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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돼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된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철조망에 가린 고성 앞바다 청간정 앞바다 모습. 거리를 두고 보면 고성에 따라붙는 부정적 수식어에 눈이 가려 제대로 된 고성이 보이지 않는다.ⓒ 김정봉
 
청간정 아래 바닷가, 철조망이 막았다. 철조망 5m 앞에서 본 청간정 앞바다는 민통선, 휴전선, 분단군(分斷郡), 탄흔, 단절의 아픔, 군사보호구역 등 강원도 고성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이 철망에 덕지덕지 붙어 잘 보이지 않는다. 눈을 좀 더 가까이 철망에 갖다 대자 어느새 철망은 사라지고 온전한 바다가 보인다.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고성을 보았다.
           
공간적으로 가까이, 시간상으로는 몇백 년 거슬러 올라야 진짜 고성이 보인다. 예전 고성은 설악산 북쪽에서 금강산 일대를 아우르는 꽤나 큰 고을이었다. 몇 백 년 전통을 이어온 왕곡마을 또는 강원도 대도시 강릉에나 있을 법한 속이 꽉 찬 어명기가옥이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할 일이 아니다. '철망 눈'으로 보면 당최 이해가 안 되는 살림집이요, 마을이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청간정과 한때 대찰의 면모를 갖춘 건봉사에는 당대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유명한 문인과 화가들이 들끓었다. 게다가 한 고을에서 하나도 갖기 힘들다는 무지개다리, 홍교를 두 개씩이나 갖고 있는 고성은 인문적으로도 기름진 고을이다. 철망으로부터 5m 떨어진 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50cm 앞까지 가볼 참이다. 진짜 고성을 보러.
 
‘진짜’ 고성 앞바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조망 가까이 눈을 대면 온전한 고성 앞바다가 보인다. 사진은 청간정 위에서 내려다본 정경으로 의미만 부여한 것이다.(2016.12 촬영)ⓒ 김정봉
 
시인묵객, 화가를 불러 모은 청간정(淸澗亭)
 

멀리 백호의 기세로 금강산에서 달려온 백두대간은 설악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쫙쫙 갈라진 산등성은 사람의 근육 같다. 이 모습에 주눅 든 나는 토성면 청간리에 다다를 즈음, 아스라한 해안 절벽 위 정자에 몸을 감췄다. 정자 이름은 청간정. 누군가 모든 것을 '받아'준다 해서 '바다'라 했던가. 이 정자는 그것을 보고 배운 모양이다.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땅은 솟아 벼랑을 이루고 바로 곁에서 청간천 물은 요동친다. 설악산 어느 골짜기에서 흘러온 청간천 싱거운 민물이 동해의 짠 바닷물을 만나 화들짝 놀란 것이다. 솟은 땅은 소나무와 산죽으로 가득하다. 산죽은 웃자라 어른 키 두 배만 하고 소나무는 손바닥만한 비늘이 생긴 걸 봐서는 꽤나 오래돼 보인다. 청간정은 그 안, 벼랑 끝에 달렸다.
 
‘근육질’ 백두대간 백호의 기세로 백두대간은 금강산에서 설악으로 힘차게 내달린다. 사진은 청간정 위에서 바라다본 정경이다.(2016.12 촬영)ⓒ 김정봉
 
청간정은 언제 생겼는지 모른다. 다만 1520년에 중수(낡은 건축물을 고친다는 뜻)한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청간정은 바닷가에 있었다. 간성현감을 지낸 택당 이식(1584~1647)은 '정자가 바닷물과 떨어진 것이 겨우 5, 6보'라 했다. 청간정 앞에 만경대 바위가, 청간정 옆에 만경루가 있었다. 청간정을 사실적으로 그린 김홍도, 정선, 강세황은 물론 정충엽, 이의성, 허필 모두 청간정과 만경루, 만경대를 함께 그려 넣었다.

그런 청간정은 1884년 불타 버렸다. 1928년, 12개 돌기둥만 겨우 수습해 지금의 자리에 지었다. 예전 청간정 자리는 군사보호지역으로 출입이 제한돼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일까 싶어 청간정 옆 산죽오솔길로 들어가 보았으나 철조망에 막혀 더 이상 가지 못했다. 옛 문인과 화가들의 글과 그림을 보며 '도문대작(屠門大嚼)'이나 해야겠다.
 
청간정 정경 강원도 유형문화재 32호. 해안벼랑 끝에 달려, 동해바다는 물론 설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정자다.ⓒ 김정봉
 
청간정에 올랐다. 나는 멀리서 들리는 청간정 해변의 모래울음소리를 '눈으로' 들었다. 많이 알려졌듯, 고성 해변모래는 고운 모래, 명사(明沙)라 하지 않고 울음모래, 명사(鳴沙)라 한다. 밟거나 진동을 주면 쇳소리 비슷한 소리, 콧노래나 뭔가 잘게 씹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를 알았는지 청간정 해변을 두고 김정호는 한마디 남겼다.
 
"해변 위의 모래는 빛나니 흰 눈이 뒤섞인 것 같고 밟으면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니 주옥을 밟는 것 같다." - <대동지지> 16권
 
정선의 <청간정도>세부 옛날 청간정은 바닷가에 있었다. 옆에 만경루가, 앞에는 만경대가 있었다. 만경대에는 돌계단이 꼭대기까지 나있고 그 위에 두 사람이 신선놀음 하고 있다. (청간정 자료관에서 촬영) ⓒ 김정봉
  
청간정 해변 울음모래를 밟으며 한가로이 거니는 엄마와 아이들이 까마득하다. 울음모래소리는 울음소리 아닌 행복의 소리로 들린다.(2016.12 촬영)ⓒ 김정봉
 
해변을 걷는 엄마와 애들이 까마득하다. 모래를 밟을 때마다 울리는 모래 울음소리에 애들은 엄마가 콧노래 부른다 하고 엄마는 애들이 뭔가를 질겅질겅 씹는다 하겠다.
 
건봉사가 아닌 '금강산건봉사(金剛山乾鳳寺)'
 
육송정 홍교 보물 1337호. 능파교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변방에 이렇게 아리따운 무지개다리라니, 변방 고성을 다시 보게 된다.ⓒ 김정봉
  
건봉사 어귀 홍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겠지만 건봉사 어귀, 솔밭 안에 아주 조그맣고 앙증맞은 홍교가 솔발을 가로지르는 냇물에 걸쳐있다. ⓒ 김정봉
 
건봉사 길은 무지개길이다. 건봉사 대웅전까지 가려면 세 개의 무지개다리, 홍교(虹橋)를 지나야 한다.

맨 먼저 만나는 무지개다리는 육송정 홍교. 건봉사 5리 앞에 있다.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를 잇는다. 다음 무지개다리는 건봉사 어귀에 있다. 죽죽 뻗은 솔밭 안에 있는 아주 작고 앙증맞은 홍교다. 이제 인간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니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경계다. 마지막 다리는 능파교, 세속의 때가 남아 있다면 다 벗기고 들어오라 한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에 설립된 고찰이다. 27년 5개월, 만 일 동안 염불을 외며 기도하는 '염불만일회'를 열 만큼 사세(寺勢)가 남달랐다. 변방에 있었지만 사세는 변방 절이 아니었다. 조선 세조대에는 왕실의 원당이 되면서 조선 4대 사찰의 하나로 성장했다. 한때 3000칸이 넘는 당우에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를 말사로 두었다. 이랬던 건봉사는 대형 산불(1878년)과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신흥사 말사로 전락했다.
 
변방을 구실로 세상일에 나몰라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켰고 건봉사에서 법명을 받은 만해 한용운은 봉명학교를 세워 항일과 계몽운동을 하였다. 왕년의 영화는 부도밭에 남았다. 이렇게 넓은 부도밭은 본 적이 없다. 온전한 것에서 비석머리만 남아 '비목(碑木)'만도 못한 부도까지 크고 작은 부도가 뒤섞여 있다.
 
건봉사 부도밭 건봉사의 영화가 남아있는 곳이다. 온전한 것부터 비신은 사라지고 머리만 남은 부도비까지 수십 기 부도가 널려있다. ⓒ 김정봉
  
건봉사 불이문 강원문화재자료 35호. 1920년에 지어졌다.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썼다.ⓒ 김정봉
             
화마에도 불구하고 1920년생인 불이문(不二門)은 용케도 살아남았다. 옆에 500년 묵은 팽나무가 지켜줬다는 얘기가 들린다. 둘이 아니라는 불이문이다. 문 이름은 '분단'된 고성에 왜 이리 딱 들어맞는지, 남북으로 갈린 고성은 둘이 아니라는 의미로 들린다.
 
야트막한 오르막이 걸음을 죄어온다. 북으로 많이 오긴 한 모양이다. 능파교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는데 봉서루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금강산건봉사'. 북의 금강산, 남의 건봉사가 한마당에 있다니 일순간 마음이 달뜨기 시작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능파교 보물 1336호. 1704-1707년 사이에 축조된 것이다. 대웅전과 극락전 영역을 잇는 다리다.ⓒ 김정봉
 
여기서 금강산이 멀긴 해도 북에서 보면 금강산 끝자락이요, 남에서 보면 금강산 들머리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의 한줄기가 남서로 뻗어 건봉사에 닿은 것이다. 건봉사는 유점사와 더불어 금강산의 양대 본산 중 하나니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예부터 금강산에 가기 전에 건봉사에 들러 하룻밤 묵어가는 문인, 관료가 수두룩했다. 교산 허균은 금강산 유람 길에 건봉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건봉사가 어드메냐, 금강산 속에 있어 높고도 아스라하다"라 했다. 건봉사는 누가 뭐래도 금강산건봉사가 맞는 모양이다. 어쩌면 금강산이 예서 멀게 느껴지는 것은 마음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금강산건봉사 편액 봉서루 ‘금강산건봉사’ 편액이 인상적이다. 멀긴 해도 건봉사는 금강산 자락에 있다. ⓒ 김정봉
 
금강산과 건봉사의 연을 더 깊게 하려는 것인지, 봉서루에 1910년대와 1920년대 건봉사와 금강산 옛절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1929년에 찍은 건봉사 전경을 보면 불이문과 돌솟대, 능파교는 현재 있는 그대로고 대웅전, 관음전, 사성전, 명부전, 봉서루 등 크고 작은 절집이 계류 양편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최근 건봉사는 영화를 되찾으려는 듯 복원불사(사찰의 옛모습을 되살리는 일)를 벌이고 있다. 역설적으로 소멸과 몰락에서 오는 폐사지의 폐허미가 복원보다 낫다는 이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변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분단을 경험한 고성이라면 번성과 영화를 되살리는 게 낫지 않을까. 내 마음은 복원불사로 기울었다.
 
옛 건봉사 전경 1929년 건봉사 전경이다. 건봉사 가운데를 가르는 계류 양쪽에 크고 작은 전각과 문루가 가득하다.ⓒ 김정봉
 
남북관계가 좋아지면서 고성의 철조망이 느슨해지고 더 넓어지고 있다. 청간정에 들렀다가 건봉사에서 하룻밤 묵고 들뜬 마음으로 금강산으로 향하는 그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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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