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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강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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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 우리가 찾던 길. ⓒ 이수지
춘천에서 여행을 재정비했다.

이건 아니다. 하루에 20km 이상 걷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여행. 차가 분주하게 다니는 도로 길을 걷는 게 정말 싫으면서도, 그래도 목적지는 가야 하니 꾸역꾸역 걷는 여행. (관련 기사: 찻길따라 걷는 도보여행, 최악이다) 이대로 부산까지 걷는다면, 이 여행은 의무적으로 출근카드 찍기에 매달렸던 이전의 생활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엄마가 억지로 시켜서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어떻게든 선생님 눈에 안 띄고 땡땡이치기 위해 애썼던 내 어린 날들과 다를게 없을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긴 여행. 국토종단이라는 힘들고 고된 여행. 그러니까 자유고 독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아니다. 이 여행은 언젠가부터, 우리가 만들어낸 어떤 의무에 의해 질질 끌려가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누가 시켜서 한 공부처럼. 마지못해 다니는 회사처럼.

비에 젖은 마을길ⓒ 이수지
나와 너 ⓒ 이수지
스마트폰 지도로 원주까지 이어지는 길을 탐색했다. 주로 샛길, 산, 작은 마을 길을 연구했다. 어떤 샛길은 곧장 끊겨버렸고, 어떤 샛길은 도로와 만나 또 다른 샛길로 연결되었다. 도로를 따라가면 5km만 걸으면 될 길을 하루 꼬박 산을 타고 가기로 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갈 것이다. 도로 대신 마을 길로, 지름길 대신 산을 타고, 멀고 길게 돌아서.

가는 비가 내렸다. 비에 젖어 반짝반짝 빛나는 시골길. 낮게 깔린 구름 아래 샤워하듯 산뜻한 논밭. 비닐하우스 너머 하얀 안개에 둘러싸인 산. 잡초가 마구 자라나버린 낡은 담장. 펜스 사이로 고개를 내민 순한 소들. 열 쌍의 깊고 호기심 많은 눈이 우리가 걷는 속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70번 국도로 빠진 마을 길은 곧장 김유정 문학촌으로 연결되었다. 뿌연 메밀꽃이 핀 아담한 마을이다. 비가 쏟아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걷자.

우리가 걷는 속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깊고 호기심 많은 열 쌍의 눈 ⓒ 이수지
우비 쓰고 걷는 길 ⓒ 이수지
마을에는 식당과 카페가 두어 개 있었다. 식당에서 두부찌개를 먹었다. 배는 채웠으니 이제 숙소만 해결하면 된다.

"사장님, 혹시 이 마을에 모텔 있어요?"
"모텔? 글쎄. 예전에는 여관이 하나 있었는데, 시에서 김유정 문학촌 만들면서 폐쇄했어요. 여관은 외관상 보기에 안 좋다고."


저렴하고 아늑하기만한 여관이 대체 어쨌다는 건가. 문학촌과 여관이 어울리지 않을 이유는 뭔가. 문학은 순수하고 여관은 퇴폐적인가? 단순하고 유치한 구분 짓기다. 덕분에 오늘도 노숙이다.

"김유정역 앞에 가면 쉼터가 있어요. 비 오니까 거기다 텐트치면 되겠네."


식당 사장님이 말한 쉼터에는 비를 가려줄 지붕이 있었다. 저녁을 맞는 역사 앞은 조용했다. 벤치에 앉아 책을 보며 밤이 떨어지길 기다리다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 가는 막차가 떠나고 얼마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안내 방송에 잠에서 깼다. 서울로 가는 첫차다.

김유정 문학촌. 안개같은 메밀꽃.ⓒ 이수지
비오는 김유정 문학촌ⓒ 이수지
따각 따각. 역사 앞 보도블록을 부딪치는 사람들의 발소리. 출근 시간이다. 해는 이미 높이 떠서 만천하를 밝히고 있다. 연두색 텐트가 원망스럽다. 텐트 천은 왜 죄다 눈에 잘 띄는 색뿐일까. 역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이 텐트를 봤겠지? 전철역에 웬 텐트? 누가 들어있나? 쟤넨 출근 안 하고 뭐해? 노숙자야?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겠지? 나도 그래 봤으니까. 나도 저쪽에 있던 사람이니까. 저쪽이 아닌 이쪽 경계에 서 보긴 처음이니까.

확인할 순 없지만 강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몸을 쿡쿡 찔렀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조금이라도 사그라들길 기다리기 위해 한참을 누워 있었다. 딱딱한 보도블록 바닥에 밤새 배긴 몸이 조여왔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불편한 바닥 탓에, 한기 탓에, 불안 탓에 자꾸 깨는 잠은 질이 떨어졌다. 저녁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10시간을 누워 있었음에도 피로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주위가 조금 조용해진 틈을 타 텐트 밖으로 재빨리 나갔다. 텐트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 양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걸었다. 길에서 자다가 방금 일어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더 당당하게. 역사 내로 들어서자 방향이 갈렸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개찰구로, 세수하러 가는 나는 화장실로.

비온 뒤 실레마을ⓒ 이수지
실레마을 폐허ⓒ 이수지
화장실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기름진 얼굴. 부어오른 두 눈. 왼쪽은 눌리고 오른쪽은 튀어나온, 아무렇게나 죄어 맨 머리. 뭐야. 길에서 잔 지 일주일은 된 것 같은 이 몰골은. 딱 봐도 내가 텐트 주인이다.

얼굴 기름을 대충 닦고 머리를 매만졌다. 거울로 내 모습을 확인한 이상 조금 전처럼 당당하게 걷기는 어려웠다.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다. 길고양이 마냥 주위를 살피며 재빨리 걸었다.

더스틴이 텐트의 이슬을 털어내고 있었다. 텐트를 정리하자. 다시 걸을 때다.

실레마을. 걷기 좋은 마을이다. ⓒ 이수지
김유정역 앞 우리 텐트 ⓒ 이수지
춘천 시내에서 김유정역까지 걷기


경로: 춘천 시내 - 홈플러스 - 정족리 - 김유정 문학촌
거리: 약 15.7km
소요시간 : 약 6.5시간
난이도: 하 (거리가 길지 않다. 도로는 10분 정도만 걸으면 되고, 다 마을길이다)
추천: ★★★★☆ (춘천 시내 뒷마을도 좋고, 김유정 문학촌도 좋다. 김유정 문학촌이 있는 '실레마을'만 따로 여행 와도 좋을 것이다. '실레길'이라는 도보 코스도 조성되어 있고 카페, 식당들이 여럿 있다. 숙소는 없다.)

경로 소개


춘천 시내 - 홈플러스

우리는 숙소가 있던 춘천 소양강 처녀상에서 시작했다. 춘천 시내를 가로질러 남쪽 방향으로 걸으면 된다. 시내는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골 도로길 걷기보다 낫다. 춘천 시내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 홈플러스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김유정 문학촌이 나올 때까지 별다른 식당이 없으니 출출하다면 요기를 하고 가는 것도 좋은 생각.

홈플러스 - 정족리

홈플러스 바로 뒷길부터 시골길이다. 도시는 홈플러스 너머로 점점 멀어지고, 작은 논밭들이 있는 시골 마을을 따라 걸으면 된다. 한적하고 걷기 좋다.

정족리 - 김유정 문학촌

정족리를 다 걸으면 70번 도로가 나온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도로는 5분~10분 정도만 걸으면 되니까. 가다보면 왼쪽에 샛길이 나오는데 '실레길'로 빠지는 길이다. (안내판 있음) 하얀 메밀꽃이 우리를 맞아준다. 조금 걸으면 김유정 문학촌이다. 실레마을에서는 잠시 머물며, 도보코스가 나 있는 실레길 여기저기를 따라 걸어봐도 좋을 것 같다. 힘들면 쉬었다 갈 카페나 식당도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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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사회를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