할 것이다. <첨밀밀>, <중경삼림>, <타락천사>, <희극지왕>, <금지옥엽>, <영웅본색>... 이 영화에 나온 촬영지를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 그곳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영화 OST를 들으면 더욱 좋다.
 
나는 홍콩의 숙소를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의 촬영지 청킹맨션 맞은편 솔즈베리 YMCA로 잡았다. YMCA의 뒷쪽 골목은 장만옥과 여명의 키스신 촬영지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의 낡은 청킹맨션은 어두운 쾌락에 찌든 분위기를 낸다. 
      
청킹맨션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열혈남아>의 촬영지였던 몽콕야시장이 나온다. 밤이면 해산물을 파는 노점들이 골목마다 진을 치고, 한자로 된 네온사인이 번쩍거린다. 동양인을 보면 '언니, 짝퉁 있어'를 속삭이는 흑인들이 거리마다 섰다. 길거리 가라오케도 독특한 풍경이다. 천막 밑에서 술을 마시며 한 명씩 나와 노래를 부른다. 주정뱅이들의 노래들이 다 그렇듯, 제정신으로 들으면 음정과 박자는 홍콩 밖으로 보낸 상태. 
      
왕가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중경삼림>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로 유명한 이곳은 끝없는 오르막길을 편히 갈 수 있게 해준다. <중경삼림>에서 페이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고개를 숙여 양조위 집을 보는 장면이 유명하다. 미드레벨을 탈 때는 역시 영화 OST인 'California dreaming'을 들어야 제맛.
      
<영웅본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트렌치코트를 입고 황후상 광장을 찾아가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희극지왕>의 배경이었던 센트럴 더들 스트리트의 가스등 아래 역시 사진 찍기 좋다. 19세기 말에 설치된 가스등이 홍콩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여행자의 도시에서 여행자와 어울리기
 
영화 <트랜스포머>의 배경 익청빌딩. 주민들이 사는 곳이니 꼭 조용히 사진만 찍고 빨리 떠나는 게 예의다.ⓒ 박초롱
 
홍콩의 크기는 서울의 1.8배라고 한다. 이곳에 약 700만 명이 살고 있다. 서울보다 인구가 적지만 홍콩은 어디를 가도 늘 북적인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여행자들 때문일까. 여행자가 많은 홍콩에서는 여행자들과 어울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밤늦은 시각, 란콰이펑에 갔을 때였다. 막무가내로 손님들을 배치하는 노점상 주인 덕에 나와 친구는 참 다양한 사람들과 합석해서 술을 마셨다. 그중 스웨덴에서 온 두 여행자와 우리는 죽이 잘 맞아 다음날 새벽이 가도록 란콰이펑에서 함께 놀았다. 
      
란콰이펑은 레스토랑, 바, 펍이 즐비한 동네다. 우리나라의 이태원과도 비슷한 이곳은 밤 11시쯤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새벽 2~3시가 되면 골목 전체가 음악 소리로 꽝꽝 울린다. 밤새도록 계속되는 축제랄까. 전 세계에서 모여든 여행객이 밤이 되면 다시 이곳으로 모여드니, 귀를 열면 온갖 나라의 언어가 흩날린다. 

이곳으로 오라며 호객 행위를 하는 영업사원들과 실랑이를 하는 재미도 쏠쏠하다.칵테일 1잔 값이면 2잔을 주겠다는 말에 3잔, 4잔을 부르며 저울질하는 재미. 홍콩 시장에서도 이런 흥정은 필수다. 
      
스웨덴 여행자 둘과 우리는 이후로 여행을 함께 했다. 트램을 타고, 리펄스베이에 가고, 익청빌딩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스웨덴이 그룹 아바(ABBA)와 이케아와 H&M의 도시라는 것과, 금리와 주택값이 문제라는 걸 알았다. 그들도 한국이 홍콩만큼이나 번잡한 도시라는 것, 청년실업이 문제라는 것, 성형수술의 천국이라는 걸 알았다. 

새로운 도시에서 이국의 여행자를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나는 누구누구의 딸이자, 어느 회사의 대리, 어느 단체의 대표에서 벗어나 그저 '여행자'일 수 있다. 그들도 나에게는 그저 스웨덴에서 온 어느 여행자 둘일 뿐이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릴 때, 나를 지우고 여행자라는 신분 안에 머무르는 것은 안온하다. 
 
몽콕 야시장 홍콩의 밤거리ⓒ 박초롱
 
소설가 김영하는 최근 낸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중략)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일 뿐이다."
 
한국에서 반복되는 일상의 흐름에 나를 맡기다 보면 가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엄마로서, 딸로서, 회사원으로서, 이 사회의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는 때론 즐겁고, 자주 버겁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은 이에게, 여행을, 홍콩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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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