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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한국전쟁 중 산동네 고지대에는 피란민들의 보금자리인 판잣집 천막촌이 나날이 늘어났다. ⓒ NARA


<이별의 부산 정거장>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호동아가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하고, 남인수가 노래한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휴전 무렵인 1953년 7월에 발표된 곡으로, 그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지금도 부산 사람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 갈매기>와 함께 부산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로 즐겨 부른다.
한국전쟁 중의 부산역, 부산은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로 수많은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도시다. 이 역사는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로 옛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 NARA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공무원들과 회사원들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서울로 떠났고, 피란 중이던 학교, 국제시장에서 장사하던 장사꾼조차도 속속 서울로 떠났다. 그래서 부산역은 연일 서울로 가는 승객들로 붐볐다.

피란 중 영주동·대청동·대신동·수정동 산중턱 천막집이나 판잣집에 살면서 경상도 사투리와 부산 아가씨와 친밀해진 사나이의 사랑을 그린 이 노래는 당시 피란민들의 애환을 잘 그렸다.

나는 구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줄곧 부산에 살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부산에 자주 다녔다. 특히 초등학생 때 여름·겨울방학이면 부산 부모님 곁에서 한 달을 보낸 뒤 개학 무렵에야 할아버지·할머니가 사시는 고향 구미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부산은 내게 제2의 고향처럼 친숙하다. 처음 우리 집은 초량동이었고, 이후 부산 역 가까운 동광동, 부민동, 아미동, 서대신동 등이었다. 그래서 부산 남포동, 광복동, 국제시장, 우남공원(현 용두산 공원), 자갈치시장, 송도 해수욕장 등은 매우 익숙한 곳이다.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시절에 먹었던 부산오뎅(어묵), 팥빙수, 석빙고 아이스케키 등의 맛이 입안에 남아 있다.

1950. 9. 29. 부산. 임시수도 부산의 중심부인 중앙동 시청과 영도. 정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제5육군병원이었다. 이후 이 건물은 부산상공회의소로 되었다가 지금은 그 자리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섰다. ⓒ NARA


굳세어라 금순아

오늘날 부산이 우리나라 제2의 도시로 크게 성장하게 된 계기는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른 개항으로 항만시설이 건설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역항으로 발달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부선 개통으로 부산이 그 출발역이 된 것도 도시 발달에 촉매가 됐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임시수도를 대전으로 옮겼다. 그러나 대전도 위태해지자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7월 16일 다시 경상북도 대구로 천도했다. 하지만 전세가 좀처럼 호전되지 않자 정부는 8월 18일 부산으로 재차 천도했다.

부산이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되면서 부산시 서구 부민동에 있던 경상남도 도청은 임시 중앙청이 됐다. 또 부산극장은 졸지에 임시 국회가 됐으며, 미 대사관을 비롯한 외교기관도 부산의 여러 건물로 옮겨왔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대역전되면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다. 그 뒤 10월 27일 수도를 서울로 옮겼다. 부산은 임시수도로서 70일 정도로 그 역할을 다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해 연말부터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밀리자 정부는 1951년 1월 3일 다시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이후 정전협정 체결 후인 1953년 8월 15일 다시 천도할 때까지 부산은 총 1023일간 대한민국 임시수도였다.

부산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전국에서 100여만 명 이상의 피란민들이 들끓었던,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애환이 많았던 도시였다. 부산은 평지가 별로 없었던 도시다. 한꺼번에 10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들이 몰려들자 언저리 산등성이는 피란민 판잣집·천막촌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거리마다 골목마다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 어려웠던 피란 시절의 애환을 잘 드러낸 <굳세어라 금순아> 노랫말은 이렇다.
1950. 9. 29. 부산. 임시수도 부산의 제1부두. ⓒ NARA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김사랑 작사, 박시촌 작곡, 현인 노래)
1951. 6. 25. 부산, 정부 3부 요인들이 6.25 1주년 기념식에서 전몰장병들에 대한 묵념을 드리고 있다. ⓒ NARA
그동안 부산에는 한국 정치의 중심지로 땃벌레,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 정체불명의 폭력단체들이 난무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는 '부산 정치 파동'의 진원지로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부산 정치 파동은 '1952년 여름, 이승만 정권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집권하기 위해 직선제 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키려 한 행위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말한다).

나는 1~3차 NARA 방문 때마다 5층 사진 자료실에서 한국전쟁 기간의 부산 모습을 여러 컷 찾을 수 있었다. 부산역은 휴전 직후인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로 옛 모습을 잃었다. 화재 전 온전한 부산역의 모습을 발견할 때 그 기쁨이란. 아마도 이 사진은 부산시의 역사문화재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 스캔한 원본 그대로 게재했다.)
한국전쟁 중의 부산역, 부산은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로 수많은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도시다. 이 역사는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로 옛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이 사진은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옛 부산역으로 대단히 귀중한 사진일 것이다. ⓒ NARA
부산역 화재 후의 모습. ⓒ NARA
1945. 9. 21. 부산. 미 해군 상륙을 환영하는 부산시민 대회. ⓒ NARA
1950. 8. 6. 미군병사들이 부산항 제1부두에 내려 전선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 NARA
1951. 6. 25. 부산. 미국공보원(후, 미 문화원) 앞에 게시된 6.25 1주년 기념 포스터를 시민들이 바라보고 있다. 이 건물이 1982년 3월 18일 부산 고신대 학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항거로 방화했던 곳이다. ⓒ NARA
1950. 7. 11. 부산의 중심부인 중앙동, 남포동 일대와 영도 전경 ⓒ NARA
1952. 4. 부산. 제2대 4.25 국회의원 선거 투표장인 된 동광동회사무소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자 줄을 서 있다. ⓒ NARA
1951. 1. 8. 부산. 먼저 도착한 북한의 함경도 피란민들이 부두 철문 앞에서 뒤따라 올 가족 친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 NARA
1951. 1. 18. 부산. 긴급 구호양곡(안남미)이 부두에서 하역되고 있다. ⓒ NARA
1951. 1. 18. 부산. 흥남철수작전에서 선적된 탱크가 부두에서 하역되고 있다. ⓒ NARA
1952. 4. 2. 부산. 부두에서 긴급 구호미로 하역한 양곡을 즉석에서 가마니로 포장하고 있다. ⓒ NARA
1951. 1. 8. 부산. 임시 수도 항도부산에 100여 만의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임시로 형성된 암시장에는 없는 게 없었다. ⓒ NARA
1953. 6. 13. 부산. 휴전반대 부산시민 시위 대열이 부산역 앞을 지나가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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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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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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