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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20대는 어땠나요? 반짝반짝 찬란했나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암울했나요. 어떤 하루를 보냈건, 누구나 공평하게 10년 동안 20대를 살아내죠. 그렇다면, 금수저 물고 태어났을 것만 같은 국회의원들의 20대는 어땠을까요. 어떤 삶을 살았기에 국회의원 자리에 올랐을까요. <오마이뉴스>가 국회의원들의 20대, 청춘 한 자락을 들춰봤습니다. [편집자말]
장면 하나.
머리카락이 복슬복슬한 청년이 헤드폰을 끼고 레코드판을 만지고 있다. 빼곡하게 꽂힌 수백 장의 레코드판 앞이 DJ인 그의 자리. 헌데 특이하게도 양복을 입고 있다. 넥타이까지 맸다. 그게 20살 남자의 '가오(허세를 뜻하는 속어)'였다. 2층에 있는 별음악 다방에서 디제이를 하고 3층에 있는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그의 일과였다. 경영학도였지만 책을 덮은 지 오래였다.

장면 둘.
'양키(미국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 고 홈'을 외치며 반미 투쟁이 한창이던 때, 청바지를 입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따르기 싫었다. 통 넓은 청바지를 입고 굳이 운동화를 꺾어 신었다. 지금 생각하면 "추접시럽"지만, "그땐 그게 멋인 줄 알았"단다. 입대 전 청바지를 꿰차 입고 16박 17일 무전여행을 했다. 한겨울에 혼자 바닷가를 찾았다.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카세트가 함께였다.

이 한량 같은 20대를 보낸 주인공은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다.

"낭만을 좇았죠. 음악 듣고 소주도 엄청 마시고, 많은 사람 만나고 내 맘껏 여행도 다니고. 그 때 내 삶을 풍부하게 하는 어떤 게 남은 거 같아요."

20대 시절 가장 빛나던 순간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그는 DJ를 하고 무전여행을 했던 그 때를 펼쳐냈다. "그립다"는 말과 함께, 물을 소주처럼 넘겼다.

윤소하 정의당 의원의 20대. ⓒ 윤소하 의원실 제공
DJ, 특전사, 운동권...오묘한 '키워드'로 섞인 윤소하의 20대

돌이켜 보면 아련함으로 남지만,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80년, 대학에 입학한 지 2개월밖에 안 된 새내기 시절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다. 5월 21일 목포에 시민군이 내려왔다. 아버지의 전화가 빗발쳤다. "해남에 내려오지 않으면 때려 죽인다"고 했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공무원인 아버지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은 했지만 사상적으로 철저히 무장된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해남으로 내려갔다.

함께 하지 못하고 도망갔다는 부채의식이 그를 지배했다. 패배감에 젖었고 그럴수록 음악에 매달렸다. 무전여행도 일종의 자기 위로였다. 살고 싶은 대로 살다 도망치듯 군대를 갔지만 운 나쁘게도 특전사에 차출됐다.

"미쳐 불겄더만. 공수부대(특전사)라니까 암담하더라고요. 내가 지원한 것도 아니고 참...공수부대는 생명수당이라고 월급을 2만 원씩 더 주는데 그건 좋아부렀지. 다 술값으로 썼어."

특전사 시절 윤소하 의원의 모습. ⓒ 윤소하 의원실 제공
군대 얘기가 나오자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섞였다. 무용담 같은 '특전사' 시절 얘기가 끝나자 "정신 차리고 '운동'한" 얘기로 흘렀다.

"부채의식이 늘 한켠에 자리 잡고 있어서 군대 제대하자마자 운동권에 뛰어들지 않았나 싶어요. 그 후로는 운동적 삶, 목적의식적인 삶만을 살았죠."

1985년, 제대 후 그의 일상은 '청년 운동, 노동 운동, 전선 운동'이 전부였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목포시지부 조직부장을 했고, 목포민주주의청년연합 의장을 했으며 참여와통일로가는목포시민연대 대표를 지냈다. 이후에도 숱한 의장·대표직을 거치며 목포에 뿌리를 내렸고 이를 기반으로 두 번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대 때 정의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가 사회운동을 하는 사이 집안 경제는 아내 몫이었다. 84학번 수석으로 대학교에 들어온 아내는 함께 운동을 하던 동지였지만 결혼 후 생계를 짊어진 가장이 됐다. 이따금씩 아내가 "형, 소주 한 잔 합시다"하면 그는 지레 겁을 먹는다고 했다.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는데 내 인생은 뭐냐'고 하는데 할 말이 없죠. '형, 한 병 더 마십시다' 하면 아이고 오늘은 죽는 날이구나..."

윤소하 정의당 의원 ⓒ 권우성
"20대엔 격랑 속에서 좌충우돌해야... 지금은 그렇게 살면 내쳐버리잖아"

아내의 희생 속에 운동권에 투신한 30여년 세월을 지나 결국 국회의원이 됐지만 윤 의원은 열패감에 시달렸던 20대에 대해 "그런 세월이 또 있을까" 싶은 나날이었다고 말한다.

그에겐 '그립고 그리운 20대'. 그 한복판을 두 딸도 지나가고 있다. 

"큰 딸은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 국문학과나 영문학과에 가고 싶다더라고요. 근데 애 엄마가 '굶어 뒤질 일 있냐, 집안 형편 모르냐'고 하대요. 주사 바늘이 무섭다고 겁도 많은 애인데... 내가 벌지 못해서 딸 편을 못 들어줬죠. 둘째도 당연한 듯이 간호학과를 가더라고."

국회의원의 딸이라면 으레 '금수저'로 여겨지지만 두 딸은 꿋꿋이 자신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큰 딸은 대학병원에서 1년 넘게 버티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그만두고 만두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이미 그가 국회에 입성한 후의 일이다. 둘째 딸도 1년여 취업을 기다리다 얼마 전 광주에서 간호사 일을 시작했다. 

두 딸을 보면 안쓰러운 감정이 솟는다.

"20대에는 좌충우돌, 그렇게 살아야 해요. 겉멋도 부리고 격랑 속에서 살아야지. 실컷 방황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체화되는 게 많거든요. 아이들이 그런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품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내쳐버리잖아요. 천천히 삶의 방향을 잡아가면 되는데 말이죠. 80년대에는 절대적으로 빈곤했지만 더불어 함께 가니까 상대적으로 풍족했어요. 지금은 죄다 자기 거 챙기기 바쁘니 사회가 이렇게 된 거예요. 다들 경쟁만 하잖아. 그러니 아이들이 스펙에만 쫓기고 뭘 내지르지를 못하죠."

윤소하 정의당 의원 ⓒ 권우성
두 딸의 삶이 바뀌길 바라는 것, 그가 정치를 하는 이유다.

"지금은 나라가 울타리를 쳐주지 않고 무조건 개인 탓으로만 돌리잖아요. 공동체 복원이라는 게 결국 나라가 책무를 다한다는 거거든요.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의 복원이라는 거, 그게 내가 정치하는 이유에요. 이게 추상적인 게 아니에요.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거거든요. 그 울타리를 정책적으로 국가 예산으로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어요. 지금 참으면 나중에 좋아질 거야가 아니라 '지금 살기 좋게 해줄게' 하는 정치가 돼야 해요. 미래라는 게 현재에서 출발하는 거잖아요.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 다 못 사는 양극화되고 불평등한 현실을 바꿔줘야죠."

'국회의원' 윤소하이자 '아빠' 윤소하의 바람은 하나다.

"우리 딸들이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걸 찾았으면 좋겠어요."

20대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 윤 의원에게 남겨진 몫이다.
윤 의원이 선곡한 오늘의 BGM : Bird on the Wire by Leonard Cohen
Like a bird on a wire. Like a drunk in a midnight choirI have tried in my way to be free 
전선 위의 새처럼, 한밤에 술 취한 주정뱅이처럼 자유로워지려고 했죠 (노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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