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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포토뉴스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다섯 명은 결국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차라리 천형이라고 믿고 싶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오는 18일부터 사흘간 마지막 세월호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오마이뉴스>는 긴급 기획을 편성해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이들에게 조그마한 용기를 주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후원(좋은 기사 원고료)은 전액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전달됩니다. (후원하기) http://omn.kr/olvf [편집자말]
세월호 미수습자 남현철군의 아빠와 엄마가 2014년 4월 17일 진도체육관에서 쓰러져 링거를 맞으며 손을 꼭잡고 있다. ⓒ 이희훈
15일 오후 전남 목포 신항만에 인양된 세월호가 침몰하며 부숴진 모습으로 거치되어 있다.ⓒ 이희훈
단원고 2학년 남현철. 아직도 엄마가 애타게 찾고자 하는 아들의 이름이다.

그 전날, 엄마는 체크카드에 돈을 몰래 넣어뒀다. 수학여행 때 쓰라고 미리 용돈을 준 터였지만, 조금 더 즐겁게 다녀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항상 일터에서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묻는 엄마 때문에 "친구들한테 마마보이 같다는 얘기 듣는다"던 아들. 그래서 이번엔 먼저 전화하지 않겠노라 말했다. 제주도에 도착하면 그저 도착했다는 전화만 달라고 했다. 그러면 그때 체크카드에 여윳돈을 더 넣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서프라이즈!

전화는 오지 않았다. 역시나 엄마가 못 참았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출근길에 아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았다. 친구들이랑 노느라 못 받나 했다. 일할 준비를 하는 중에 사장이 TV를 보다 말했다.

"야야… 단원고배가 넘어가고 있단다."

그리고 3년 7개월. 아직 전화는 오지 않았다.

미수습자 가족. 세상이 엄마를 부르는 이름이다.

고개 숙이고 입 닫고 산 엄마

지난 14일 저녁 엄마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언론이, 사람이 무서워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닫고 살았다. 채 피워보지 못하고 떠난 아들의 이름에 흠을 내는 댓글들이 무서웠다.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온 지난 4월부터 200일 넘게 그렇게 침묵했다. <오마이뉴스>와 만난 이날도, 그는 이름을 밝히길 거부했다. 그냥 '현철이 엄마'로 불러달라고 했다.

맞벌이를 하는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집에서 맞이하지 못했다. 그래서 '포스트잇'을 붙였다.

"제가 출근을 하잖아요. 애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을 테니 메모를 해놔요. 다 똑같은 말이죠. '잘갔다 왔어? 손 씻고 냉장고에 우유 있으니 마셔. 밥 챙겨먹고 학원 잘 다녀와'. 전날 말싸움을 좀 했으면, 부모들이 흔히 하는 말 있잖아요. '다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그리고 미안해' 이런 감정 표현. 그런데 현철이가 그 포스트잇을 다 안 버리고 있더라구요. 책상 서랍에 다..."

아, 이 녀석은 말은 안해도… 고맙고 미안했다.

또 그 전날, 엄마가 늦으니 수학여행 짐 좀 싸놓으라고 했지만, 역시나 그러지 않았다. 퇴근 후에 같이 가방을 꾸렸다. 아들이 침대에 눕더니 갑작스레 "역시 집이 제일 편해"라고 말했다.

3년 후인 2017년 4월 28일, 그 가방만 덩그러니 엄마 품으로 돌아왔다. 제일 편하다는 집으로, 가방만.

무섭게 변해가는 아빠

세월호 미수습자 단원고 남현철군의 아버지 남경원씨.ⓒ 이희훈
다시 2014년 4월 16일. 뉴스를 접하고 단원고에 모인 학부모들이 버스를 타고 진도로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전원 구조' 속보를 듣고 잠시 안도했다. 현철이 아빠 경원씨는 "이왕 버스도 빌려서 내려가니 현철이 옷도 하나 사주고 고기나 먹여서 데려오자, 이것도 큰 경험이지"라고 엄마한테 말했다. 그러나 버스가 대전에 도착할 때쯤에는 상황이 다시 변했다. 버스 뒷자리에 앉은 다른 엄마가 배에서 탈출한 딸과 통화를 했다. 현철이는 전화가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손 안 짚고 백덤블링까지 했던, 운동신경 있는 아이니까 괜찮을 거에요" 되뇌였다.

현실은 가혹했다. 엄마와 아빠는 진도체육관에서 여러 번 기절했다. 아빠 경원씨는 신열에 들떠서 아이를 찾아 헤맸다. 정부 관계자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탁자를 내리치던 팔이 부러져도, 그는 몰랐다.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 해 여름 폐결핵과 당뇨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 또 그 해 11월 처음 수중 수색 종료 발표가 나왔을 때도 경원씨는 또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의 말대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제가요. 아이 시체를 몇 구씩 봤는지 아세요? 키가 비슷하거나 뭐만 비슷하면 꼭 가서 봤어요. 남자아이 시신을... 솔직히 시신 찾으면 빨리 처리하고 나도 따라죽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계속 안 나오더라고. 그래서 현철이가 아빠 살라고 안 나오는건가 싶었어요. 나중엔 '안 죽을 테니까 현철아 빨리 나와라' 속으로 외쳤죠."

엄마는 "지옥이 있다면 거기가 지옥이었던 것 같다"고 진도 생활을 떠올렸다. 20년 가까이 가족들에게 큰 소리내지 않던 아빠는 누구라도 물어뜯을 듯이 변해갔다. 큰 체육관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자기네만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하루 전만 해도 아이를 잃은 같은 아픔에 친해졌던 사람들이, 아직도 자식을 찾지 못한 이들을 마주하지 못해 야반도주하듯 체육관을 떠나던 때였다.

지옥

15일 오후 전남 목포 신항만에 인양된 세월호가 침몰하며 부숴진 모습으로 거치되어 있다.ⓒ 이희훈
죄책감이 이들을 휘감았다. 현철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원하는 대로 '외국인 대안학교'를 보냈다. 학비가 꽤 들지만 영어를 잘하고 싶었던 아들을 위한 결정이었다. 인가를 받지 못한 학교였던 게 문제였다. 엄마 아빠 생각에 따라 일반 학교로 돌아오면서 현철이는 자기보다 1살 늦은 아이들과 반 친구가 돼야 했다. 처음부터 대안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면… 아니 그 대안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그때 그 배에 있지 않았을텐데.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2014년 11월 정부의 수중수색 중단 발표 후 지옥 같은 진도를 잠시 떠났다. 물론 그곳이 아니라도 눈물을 쏟을 때는 많았다. 사망자가 아니라 실종자로 분류된 현철이 앞으로 입대 영장이 날아왔을 때, 아빠가 윗니의 뿌리가 모두 녹아내려 치과에서 윗니를 모두 빼고 합죽이 할아버지처럼 집에 왔을 때, 엄마는 울었다.

집은 떠나지 못했다. 혹시라도 아들이 정신을 잃고 남해 어딘가 무인도에 갇혀 있다가 돌아올 수 있다는 소설 같은 기대도 해보았다. 아들이 집에서 입었던 바지, 한 번만 입고 걸어두었던 외투 등은 세탁하지 않고 옷걸이에 걸어뒀다."꼬릿꼬릿한 냄새가 난다"고 놀렸던 아들의 내음이 옅어지는 게 더 아쉬웠다.

2017년 4월 11일,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구체적인 기다림이 다시 시작됐다.

공포

15일 오후 전남 목포 신항만에 인양된 세월호 주변으로 선내 수색등을 하며 꺼낸 잔여물들이 쌓여 있다.ⓒ 이희훈
세월호 미수습자 단원고 남현철군의 아버지 남경원씨(오른쪽 두번쨰)가 해수부와 협의가 끝난 후 미수습자 가족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아빠 경원씨는 정신 없었던 첫 기다림 때보다 두 번째가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목포신항에 뉘어진 세월호가 어디서도 눈에 띄는 게 답답했다고 했다. 200일 넘게 기다리면서 조금씩 줄어드는 가능성에 가슴이 꽉 죄였다고도 했다. 매일 오전 9시 50분 전날 수색 상황을 종합하고 오늘의 계획을 설명하는 정부 브리핑 때가 그래서 두려웠다. 아빠는 서너 달만에 체중이 16킬로그램이나 빠졌다.

사실 세월호가 인양될 때도 불안했다. 저 배 안에서도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건 공포였다. 엄마는 "지금은 5명이지만 만약 혼자 남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쓸쓸하고 아프겠어요"라고 말했다.

"안산에 다녀올 때도 우리 가족들은 목포 톨게이트만 지나면 말이 없어져요. 사실 우리가 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시간을 보내면서 저 배만 보고 있어요. 여름이면 해가 길잖아요. 그런데 작업하시는 분들이 5~6시께면 정리하시는 거에요. 마음 같아선 1시간만 더 해주셨으면 했는데… 그런 시간이 제일 힘들었죠."

사실 더 기다린다면 기다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목포신항을 떠나려는 것은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한때 같이 아파했던 사람들을 점점 미워하게 될까봐, 또 그들이 세월호를 괴물로 바라볼까봐, 그게 겁나서다.

아빠 경원씨는 "정부한테 수중 수색도 해달라고 하면 정부는 하겠지요"라며 "그렇지만 결국 관둘 시기가 와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한테 돌을 던지기도 하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돌아갈 수 있을 때 돌아가고, 우리 마음이 순수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채비

세월호 미수습자 단원고 남현철군 물품.ⓒ 이희훈
가족들은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아들을 놓아줄 준비를 하고있다. 지난 13일 안산 집에 들러 하늘로 올려 보내줄 현철이 옷들을 챙겨 왔다. 집에서 입었던 사복 몇 벌을 챙기면서 마지막까지 발견되지 않은 교복부터 속옷, 양말, 신발까지 모두 새로 마련했다. 수학여행 때 새 옷을 챙겨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함께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마음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는 마음이 정리될 때 현철이가 가장 좋아했던 재킷과 옷가지 등을 모아 따로 태워 보내기로 했다.

엄마는 "마음을 추스르고 나면, 무엇을 하든 현철이 이름으로 봉사를 하면서 살 것"이라고 말했다. 진도에서 자원봉사자들을 보면서 성수대교·씨랜드·천안함 그 많은 일들이 있을 때 자신이 뭐하고 있었지, 그래서 벌을 받는 건가,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현철이한테 선한 사람 돼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겠노라고 말했다.

또 이것만은 짚어야 한다고 했다. 수색 종료가 끝은 아니라고.

"우리 아이를 찾는 것은 끝나지만, 진실을 밝히는 건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세월호ⓒ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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