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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마을의 가을 풍경 외암 이간의 호에서 마을 이름이 비롯됐다고 한다. ⓒ 김종길
   
'낯설군!'

절로 탄식이 나왔다. 여태 봐 왔던 우리 전통 정원과는 너무나 달랐다. 파격이라면 파격일 테고, 변화라면 변화일 테지만…. 처음 정원을 봤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충청남도 아산, 설화산 아래 외암마을의 깊숙한 곳에 건재 고택이 있다. 이 옛집에서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이 태어났다. 이간은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대학자 권상하의 문인이었다.
 
건재고택 건재고택은 대학자 이간이 태어난 집이다. ⓒ 김종길
 
흔히 권상하의 문하에서 학문이 뛰어났던 여덟 명의 유학자를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 했다(권상하가 충청도 황강에 살아서 강문이라고 했다). 이 강문팔학사가 유명해진 것은 이간과 한원진 간의 호락논쟁 때문이었다. 사람의 본성이 다른 사물의 그것과 같은지 다른지를 토론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논쟁이 벌어지자 다른 학자들이 가세하여 이후 100여 년 동안 조선 사회를 뒤흔든 이른바 호락논쟁이 전개된다.
 
스승인 권상하를 비롯한 충청도 학자들은 대부분 한원진의 '인물성이론'(호론)을 찬동했으며, 이간의 '인물성동론'(낙론)은 김창흡 등 주로 서울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서울 학자들의 '낙론(洛論)'과 충청도 학자들의 '호론(湖論)'이라는 학파가 생겼다. 강문팔학사는 이이, 김장생, 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지는 정통 기호학파를 계승하고 전파하는 데 기여했고, 조선 성리학의 심성설(心性說)을 심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학자가 태어난 고택의 정원     
 
건재고택 건재고택은 대학자 이간의 6대손이 이상익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 김종길
 
이처럼 이간은 조선의 대학자였다. 그는 호가 외암(巍巖)이다. 마을 이름은 그의 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외암마을은 이간의 6대조인 조선 명종 때의 이정(李珽, ?~1546)이 입향조가 되면서 예안 이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400호가 넘을 정도로 매우 큰 마을이었다.
 
건재고택은 이간의 6대손인 건재 이상익(李相翼, 1848∼1897)이 1869년(고종 6)에 지금의 모습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익의 손자인 이용기가 영암군수를 지낸 적이 있어 '영암댁'으로도 불렸다. 집은 서쪽에 가까운 남서 방향을 하고 있다.
 
건재고택 행랑채와 인공수로 고택 정원의 연못의 물이 오른쪽 담장 아래로 빠져나와 수로를 통해 동네 냇물로 흘러간다. ⓒ 김종길
       
건재 고택의 솟을대문은 늘 굳게 잠겨 있다.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최근에 잠시 공개하고 있다). 관리인의 허락을 얻어 대문을 들어서면 우리나라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금의 정원은 이용기가 1910년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택 정원은 특이하다. 대개 우리 전통 정원에서나 이곳 외암마을의 집들 대부분은 외부의 풍경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을 잘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과 이웃한 송화댁, 교수댁의 정원에서는 차경이 무시된다. 그 이유는 이 집들이 조선 말기나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져 차경보다는 정원 공간을 적극적으로 조영하는 외래적인 요소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전통 정원과 달리 여백이 없는 사랑채 정원      
 
건재고택 전통 정원과는 달리 사랑채 앞 마당에는 수목들이 우거져 있다. ⓒ 김종길
 
건재고택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랑채 정원이다. 사랑채 정원은 수목의 공간과 물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사랑채 앞으로 나무와 괴석이 배치된 마당 정원과 그 옆에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직사각형의 연못 정원이 있다.

전통적으로 행랑채와 사랑채 사이의 사랑마당은 대개 비워두거나 화단을 꾸미는 정도인데, 이 고택에선 마당에 소나무, 은행나무, 감나무 등을 심어 정원으로 조성했다. 거기다 일본 정원의 수법인 거북섬을 꾸미고, 설화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조성했다. 전통 방식과 외래 조경이 섞인 셈이다.
 
원래 처음 고택을 지었을 때는 사랑채 앞을 여느 집처럼 여백으로 두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이용기가 일본을 여행한 후 일본식 정원 수법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일본식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상록수를 주기적으로 손질하여 인위적으로 꾸민 일본식 정원과는 달리 침엽수와 활엽수를 섞어서 자연스럽게 수목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자에서 본 정원 풍경 정원에는 동쪽 마당과 서쪽 연못 뒤에 정자가 하나씩 있다. ⓒ 김종길
       
고택의 마당 정원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용기가 제주도와 전국에서 모았다는 갖은 모양의 괴석들, 관록 있는 노송들과 그 아래의 너럭바위들, 마당 앞을 가득 채운 소나무, 단풍나무, 산수유 등 곳곳에 심긴 나무들은 울창한 숲이나 깊은 계곡을 걸어가는 듯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정원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빽빽하게 심긴 나무들로 문간채에서 보면 사랑채는 아스라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사랑채에선 주위 산세를 조망하는 차경보다는 정원 자체의 아름다움에 탐닉할 수밖에 없다. 원래 사랑채 정원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소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회양목 등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그중 50여 그루나 있었다는 회양목을 지금은 볼 수 없는데 아쉽게도 가세가 기울자 후손이 모두 팔았다고 한다.

인공수로의 물을 끌어들인 연못 정원
 
건재고택 정원 우리 전통 정원 방식과 일본 정원 방식이 섞여 있다. ⓒ 김종길
    
연못 정원이 있던 자리는 원래 별당 자리였다. 연못은 초승달 모양이고, 돌다리로 건널 수 있게 했다. 연못 뒤 깊숙한 곳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예전에는 방문객들의 화장실이 있었다가 철거되었다고 한다. 정자는 마당 서쪽에 하나 더 있다. 설화산에서 옮겨 왔다는 오층석탑이 유독 눈에 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공수로를 통해 집 안으로 적극적으로 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조선 시대 상류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못과 수로 등의 물 시설들은 풍수 이론의 "기(氣)는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는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즉, 물은 기를 멈추게 하는 데 필요했던 것이다.
 
교수댁 정원 외암마을에서 건재고택 정원이 먼저 조성되었고, 이후 마을의 교수댁, 송화댁 등의 정원 조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 교수를 지낸 이용구가 살면서 교수댁이라 불렀다. ⓒ 김종길
      
외암마을에는 자연천이 마을의 남쪽을 감싸고 흐른다. 그런데도 설화산의 강한 불기운이 마을에 미칠 것을 염려하여 상류에서 물을 끌어와 마을 대부분의 집들을 통과하는 인공수로를 조성했다. 수로는 대개 불을 끄는 용도나 생활용수로 썼는데, 정원의 연못이나 곡수(曲水)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됐다.
 
이 인공수로를 정원으로 적극 활용한 곳이 바로 영암댁(건재고택)이었고, 이후 마을에 있는 교수댁, 송화댁 등의 정원 조성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송화댁에는 물줄기를 곡선 형태로 만든 인공수로인 곡수거(曲水渠)가 조성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들 연못은 대개 네모난 조선 시대의 연못과 달리 그 형태가 다양하다. 건재고택의 연못은 자연형으로, 연못을 따라 도는 동선을 지닌 일본 정원의 회유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송화댁 정원 송화 군수를 지낸 이장현 살면서 송화댁이라 불렸다. 물줄기를 곡선 형태로 만든 곡수거가 있다. ⓒ 김종길
 
건재고택 정원은 마을을 흐르는 수로의 물을 안채 동쪽 뜰 작은 도랑으로 끌어들여 사랑채 사잇담 밑으로 흘러가게 했다. 이 물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 작은 폭포가 되어 연못으로 떨어진다. 연못에 잠시 머물렀던 물은 다시 남쪽으로 흘러 담 밖에서 동네 앞 냇물과 만나게 된다. 연못은 축소된 자연경관을 보는 듯하고, 수로 양쪽으로는 막돌을 쌓았고, 연못의 위아래에는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도랑의 돌다리를 건너면 뜰 동쪽의 정자에 이른다.
 
사랑채 동쪽 기단에는 굴뚝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마당에 낮게 깔리며 운해를 이룬다. 이 운해 풍경을 사랑방이나 마루에서 보고 있자면 이곳은 곧 선경이 된다. 연기가 만들어내는 그 환상적인 풍경은 이곳을 더욱 특별한 공간으로 만든다. 또한, 연못 주위를 이리저리 거니는 동안 시시각각 변하는 정원의 풍경에 매료된다. 이것이 바로 이 정원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건재고택 연못 정원 연못 위아래에는 두 개의 돌다리가 있어 연못을 중심으로 회유할 수 있다 ⓒ 김종길
  
건재고택 사랑채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다양한 현판과 주련이 있다. 중국이나 일본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함과 괴석 등이 있다 ⓒ 김종길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사잇문이 있다. 유심히 보면 대문에서 사잇문까지 징검돌들이 점점 늘어서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징검돌에서 잠시 사랑채 건물을 바라보면 추사 김정희 등 갖은 서체로 쓰인 현판과 주련이 현란하게 들어온다.
 
건재고택의 사랑채 정원은 거닐기에 좋고, 감상하기에도 좋아 색다른 만족감을 주는 정원이다. 정원이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삶의 방식에 따라, 추구하는 사상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정원이라 할 수 있다. 
 
건재고택 연못 정원 비록 전통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차경은 무시되지만 이곳에선 정원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탐닉할 수 있다. ⓒ 김종길
태그:#건재고택, #이간, #외암마을, #교수댁, #송화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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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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