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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경인방송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만난 임희정 아나운서. ⓒ 이희훈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스마트폰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지인들이 보낸 메시지였다. "실검(실시간 검색어) 1위, 너 맞아?", "이 기사 너야?" 달리던 차를 세우고 포털 사이트 앱을 켰다. '임희정 아나운서'. 정말로 실검 순위에 이름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저일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관련 기사를 찾아봤는데 제 이야기더라고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의 고백."

방송인 임희정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다. 지난 11일 그가 쓴 글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는 부모님을 보며 꿈을 향해 나아갔다는 내용이다(관련 기사 : 저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

처음부터 반응이 뜨거웠던 건 아니다. 하지만 차츰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사흘 뒤(14일)엔 한 포털 사이트 실검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모든 게 부모님에 대한 글 한 편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기사가 '쏟아졌다'. 동명이인인 다른 방송인의 사진이 잘못 실리기도 했고 '임희정 아나운서 복근 공개' 같은 어뷰징 기사까지 나왔다. 가슴이 뛰고 손이 떨렸다. "순식간에 도착한 카카오톡 메시지만 200개"가 넘었고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폭풍이 몰아친, 그 후
 
10년차 임희정 아나운서. ⓒ 이희훈
 
임희정 시민기자가 들려준 '실검 사태'의 전말이다. 지난 20일 경기도 수원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그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날의 일을 복기했다. 

매일 오후 2시~4시 경인방송 iFM <임희정의 고백라디오>를 진행하는 그는 실검에 오른 다음 날 청취자가 몰려들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문자 폭탄'은 없었다. 오히려 기존 청취자들이 메시지를 더 적극적으로 보내줬다. '임희정 DJ를 다시 보게 됐다', '고정 청취자가 되겠다'는 응원에 뿌듯했다고.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건 20~30대들이 보내온 수많은 고해성사다. 그의 글을 읽은 청년들은 쪽지로, 메일로 저마다 아버지의 직업을 '커밍아웃'하며 임희정 시민기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우리 아버지도 미장일을 하세요."
"정육점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피비린내가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도 건설 현장으로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직업을 밝히지 못했는데, 이 글을 보고 용기가 생겼어요."

형편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아나운서 준비생입니다. 이 직업은 소위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이 글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려운 상황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유학생입니다. 제 부모의 꿈과 미래를 빼앗아 대신 살아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는데, '내 부모가 틀리지 않았음을 내가 살아가는 모습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글쓴이의 마음이 너무 큰 위로가 됐습니다."

청년 10명 중 6명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을 믿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왜 많은 청년들이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임희정 시민기자의 고백엔 마음을 열었을까. 그는 "우리가 모르게 갖고 있던 편견이 깨졌기 때문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사실 저도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해서 포기하려 했어요. 언론사 카메라 테스트 한번 보려면 보통 10만 원 정도의 헤어·메이크업을 받아야 했는데, 부모님 지원이 없던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험 준비를 했거든요. 하지만 막노동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제 꿈을 꼭 이루고 싶었어요. 번듯한 자식이 되고 싶었거든요. 오히려 아나운서가 되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겠지'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힘들었죠. 그래서 아버지가 '건설사 대표'라고 거짓말도 한 적 있어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분들이라면 누구나 겪은 일일 거예요. 한 번쯤은 부모를 부끄러워 한 적도 있을 테고요. 원망도 했을 테고, 화도 났을 거예요. 저는 이 글을 쓰면서, 독자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그 감정들을 정리하게 된 것 같아요.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구나, 나의 부모를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해도 되구나, 하고요. 제 부모님 이야기였지만 우리 부모님들의 이야기였고, 딸인 제 감정이었지만 모든 자식의 감정 아니었을까요."


어머니는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활동 중인 임희정 시민기자ⓒ 이희훈
 
 
임희정 아나운서가 부모님에 대한 글을 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이희훈
 임희정 시민기자는 광주·제주 MBC 아나운서를 거쳐 현재는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활동 중이다. 라디오 DJ 일을 하며 행사 사회와 아나운서 아카데미 강의 등을 병행한다. 2017년 11월부터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경력이 하나 더 추가됐다.

부모님께서는 이번 '실검 사태'를 알고 계실까? 그에게 물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한쪽에서 티슈를 챙겨왔다. 그리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천천히 답변을 이어나갔다.

실검에 이름이 오른 그날, 어머니에게 바로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평소 같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밥은 먹었어?" 그는 어머니에게 전했다. "엄마, 잘 들으세요. 내가 엄마 아빠 이야기 쓰는 거 알고 있죠? 그게 뉴스에 났어요. 사람들이 진짜 많이 봤어."

어머니는 놀란 기색 없이 전라도 사투리로 답했다. "그런디 내일 보름인디... 너 찰밥 먹여야 하는디." 그가 한 번 더 물었다. "내가 계속 엄마 아빠 이야기 써도 괜찮아?" 어머니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암시롱 안 해. 괜찮아. 올려."

그는 어머니의 답이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절대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는 자부심. 온 세상이 자신의 이야기를 알게 돼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 오히려 걱정하는 쪽은 딸인 그였다. 망설임 없는 어머니의 태도에 그는 되레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 건 2017년 가을, 은유 작가의 글쓰기 수업에서였다. 수업 3주차에 '가족'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고민 끝에 아버지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글 쓰는 사흘간 새벽에 잠 못 이뤘고, 이후 일주일간 몸살을 앓았다. 그렇게 힘들게 쓴 글이 <오마이뉴스>에 처음으로 보낸 "일흔이 넘어서도... 평생 첫 차 타고 출근하는 아버지"다. 지난해 아버지 고희연 때 읽어드리기도 했다.  

부모님에 대한 글을 쓴 지 1년 하고 3개월이 지났다. 딸 임희정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상에선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심적 변화는 커요. 자화자찬 같지만, 조금 더 좋은 자식이 된 것 같아요. 그동안 불효만 했는데, 조금은 효도한 것 같아요. 너무 늦었죠. 너무너무 늦었죠."

이 글은 서두를 수 없다
  
임씨는 부모님 이야기로 책 출간을 준비 중이다. 오해는 마시길. 실검에 오르기 전부터 진행한 작업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조언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라." "출간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그도 잠시 흔들렸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하루라도 빨리 독자에게 보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그럴 수 없어요. 제가 쓰는 책은 서두른다고 절대 서두를 수 없는 책이더라고요. 개인 에세이가 아니라 부모님 이야기잖아요.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책이에요. 누구보다 신중하게 써야 하고, 시간이 걸리는 글이라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는 올해 안으로만 책을 내자는 마음으로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임희정 시민기자의 다음 꿈은 좋은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는 일. 그리고 그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내준 독자들과 책을 가지고 만나 찐하게 울고 웃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 더 있다. 멋진 장소에서 강연하기. 그 자리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초대하기. 당신들이 힘들게 키운 딸이 당신들의 이야기로 무대 위에 섰다고 보여드리기. 강연 맨 마지막에 부모님을 무대에 세워 박수받게 해드리기. 제일 큰 꿈이다. "그 생각만 하면 울컥울컥 눈물이 차올라요." 그는 그런 상상을 하며 계속 글을 쓴다. 부모님의 삶과 노동이 떳떳이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희정 시민기자 기사 보기 : http://omn.kr/1hhpg)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활동 중인 임희정 시민기자ⓒ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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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이희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